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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 고구려
우리가 작년에 부여와 경주에 여행가면서
백제 역사 탐방, 신라 역사 탐방이라고 했잖아.
그 때 박영규 님이 쓴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과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을 읽었잖아.
고구려 역사 탐방은 비록 가지 못했지만,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은 읽어야겠다 생각했단다.
삼국시대 중에 가장 넓은 땅을 가졌고,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맞짱을 떴던 고구려.
누군가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
아빠도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아빠와 너희들이 이 땅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단다.
과거 역사의 조금만 변해도
수 많은 우연으로 태어난 우리가 태어나질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야.
고구려가 통일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륙으로 널리 뻗어나갔던 고구려의 700년 역사를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하려고 메모를 하면서 읽었지만,
잘못된 부분도 있으니 이해해주렴.
그리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책들은 지은이의 생각, 즉 사관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나오는 일부 내용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점도 생각하렴.
1. 700년의 시작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고주몽이라는 것을 너희들도 알고 있잖니.
예전에 그를 다룬 드라마 <주몽>이 인기를 끈 적도 있단다.
아빠는 안 봤지만 말이야.
고주몽은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당시 해모수는 나이가 엄청 많았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미 아들 해부루와 손자 금와가 있었다고 했어.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몽을 임신한 유화는 왕궁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주몽을 돌보아준 사람이 금와였단다.
그런데 금와의 아들 대소는 주몽을 시기했단다.
아무래도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점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거야.
그래서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주몽은 친구들과 함께 졸본 땅에 있는 구려국으로 망명을 했단다.
그리고 기원전 37년에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그 지역에 이전부터 구려라는 나라고 있었는데,
주몽이 더 발전시켜서 '숭고한'이라는 뜻의 '고(高)'을 붙인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니 실제로 고구려의 역사는 기원전 37년부터 더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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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 기록과 소서노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 즉,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이 계루부의 족장 연타취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계루부의 세력 확장에 기여하고 마침내 연노부를 누르고 왕이 됨으로써 계루부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연노부를 중심으로 한 졸본부여의 국호는 ‘구려’였는데, 계루부를 일으킨 주몽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위대한’, ‘숭고한’ 등의 뜻을 가진 고(高)를 덧붙여 ‘고구려’라고 했다. 부족연맹체 성격이 강했던 구려는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중앙집권적 국가인 고구려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처음으로 개국된 나라가 아니라 적어도 고(古)조선 말기부터 구려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주몽에 의해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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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성씨를 '해'에서 '고'로 바꾸었다고 하는구나.
고구려를 처음 세운 졸본이라는 곳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대.
졸본에서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 온조를 낳았는데,
주몽은 졸본으로 오기 전에 이미 예씨와 결혼하고 아들도 있었단다.
고구려 1대 왕인 고주몽은 동명성왕이라고 불렀고,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소서노, 비류, 온조는 나중에 고구려에서 쫓겨나듯 떠났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전에 이야기한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참고하길.
....
국사책에 보면 고구려는 늘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와 교류 및 갈등을 보인 것은 훨씬 후대의 이야기이고,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압록강 북쪽의 광활한 지역에서 있으면서
그곳에 있는 나라들과 경쟁하고 협력을 하였단다.
그 곳에 위치한 나라들을 보면 동이, 예맥, 부여(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말간, 비류, 행인, 북옥저 등의 나라들이 있었고
고구려는 이 나라들과 세력 다툼도 하고 협력도 하고 그랬단다.
...
2대왕은 유리명왕으로 동명성왕 주몽의 맏아들이며
36년간 왕위에 있었단다.
어린 시절에는 주몽이 졸본 땅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어머니 왕후 예씨와 둘이 부여에서 지냈단다.
나중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뒤 고구려로 왔고,
유리명왕은 태자에 책봉되었단다.
유리명왕이 왕이 된 뒤 위나암이란 곳으로 천도를 했는데
그 이후 유흥이나 즐기고 국정은 제대로 돌보지 않았어.
신하들이 조언을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단다.
당시 태자는 해명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해명은 아버지와 달리 옛도읍지에 남아 그곳을 잘 다스렸단다.
