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수구리의 우리고대사 : 사마천 사기등 중국 고대문헌의 지리적인 고찰
--> 삼한의 위치는 중국 동부(산동성, 강소성)이었다(동이열전 내용) (daum.net)
■ 단군조선 시대는 대삼한(진한, 번한, 마한)이었는데, 삼조선(진조선, 발조선, 말조선)으로 바뀌었고,
한나라 시대인 위만조선 시대에는 소삼한(진한, 변한, 마한)이 있었습니다
※주) 진(辰)은 "별 진" "천자 진"자로 진한(진조선)은 천자인 단군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의 의미이며
마(馬)는 "말 마"자로 마한(말조선)은 말을 타는 기마민족 나라의 의미이며
번(番)은 '차례 번' 울타리 번'이었는데(진번조선) 변(弁)자로 변형되었으니
번한(변한, 발조선)은 중국왕조로 부터 단군조선을 지키는 나라의 의미로 봅니다
1) 단군 조선의 대삼한에서 진한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고, 번한은 중국 동부(산동성, 강소성 등) 지역이었고,
마한은 중국 동북부(산서성,하북성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마한, 신라는 진한, 백제는 변한이다라는 최치원의 주장은 대삼한을 말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2) 한나라 시대에는 소삼한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으로 발조선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졌습니다
■ 삼한의 위치는 중국 동부인 산동성과 강소성이었으니 초기신라와 초기백제는 산동성과 강소성에 있었습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후한서 동이열전의 내용)
1) 한나라 시대에 고조선 열국 (고구려, 부여, 삼한) 위치를 확정할수 있는 핵심은
예(濊, 동예) 위치로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한 지금의 하북성 동부인 창주시(천진시 남쪽)입니다
예(濊, 동예)의 위치가 하북성 동부 창주시이면 예의 남쪽이 삼한이니 삼한의 위치는 중국 산동성과 강소성이고요,
왜는 삼한의 남쪽이니 절강성과 대만에 왜가 있었겠지요
그리고 고구려와 옥저(동옥저)는 예(동예)의 북쪽이니 고구려는 하북성 북부가 되고요,
진황도시와 요서회랑에 옥저(동옥저)가 있었겠지요
따라서 삼한에서 발전한 것이 초기 백제와 신라이니 산동성과 강소성에 초기 백제와 신라가 있었습니다
2)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예(濊, 동예)가
한서 무제기의 예의 임금 남여(薉君南閭)가 항복하여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한 장소로
사기 평준서의 창해군을 설치하여 소란스러워진 연나라(하북성)와 제나라(산동성) 사이인
하북성 동부 지금의 창주시가 창해군의 위치이며 예(濊, 동예)이 위치가 됩니다
※주) 고대 중국인들은 하河(큰 강 또는 큰 호수)를 해海자로 표현했습니다
( 사기의 주석에 海一作河가 여러번 나옵니다 해海자는 하河를 나타낸다)
따라서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고려해야할 주요한 내용 중 하나는 해(海)자인데
해(海)는 바다라기 보다는 큰강이나 큰호수로 보아서,
서쪽의 해海는 소양호와 한나라 시대에 덕주시와 천진시로 흐르던 황하로 보아야 합니다
3) 예(濊, 동예) 위치가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한 지금의 하북성 동부인 창주시(천진시 남쪽)인 근거는
(1) 후한서 동이열전의 예(濊)에서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等 【集解】惠棟曰, 顏籀云, 南閭者, 薉君之名.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元朔 원년(B.C.128) 에 濊君 南閭 등이 右渠를 배반하고 28萬口를 이끌고 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武帝는 그 지역으로 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2) 한서 무제기에 "東夷薉君南閭等 服虔曰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晉灼曰 :「薉, 古穢字.」 師古曰 :「南閭者, 薉君之名.」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 동이(東夷) 예(薉)의 임금(君)인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주) 복건 왈 예맥(穢貊)은 진한(辰韓)의 북쪽, 고구려, 옥저의 남쪽에 있었고 동쪽으로 대해로 막혀있었다. 진작 왈, 薉는 옛날의 穢 자다. 안사고 왈, 남려(南閭)는 예(薉)의 임금(君)의 이름이다.
(3) 사기 평준서에 " 彭吳 【索隱】人姓名. 賈滅朝鮮, 【索隱】彭吳始開其道而滅之也.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팽오(彭吳)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기 위해,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지역은 바람에 초목이 쓰러지듯 소동이 일어났다."
