육사신보(2022.4.22)사설
호국의 현장, 태릉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한 태릉(泰陵)은
고대부터 호국의 현장이었다.
백제는 수도(현위치 서울 송파)를 방어하기 위해
한강 이북에 북방 거점을 마련하였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남진 거점이 필요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수락산-불암산-봉화산-
검암산-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서울 동북 능선에
고구려 보루(堡壘: 소규모 성)를 구축하였다.
신라 또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불암산과 아차산에 신라식 산성을 축성하였다.
육군사관학교는
불암산과 검암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랑천 교통로와
왕숙천 교통로가 교차하는 요지다.
거란 침입(993~1019) 당시 국왕 현종은
개경이 함락되자 중랑천 교통로를 따라
남하해 나주로 피난하였고,
몽골 침입(1231~1259) 당시에는
기병이 주력이었던 몽골군의
주요 남하 경로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국왕들은
태릉과 강릉에 행차하였는데,
태·강릉 행차 이후 중랑천변에서
활쏘기·말타기 등 군사훈련을 병행하였다.
육군사관학교는
국왕의 태·강릉 행차시 경유지였다.
태릉·일대의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봉화산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또한 한양에서 동북으로 나아가는
교통거점으로 송계원(松溪院: 역참)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592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양주목사 고언백이 불암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태릉에 침입한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전투 이후 고언백은 선조의 신임을 받아
경기도방어사로 영전했다.
이듬해인 1593년 3월 조선군과 승병이 연합해
노원평(蘆原平)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한양 수복에 기여하였다.
이때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가 행주산성 전투와 견줄만하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1627년 2월 정묘호란 당시
충청병사 유림이 태릉 아래에서
대규모 기병을 주둔시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태릉 아래는 현재 육군사관학교 위치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의병들이 13도 창의군(義軍) 결성하여,
12월 서울 진입 작전을 시도할 당시
서울 동북 능선에 집결한 후
동대문 방향으로 진격한 적도 있다.
1946년 1월 태릉에
국군의 모체가 된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으며,
5월 정예 장교 양성을 위해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창설되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함에 따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생도대대로 편성되어,
포천 내촌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내촌리 전투 이후 생도대대는
육군사관학교로 철수해
92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함에 따라
다시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 방어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한강 이북에 잔류한
육군사관학교 생도 13명과
국군 7사단 19연대 7명은 불암산에서 호랑이유격대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태릉과 퇴계원일대에서
적 후방 타격과 주민 구출작전을 수행하였지만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1명은 후송 후 사망).
생도 1·2기는 임관 이전 150명이 전사하였고,
임관 이후 50% 이상 전사하였다.
생도 1기는 임관 20여 일 앞두고 있었고,
2기는 입교한 지 20여 일 지난 시점이었다.
6·25전쟁으로
육군사관학교 전체 졸업생 30%가 전사하였다. 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창설 이후
6·25전쟁 참전과정에서 위국헌신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역사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호국의 역사이며,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은
호국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첫댓글 육사신보
제637호에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