이에 유리명왕이 화를 내고 태자에게 자살명령을 내려서 해명은 죽고 말았대.
학창 시절 때 "황조가"라는 시로 알려진 유리명왕(아빠가 배울 때는 유리왕이라고 했는데...)이라서
착한 왕인 줄 알았는데, 참 나쁜 왕이었구나.
태자뿐만 아니라 장남이었던 도절도 아버지와 의견 차이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유리명왕의 짓이 아닐까 싶구나.
…
태자와 장남이 죽고 유리명왕의 뒤를 이은 이는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 무휼인 제3대 대무신왕이란다.
대무신왕은 26년간 재위했고,
팽창정책을 써서 영토를 확장했다고 하는구나.
낙랑국을 정복했는데,
이때 활약한 이가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호동 왕자란다.
호동 왕자는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이란다.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호동 왕자는 나중에 누명을 쓰고 자살 명령을 받고 죽었다고 하는구나.
대무신왕 때 고구려는 부여와 전쟁을 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한나라의 침략을 을두지라는 사람이 격퇴시켰다고 하는구나.
...
4대왕은 민중왕으로 4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를 했대.
유리명왕의 다섯째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이었어.
태자가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민중왕이 왕위에 올랐어.
가뭄과 홍수가 잦아서 나라가 어려움을 겪었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민중왕이 죽고 대무신왕 때 태자였던 대무신왕의 장남이 5대왕 모본왕이 올랐단다.
모본왕은 주변 사람을 너무 의심을 해서 늘 역모에 대한 걱정을 했단다.
의심을 받던 신하들 중 두도라는 사람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먼저 왕을 죽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모본왕은 재위 5년만에 신하의 손에 의해 죽었다고 했어.
그리고 왕위에 오른 이는 6대왕 태조왕인데,
53년에 즉위하여 무려 93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하는구나.
이게 가능이나 한 이야기인가 싶구나.
오래 산 것으로 유명한 장수왕보다 훨씬 오래 살았구나.
왕 위에만 93년간 있었다고 하니,
아빠가 아는 왕 중에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던 사람인 듯 하구나.
더 놀라운 것은 왕위에서 내려온 것도 죽어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동생 수성이 왕위 찬탈을 도모하는 것을 눈치채고,
그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그만두었다고 하는구나.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7살에 왕위에 올라서 처음에는 모후가 섭정을 했대.
아무튼 7살에 왕위에 올라서 100살까지 왕위에 있었고,
왕에서 물러나서도 19년이나 더 살고 119살에 죽었다고 하는구나.
오호 대단하시네.
그런데, 태조왕이라는 묘호는 원래 나라를 세운 왕에 보통 붙이는데,
고구려는 6대왕의 묘호가 태조였다고 하는구나.
그 이유는 당시 무척 강성해져서 그런 칭호를 붙였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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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따라서 ‘태조’라는 묘호는 고구려가 주변국에서 종주국으로 변모한 사실을 담고 있는 칭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세력으로 봐서 스스로 종주국을 칭한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나라도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걸지 못할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제6대 임금의 묘호를 ‘태조’라고 붙인 것은 그가 고구려를 재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고구려가 종주국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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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륙으로 대륙으로
7대왕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태조왕의 동생 수성이 왕이 되었는데,
그의 묘호는 차대왕이었단다.
100살에 동생에서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동생 수성의 나이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텐데,
차대왕은 태조왕보다 24살이 어렸다고 하는구나.
차대왕은 독단에 오만 방자하고 유흥을 즐길 뿐만 아니라
태조왕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거나 자살하게 했다는구나.
폭정이 계속되자, 신하들이 정변을 일으켜 그를 죽였다고 하는구나.
8대왕은 신대왕으로 태조왕의 이복동생이라고 했고,
그는 태조왕보다 42살이 어렸다고 했어.
그렇다고 해도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77살 때였다고 하는구나.
차대왕을 죽인 것은 그의 폭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 명림답부라는 사람이 주도를 했대.
그는 신대왕 때는 충신으로 일했고,
한나라가 침략했을 때 영리한 계략으로 한나라 대군을 격퇴했다고 하는구나.
이를 좌원대첩이라고 하는데 아빠도 처음 들어봤구나.
