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일대 20여개소의 땅굴 징후 실상
화성군 송산면 지화리에서 발견된 제6땅굴은 1999년 10월 14일
민간 시추업자가 화성군으로부터 주민 상수도용 지하수 개발하청을 받아
밭 가운데 구경 8인치의 시추기로 관정을 파 덜어 가던 중에
지하 30-40m 지점의 암반에서 3m 높이의 지하공간을 발견하자,
수상히 여긴 나머지 콤프레샤를 수시간 동안 가동시켜 압축공기를 계속 주입시켜 보았으나
무한대로 유입 흡수되는 지라 폐광이나 거대한 동굴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민간 땅굴탐사자들에게 제보하게 됨으로 알려진 것이다.
10년 이상 땅굴 탐사에 종사해온 민간 전문탐사자들은 현장에 임하여
다우징(dawsing)탐사를 실시한 결과 땅굴과 같은 공간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고
1999년 11월 1일 이 지하공간을 따라 약 100m 서측의 야산 하록에 지하 70m까지
뚫고 내려간 다음 특수녹음기를 갱내에 설치하여 청음하던 중 11월 4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기간 중 수차에 걸쳐 기계진동소음과 고압전기 유도음이
시추공 근거리에서 포착 녹음된 것이다.
동 민간 탐사자들(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서 제2땅굴을 발견한 정명환 사단장과
국방부장관 과학보좌관을 지낸 윤여길 박사,
대공수사관출신의 예비역 육군 준위 정지용 외 6명의 땅굴전문가들)은 이를 좀더 과학적으로
확인하고자 그 후 동 발견지점을 감시 관찰하면서 다우징 탐사를 계속하여
땅굴의 징후를 확증하는 한편 동지점에서 1.5km 동측의 논과 도로가 마주치는 곳이
다우징 탐사결과 지하 공간 두 군데가 맞닿는 지점임을 알아내고
여기에 2000년 2월 12일부터 18일까지 지하 40m까지 시추공 4개를 뚫고서
청음기를 설치해 놓은 결과 2월 14일 야간에 기계소리 및 충격 마찰음과 함께
“대감께서 총리 되십니다”란 사람목소리가 청취되어 긴장케 했던 것이다.
이 쯤 되면 제1,2,3,4땅굴을 발견 탐사할 할 당시의 징후에 비하면
거의 100% 신뢰성과 정확성이 보장되고 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상세한 발견경위와 시추현장 사진
그리고 녹음테이프를 첨부한 완벽한 “서해안 장거리 남침 땅굴 징후 발견 신고서”를
2000년 8월 23일 국가정보원에 우체국 내용증명으로 보낸 것이다.
이 시기가 6.15선언 직후로서 김정일에게 마취되었는지 당국은
이 같은 중차대한 정보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강원도 포수나 다름없이 무소식이었다는 것이다.
동년9월 2일 민간 탐사자들은 독촉장을 보냈다.
그래도 무소식이라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이들은 9월 19일 부득이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을 이적행위로 서울지검에 고소하자,
다급해진 국정윈은 9월 18일자로 문서를 소급 작성하여 국방부에 이첩했다는
회신을 보내고는 “난 몰라”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이었다
국방부가 국정원으로부터 이를 통보받고 연천 땅굴 식으로 탁상공론으로 판단처리 할 것이
예상되는 바, 이들 민간탐사자들은 서둘러 서울지검 담당검사(임권수 부장 검사)에게
신중한 조사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12월 9일 발송하였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한심한 국방부는 현장조사결과 땅굴이 아니란 결론을 얻었으니
계속관심을 가져달라는 형식적인 회신을 12월 29일 보내왔다
그 회신 요지는 북한으로부터 너무 장거리이고, 해저공사시의 해수누수 가능성,
녹음한 기계음과 육성음의 조작 가능성 등을 전제할 때,
땅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안보의 대들보라는 군이 이 모양 이 꼴로
사명감이나 공익사상이 결여되어 있다면 국가운명이 가히 풍전등화라 할만하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민간 탐사자들은 2001년 1월 15일 명명백백한
땅굴 징후를 무조건 부정한 땅굴관련 직에 종사하는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담당관을
직무유기 및 특수 이적죄로 국방부 검찰부로 정식 고발을 했다.