--> 여기서 조선은 위만 조선이고 창해군은 예薉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예맥에 설치한 창해군인데 연나라(하북성)와 제나라(산동성) 사이이니
하북성 중부 동부해안이 지금의 창주시가 창해군이 설치된 지역이고 예(濊, 동예)가 있었던 위치입니다
■ 고구려 멸망시 평양성인 장안성의 위치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이 있는 하북성 진황도시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내용)
1)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고종(즉천무후) 아들인 장회태자가
개마대산 동쪽인 동옥저에 고구려 평양성이 있다고 주석을 달았는데..
이 동옥저의 위치가 만리장성이 끝나는 중국 하북성 산해관의 진황도시 입니다
※주) 개마대산은 개마형태(갑주를 씌운 말 형태)의 산으로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으로 봅니다
따라서 역사학자의 주장인 함흥 북동부가 동옥저라면
고구려 평앙성이 함흥 북동부에 있었다는 엉터리 주장이 됩니다
2) 삼국지 위서동이전 동옥저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章懷注,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 今王險城也.'
동옥저는 고구려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징회태자 주) 개마는 현명이며 현토군에 속하고,
개마대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고 평양은 왕험성이다
3) 후한서 동이열전
"東沃沮 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卽王險城也.'
동옥저는 고구려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징회태자 주) 개마는 현명이며 현토군에 속하고,
개마대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고 평양은 왕험성이다
■ 삼한의 위치
※주) 진시황의 만리장성 시작점 요동군 양평, 서진 장성의 시작점 갈석산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은 후한시대에는 개마대산이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요동군의 양평에서 갈석산으로 바낀것은
서진의 당빈(AD 280년 경)이 서진시대 장성을 보수하면서 부터다
☞ 진서 당빈 열전 晉書 卷42 列傳 第十二 唐彬 당빈(235-294) : 서진 초기 당빈의 진장성 3천리 보수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彬既至鎮,訓卒利兵,廣農重稼,震威耀武,宣喻國命,示以恩信。於是鮮卑二部大莫廆、擿何等並遣侍子入貢。
兼修學校,誨誘無倦,仁惠廣被。遂開拓舊境,卻地千里。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北平)을 침략했다. 당빈(唐彬)을 사지절 감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삼았다.
당빈이 군진鎭 에 도착하여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장을 날카롭게 했다. 농장을 넓혀 농사를 짓게해 위엄을 떨치고 나라의 명을 선유하고 은혜와 신의를 보였다.
이로 인해 선비(鮮卑)의 두 부족 대막외, 적하등이 함께 인질을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학교를 열고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쳐 어진 은혜가 널리 베풀어졌다. 마침내 옛 영역을 개척해 천리를 넓혔다.
다시 진나라의 장성새(秦長城塞)를 복구했는데 온성(溫城)에서 갈석(碣石)까지 이르렀다.
긍산(亙山, 상산常山, 항산恒山) 골짜기를 이어 거의 삼천리였다. 군을 나누어 둔전하며 지키게 하고 봉화와 돈대가 서로 바라보았다. [출처] 만리장성, 시대별 시작 위치|작성자 방랑자
첫댓글 ※주) 진시황의 만리장성 시작점 요동군 양평, 서진 장성의 시작점 갈석산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은 후한시대에는 개마대산이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요동군의 양평에서 갈석산으로 바낀것은
서진의 당빈(AD 280년 경)이 서진시대 장성을 보수하면서 부터다
☞ 진서 당빈 열전 晉書 卷42 列傳 第十二 唐彬 당빈(235-294) : 서진 초기 당빈의 진장성 3천리 보수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彬既至鎮,訓卒利兵,廣農重稼,震威耀武,宣喻國命,示以恩信。於是鮮卑二部大莫廆、擿何等並遣侍子入貢。
兼修學校,誨誘無倦,仁惠廣被。遂開拓舊境,卻地千里。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진서 당빈열전해석]
북쪽 오랑캐가 북평(北平)을 침략했다. 당빈(唐彬)을 사지절 감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삼았다. 당빈이 군진鎭 에 도착하여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장을 날카롭게 했다. 농장을 넓혀 농사를 짓게해 위엄을 떨치고 나라의 명을 선유하고 은혜와 신의를 보였다.
이로 인해 선비(鮮卑)의 두 부족 대막외, 적하등이 함께 인질을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학교를 열고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쳐
어진 은혜가 널리 베풀어졌다. 마침내 옛 영역을 개척해 천리를 넓혔다.
다시 진나라의 장성새(秦長城塞)를 복구했는데 온성(溫城)에서 갈석(碣石)까지 이르렀다.
긍산(亙山, 상산常山, 항산恒山) 골짜기를 이어 거의 삼천리였다. 군을 나누어 둔전하며 지키게 하고 봉화와 돈대가 서로 바라보았다.
[출처] 만리장성, 시대별 시작 위치|작성자 방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