9대왕은 신대왕의 둘째 아들 고국천왕이란다.
슬슬 익숙한 왕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구나.
고국천왕이 즉위했을 때 외척세력이 득세를 해서 숙청을 시도했대.
그런데 오히려 반란들이 연이어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심지어 큰 형인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대. 다행히 진압을 했지만 말이야.
이 시대 유능한 재상 을파소가 개혁에 앞장섰다고 하는구나
인재 등용 제도를 만들고 환곡 제도로 만들고 외교 정책도 잘 했다고 하는구나.
...
고국천왕이 아들 없이 죽었는데
왕후 우씨가 계략으로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 발기(앞서 이야기한 발기와 다른 사람)가 아닌
그 아랫동생 연우를 왕위에 세우려고 했어.
그러자 발기가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단다.
그래서 연우가 왕위에 올랐는데,
고국천왕의 왕비였던 왕후 우씨와 결혼하였단다.
그러니까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형수랑 결혼을 한 것이지.
막장드라마이지만 멀고 먼 옛날이니 그러려니 하자꾸나.
연우의 묘호는 산상왕이었단다.
산상왕은 환도성으로 도읍지를 옮겼어.
…
11대왕은 산상왕의 아들 동천왕으로 227년부터 248년까지 왕위에 있었단다.
서진정책을 펼쳐 나라가 크게 발전했고,
백성들의 신망을 많이 얻었단다.
당시 중국 땅에서는 삼국지로 유명한 위, 촉, 오가 자웅을 겨루던 시절이었단다.
고구려는 그들 삼국 중 위나라와 패권 다툼을 하다가 화친을 맺기도 했어.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해 왔는데 거절하기도 했다는구나.
삼국지 속 인물들이 나와서 친근하기도 하더구나.
삼국지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그들이 한창 싸울 때 동쪽에서는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구나.
시간이 흐르고 고구려와 위나라의 화친이 깨지고 전쟁도 벌였대.
밀고 밀리던 전쟁에서 위나라 관구검에게 고구려가 크게 졌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평양은 오늘날 북한 평안도에 있는 평양은 아니라고 하는구나.
당시 평양의 위치가 어디인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지은이 박영규 님은 요양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
그리고 박지원의 말을 빌어 평양이라는 말 자체가
일반명사로 쓰였을 것이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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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이처럼 평양이 어떤 특정한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시대에 ‘도읍’이 있던 곳을 부르는 일반명사였을 것이라는 박지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박지원의 주장을 근거로 할 때, 고구려 영토 안에는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평양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여러 지역이 있었고, 동천왕은 그 가운데 한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또한 동천왕 당시 고구려는 대동강변까지 영토를 확장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동천왕의 평양이 평안남도 대동강변의 평양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동천왕의 평양과 대동강변의 평양은 전혀 무관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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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왕은 동천왕의 장남 중천왕으로 248년부터 270년까지 재위했어.
위나라와 전투에서 승리를 해서
그 이후 위나라는 다시는 고구려를 못 쳐들어왔대.
위나라는 결국 사마씨가 정권을 잡고 사마염이 왕이 된 다음
진(晉)나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구나.
...
13대왕은 중천왕의 장남 서천왕으로 270년부터 292년까지 재위했어.
직접 전쟁에 출정하여 북진 정책을 주도했어.
그런데 그 사이 수도에서는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다행히 진압되었단다.
14대왕은 서천왕의 장남 봉상왕으로 292년부터 300년까지 왕위에 있었어.
왕위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던 시기이구나.
그런데 봉상왕은 의심과 시기와 방탕의 왕이었다고 하는구나.
어쩐지 한동안 안정적인 국정이 이어진다 싶더니...
봉상왕은 의심병이 도져 숙부 달가를 죽였어.
그로 인해 조정은 혼란스러웠고 민심은 그를 떠났지.
아우 돌고도 누명을 씌워 죽이고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
재상이었던 창조리가 노력을 해보았으나 왕의 폭정을 멈출 수도 없었단다.
결국 창조리 주도로 반정을 일으키고 성공했단다.
반정에 성공한 창조리는 돌고의 아들 을분을 왕위에 앉혔단다.