현제 피소된 자는 국방부 정보 본부 소속 대침투정보과 대령 1명과 군무원 1명 그리고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탐지과 소속 대령 1명과 군무원 1명 모두 4명이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2001년 1월 16일자로 서울지방검찰청은 국정원장 피소건에 대하여
국방부에서 현장을 탐사한 결과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유기한 사실을
인정 할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법리오해 및 사실오인으로 인한 것인바 공소부제기 이유를
아래와 같이 고지한다는 내용으로 사건종결처리 회신을 보내온 것이다.
이제는 검찰마져 압력을 받아 사건에서 손을 뗄려는 것이다.
이에 고소자들은 다시 1월 22일 서울 지방검찰청에
불기소결정에 대한 불복항고장을 제출해 놓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항고장에는 화성 땅굴의 징후 추가 자료와 국방부관련자 허위 판단에 따른 고소장
그리고 청와대 남침땅굴 침투 가능성에 대한 탄원서 까지 첨부되어 있다.
국정원장과 국방부 및 육본의 땅굴 담당자에 대한 사직 당국의 법적처리가 주목되는 가운데
고소인은 일단 조서를 받은 바 있으나 피고소인은 지금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고소자들은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파탄지경에 생존권 마져 위협받으면서 고소를 취하하라는
당국의 직접 간접 협박과 회유를 받고 있으나 목숨을 걸고 국가안보를 위해
법정투쟁을 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거대한 국가정보원과 군의 기무사, 정보사 그리고 통신정보부대와
국방부 및 합참 정보본부는 물론 각군 작전정보참모부 등에서 전략정보와 전투정보를 위해
해마다 쓰는 돈이 수조원인데 단돈 몇 억원이 아까워서 인지,
아니면 고위층의 지령인지는 모르지만, 과학적인 확인절차도 없이 탁상공론으로
독안에 던 쥐나 다름없는 결정적인 땅굴 정보를 부정 묵살하는 것은
반국가적 이적행위임에 틀림없다. 2개 여단 규모의 육군공병대를 투입하여
당장 불필요한 경의선 개설을 위한 기반공사 및 지뢰제거작업을 하고
몇 십억원을 드려 지뢰제거기를 긴급공수까지 해왔으나
사용불가품이라서 방치해 놓고 있으면서, 비예산사업으로 또는 몇 억원의 대민발주 공사로
간단히 땅굴을 절개하여 의혹을 투명하게 공개 할수 있음 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땅굴은 연천과 화성에서만 발견 된 것이 아니고 수도권 전지역에 걸쳐 현재까지
20여 개소가 민간인의 신고로 시추 확인된 바 있다.
이들 대부분은 시추공에서 기계음과 인간의 육성을 청취 녹음한 증거까지 확보 하고 있으며
민간 탐사자들은 지하음을 녹음한 테이프 200여개를 증거로 확보하고 있다.
그 동안 당국에 무수히 신고했으나 “ 또 땅굴이냐?,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 고 하면서 외면한다.
이들은 지금 보상금을 노린 사기꾼이나 정신병환자로 취급받거나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당할 위기에 몰리기도 하는 딱한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면 수도권의 대표적인 땅굴 징후 사례와 당국의 무성의한 대응을 이하에서 소개한다.
역시 이와 관련한 가장 큰 관심 꺼리는 청와대 인근에 땅굴 징후가 포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1년 1월 3일 민간탐사자들이 청와대 비서실장(한광옥) 앞으로
“청와대에 남침땅굴이 침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란 제하에 그 가능성을 입증하는 자료와
설명서를 보낸바 있으나 현재까지 무반응이란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93년에 어떤 젊은이가 김포반도와 행주산성 및 세검정을 경유한 남침 땅굴이
청와대에 침투했다는 도면을 제시하면서 청와대에 이르는 땅굴 지상루트를
조석으로 순찰하는 불순분자까지 있다는 제보를 모 국회의원에게 하였던바
그가 관할 3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통보함으로서 3군사령부의 모 대령이 진상을 규명코자 ,
그 제보자를 수차 만난 다음 어느 날 그제보자가 자신의 부친 묘소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 미스테리 같은 사건이 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와대에서 불과 1km지점인 서대문 교도소 뒷산에 하록 민가에서
지하 굴착음을 청취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간 민간탐사반이 사실임을 확인 한바 있는데,
육군 탐지요원은 아직도 북한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굴착한다는 한심한 소리만 하고는
가버리더란 것이다. 현재 북한이 300대 가량 보유한 자동굴착기(TBM: tunnel boring machine)은
고압전기로 작동되고 매연이 없으며 암석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럭으로 나오므로
이를 해상에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김포반도 북단 해수가 한때 이유 없이 뻘탕물로 뒤덮힌 것을
해병초소에서 관측하기도 한 것이다.