그가 15대왕 미천왕이란다. 300년부터 331년까지 재위.
아버지 돌고가 누명을 쓰고 죽고 난 다음 을분은 도피생활을 했어.
소금장수, 머슴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창조리의 부하들이 힘들게 을분을 찾아내어 반정에 참여하게 되었단다.
왕위에 오른 을분(미천왕)은 재위 내내 민심이 안정되었는데
이는 재상 창조리의 공이 컸다고 하는구나.
당시 중국은 5호16국의 혼란의 시대였는데,
미천왕도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팽창정책을 펼쳤다고 하는구나.
16대왕은 미천왕의 장남 고국원왕으로 331년부터 371년까지 재위.
모용선비의 남하정책으로 위협을 받아 성을 구축하였대.
환도성으로 천도를 하고 모용선비의 침략을 대비했어.
모용선비가 연나라로 바뀌고도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후방에서 공격해오는 진나라에 패배하고 멸망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미천왕 때 드디어 백제와 접촉하게 된단다.
당시 대륙백제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공격해왔는데
이때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이었단다.
백제와 전투 중에 고국원왕은 화살을 맞고 죽었단다.
3. 전성기와 몰락
17대왕은 소수림왕으로 고국원왕의 장남이란다.
371년부터 384년까지 왕위에 있었어.
문치주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백제와 거란의 거듭된 침략으로 계속 전쟁을 해야 했어.
이런 외세의 침략을 막는데만 힘쓰다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그러나 소수림왕은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널리 알려진 왕이란다.
왜냐하면 그는 개혁에 앞장서서
불교를 공인하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우고 율령을 반포했거든.
이런 소수림왕의 업적은 예전에 시험에도 자주 나왔던 기억이 있구나.
18대왕은 고국원왕의 차남인 고국양왕이란다.
384년부터 391년까지 재위.
백제와 계속 전쟁을 하면서 대립했단다.
그리고 드디어 19대왕 광개토왕.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담덕.
391년 왕위에 올라 413년까지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단다.
전방위 팽창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했어.
이에 신라는 미리 화친 제의를 했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였단다.
그러나 백제와는 계속 전쟁이었어.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도 갚아야잖니.
대륙백제뿐만 아니라 반도내의 백제도 공격했어.
관미성 전투, 패수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병신대원정으로 백제의 영토 많은 부분을 차지했단다.
그리고 백제 공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하평양을 설치를 했단다.
이 하평양이 오늘날 평안도의 평양일 것이라고 하는구나.
화친을 맺었던 신라에 침략한 왜도 공격하여 몰아냈다고 하는구나.
광개토왕의 업적은 광개토대왕비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단다.
...
20대왕은 장수왕으로 광개토왕의 아들이란다.
413년부터 491년까지 오랫동안 왕위에 올랐어.
광개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영토 확장에 힘썼고
특히 백제와 전투에 집중했단다.
전투에서 백제 개로왕을 잡아 참수형에 처함으로써
고국원왕의 복수를 완성했단다.
잘 한 복수인지 모르겠구나.
신라는 태세 전환을 해서 백제와 연합을 해서 고구려를 공격했단다.
21대왕은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으로 491년부터 519년까지 재위했어.
신라와 백제 연합(나제연합)의 계속된 전투를 하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나라 운용을 했단다.
22대왕은 문자명왕의 장남인 안장왕으로 519년부터 531년까지 재위.
대륙 백제와 계속 전쟁을 벌였으며,
이때 대륙 백제는 거의 소멸되다시피 패배하고
수도를 부여로 옮기게 되었단다.
아빠가 계속 대륙 백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전에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에서도 자세히 이야기했으니
그 때 쓴 독서편지를 참고하렴.
23대왕은 안원왕으로 안장왕의 동생이었고
531년부터 545년까지 재위했단다.
안원왕은 자연재해가 많아서 고생한 왕이었단다.
그리고 아들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정권다툼을 했어.
형인 평성이 동생 세군을 죽이고 다음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24대 양원왕이란다. 545년부터 559년까지 재위.
북쪽에는 돌궐의 공격, 남쪽에는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영토가 줄어들었단다.