②김포반도의 애기봉 입구에 거주하는 민간인이 방밑에서 땅굴굴착소리 및 진동음을
1988년부터 빈번히 청취한 것은 해안초소 해병대 초병들도 같은 기계음을
근무 중에 수차 청취하고 보고했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
이 위치에서 한강을 따라 후방으로 내료와 한강 하류인
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의 지하 시추공 110m 깊이에서 녹음한 음성을
일본 음향분석가인 스즈끼 마스미 박사가 분석한 결과
“이거 만지면, 일만 일천, 감전되지, 예 예”란 두 사람의 대화가 북한 억양임이 판별되었는데
일만 일천 볼트는 북한에만 쓰는 송전방식이란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89년 9월 11일
후평리 지하 시추공에서 채취한 양생중인 세멘트를 분석한 결과 북한제 임이 확인되었고,
이 곳을 당장 시추절개토록 육군 참모총장(이종구)에게 요청했으나 묵살되자
1990년 6월 11일 노태우대통령에게 진정서로 호소했으나 결국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수차에 걸쳐 한강 하류인 김포군 고촌면 향산리 지하 100m에서
갱차 통과음과 자동굴착기 소리가 녹음되었으며, 행주산성 인근 민가에서는
한밤중에 방안에서 땅속의 큰 진동음을 수 차례 들었고 시추공 옆 농수로에서 갑자기
물이 치솟기도 하였던 점을 미뤄보아 김포반도 건너에서 한강 하저 밑을 통해 행주산성을 거쳐
서대문 쪽으로 땅굴이 뚫린 것이 확실시되나 이 모든 사실을 신고 받고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과학적인 사실확인을 하지도 않고서 무조건 수용치 않으려 하는 것이다.
심지어 민간 시추작업을 방해 중단시키고 땅굴존재를 부정하고서
지금도 덮어두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월간 조선에 1992년 5,6,7,8,12월호에 연제된바 있다.
그 다음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관심지역이 주한 미군 기지인데,
의정부와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까지 1994년에 이미 땅굴 징후가 발견되었으니
지금쯤은 미군기지 내 외진 곳의 지표면 직하에다 출구를 안에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의정부 가능2동 미군기지 바로 앞에 사는 이국진씨는 1994년 9월부터 방 구둘 밑에서
요란한 착암기 굴착소리가 나서 3번이나 국방부 당국에 신고를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간탐사자에게 제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린 사실도
민간 탐사들과 함께 확인 하고는 지하음 청취를 위해 잠복근무를 하여 밤새 현장에서
청취녹음하였다.
1994년 12월에 뒤늦게 육본 탐지과에서 나와서는 민간인들이 보상금을 타려고 하는
수작이라고 일언지하에 확인작업을 거부하고 돌아가 버린 후에도
몇 주간 동안 이 집 밑에서 지하음은 더욱 선명하게 계속 들리었다.
그후 1995년 1월 27일 이국진씨 집 우물에 청음기를 설치해 놓았는데 궤도차 소리가 나더니
이상한 음성이 들려, 청진기를 갖다 데어 들어보니 “밥 먹으러 가”하는 육성이 청음되었다.
민간 탐지팀은 땅굴 출구를 만드는 과정의 근거리 음성이란 판단을 하였다.
2월 4일부터 민간탐사자들이 이 집에서 30m 이격된 곳에 28개의 시추공을 뚫었는데 드디어
2월 8일 한 시추공에서 시추기 파이프가 지하에서 부딛히는 강한 금속성 충격음이 들리었다.
지하 땅굴에서 지상으로 박아놓은 쇠 말뚝을 시추공이 건드린 것이다.
이쯤 되면 시각을 다투는 위급상황이라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제2땅굴 발견
사단장인 정명환 예비역 장군이 안기부에 절개작업을 정식으로 긴급 요청했는데
그 때가 1995년 2월 19일이었다. 이에 앞서 1월 4일 충현교회 모 장로를 통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 “대통령께 드리는 고언과 국방부의 땅굴징후 오판 실태”란 제목으로
된 장문의 진정서를 전달하였다.