25대왕은 평원왕. 양원왕의 장남임. 559년부터 590년까지 재위
북쪽에서는 여전히 돌궐이 공격이 있었고,
북주도 고구려를 공격했단다.
이때 우리에게 익숙한 온달장군이 등장하는데,
중국의 북주가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온달장군이 북주의 공격을 막는데 공을 세웠다고 하는구나.
결국 북주가 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되는데,
이 수나라도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려서 고구려는 이번에는 수나라 공격에 대비해야 했단다.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을 구축했다고 했어.
26대왕은 영양왕으로 평원왕의 장남이었어. 590년부터 618년까지 재위.
수나라의 4차례나 계속된 침략을 모두 막아냈단다.
이때 2차 침략 때 살수대첩으로 수나라에 대승을 거둔 이가 을지문덕 장군이란다.
27대왕은 영류왕. 영양왕의 이복 동생. 618년부터 642년까지 재위.
중국은 수나라가 망하고 이연이라는 사람이 당나라를 세웠단다.
이연의 차남 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켜 태자인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왕위에 올랐단다. 그가 당태종이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누군가 떠오르지 않니? 묘호도 동일하고...
당태종은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주변국을 위협하였단다.
이에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하여 성을 구축하였는데,
이 성 구축을 주도한 사람이 연태조라는 사람으로 연개소문의 아버지란다.
연태조가 죽고 나서 연개소문이 이어서 성을 구축했어.
영류왕은 당나라에 온건 정책을 펼쳤는데, 연개소문은 이에 반발하였어.
그래서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연개소문이 반정을 일으켜 신하들과 영류왕을 죽였단다.
그리고 보장왕을 왕위에 앉혔어.
연개소문의 반정에 의해 왕이 된 28대 보장왕은 평원왕의 셋째 아들 대양왕의 장남이었단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앉힌 허수아비 왕이었어.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대막리지라는 직함을 사용했어.
드디어 당이 고구려를 공격했어.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여 당의 공격을 막아냈지.
그런데 안시성을 막는데 큰 공을 세운 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안시성 성주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고구려가 얼마 후 멸망하게 되었으니
그의 노력이 헛되어 안타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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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의 영웅호걸로 통한 이세민을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쫓겨가게 한 안시성 성주는 불행히도 사서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 송준길과 박지원은 이름이 전하지 않던 이 안시성 성주를 양만춘(梁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고구려 말의 학자 이색과 이곡은 당 태종 이세민이 안시성 싸움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당 태종이 눈에 화살에 맞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안시성 싸움에서 패배하여 회군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 태종을 물리친 안시성 성주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안시성을 지키며 고구려 재건을 노렸는데, 불행히도 671년 7월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불세출의 영웅 안시성 성주가 이 때 죽었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뒤에 안시성이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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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연일 공격을 해왔어.
남쪽도 정세가 복잡하게 흘러갔어.
당태종이 죽고 나서 당나라와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는데,
다시 당나라는 고구려를 쳐들어왔단다.
이때는 이미 신라와 당나라와 연합을 해서 고구려를 치던 시기였어.
연개소문이 뛰어나긴 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연개소문의 반도 쫓아오지 못했어.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은 권력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고구려도 몰락의 길을 걸었단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회광반조이 아니었나 싶구나.
당과 신라의 계속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고구려는
668년 하평양이 무너지고 보장왕은 항복을 했단다.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672년 모두 투항함으로써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정말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휴. 드디어 고구려왕조 28명의 왕에 대해서 다 이야기했구나.
생각보다 시간도 오래 걸렸네.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쓰면서
책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김할 수 있어 좋았단다.
하지만 이 기억력이 오래 가지 못함이 또한 아쉽구나.
PS:
책의 첫 문장: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일치한다.
책의 끝 문장: 불세출의 영웅 안시성 성주가 이 때 죽었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뒤에 안시성이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다.
책제목 :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지은이 : 박영규
펴낸곳 : 웅진지식하우스
페이지 : 412 page
책무게 : 577 g
펴낸날 : 2004년 11월 18일
책정가 : 16,800원
읽은날 : 2022.12.30~2022.12.31
글쓴날 : 2023.0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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