이 내용을 알게 된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직접 감독하여
현장을 서둘러 절개 확인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사실을
그 후 연락받아 민간 탐사자들은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방부를 제쳐놓고 안기부에 대통령이 특명을 하달하여 절개하도록 함으로서
공사가 안기부 감독하에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현장에 나온 안기부 요원이 현장에서
시추만 하지 절개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을 오도해가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 탐사팀의 별도 시추를 방해하면서 지연전술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민간 시추자들을 서울로 강제 연행하여 땅굴탐사작업에서 손을 떼도록
3일간 연금 협박하여 각서를 쓰도록 하고는 ( 현정권은 친북 좌익 정권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지용님이 국정원 요원에 의해 앰배새더 호텔로 잡혀가서
2박3일간 고문을 당하고,앞으로 땅굴은 찾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
당시까지 입수된 모든 자료를 무시하라고 강권하였다.
이어서 서둘러 작업을 종결하면서 ,민간업자들이 보상금을 타기위한 노름이라고
허위로 작성된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안기부장(권영해)이 보고함으로서
의정부 땅굴은 절개확인 직전에 미궁에 빠지게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권영해의 농간에 넘어가
1995년 3월 15일 땅굴확인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 때가 6년 전 일이니 지금쯤 만약 그 땅굴이 사실이라면
미군부대는 물론 서울까지 연결되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격분한 민간 탐사자들은 일단 냉각기를 둔 후에
1997년 11월 14일 권영해 안기부장(당시)과 불법연행한 수사관 6명을 공갈협박,
직권남용, 명예훼손, 직무유기, 이적행위 등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으나,
오영성 담당 검사는 1999년 8월 11일 공소부제기 이유 고지를 고소인에게 보내고는
사건을 불기소처분하고 말았다.
물론 그동안 직접간접으로 협박과 공갈도 수없이 받은 것은 불문가지이다.
의정부 땅굴이 이렇게 일단락 될 무렵인 1995년 후반기에 동두천 미군부대 정문 앞인
동안동과 광암동 일대에 겨주하는 민간인들로부터 자하 굴착음 청취 신고를 받고
현장 답사를 하여 사실을 확인한 동안동 파출소장은 파출소 밑바닥에서도
같은 지하음이 들린다는 근무자의 보고를 재확인한 다음 의정부 경찰서에 보고했더니
민간 탐사자들에게는 골치 아프니 얘기하지 말라는 핀잔만 듣고
더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후일 이 사실을 안 민간탐사자들이 다우징탐사법으로 이 일대를 확인 한 결과
땅굴 진로가 미군부대임을 확인하였으나, 시추비용 마련이 불가능함은 물론 당국의 방해로
굴착을 해보지 못한 체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굴착음이 들리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공사가 완료되었거나
굴착진로가 바뀌었음을 뜻한다.
전 국방부 장관 과학기술 보좌관
전 국방 과학 연구소 연구위원
전 대우 중공업 부사장
공학 박사
윤 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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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최민용
국방부는 나를데려가 다우징탐사 테스트했다
저는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다우징 탐사기술로서,
사막에 묻혀있는 지하매장물을 찾아내는 일을 하다가 귀국한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남침땅굴 문제를 알게되었습니다.
당시, 땅굴을 찾는 민간인들과 김포지역 주민들은 지하 여러곳에서
" 기계소리를 들었고, 오랬동안 먹던 우물물이 갑자기 빠젔다가 다시 차올라왔다"는 등
분명히 땅굴징후라고 주장한데 반해, 국방부 요원들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땅굴이 아니라는
내용"이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 되었습니다.
저는 이라크에서 일한 경험으로, 그 징후들이 땅굴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포 현장에 찾아가 다우징 탐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깜짝 놀랬습니다.
민간인들과 김포 주민들이 땅굴 파는 소리를 들었다는 곳은
모두 땅굴과 같은 공간 현상이 나타났고,
그 보다도 훨신 후방지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김포지역을 담당하는 제2 해병사단에 찾아가 신고를 하여,
땅굴을 담당하는 모 상사와 함께 3일간이나 탐사를 한후 그 결과를 알려주었습니다.
얼마후 육군 땅굴탐지과 심원흠 부이사관으로 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심 부이사관은 철책선이 처있는 휴전선 근처에 저를 데리고 가서는 땅굴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몇시간동안 다우징 탐사를 해서 땅굴 평면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현재 민간인 탐사자들과 함께 땅굴문제로 분투하시는 정명환 장군님이
찾으셨던 철원땅굴 현장이였습니다.
심 부이사관은 그 후 몇차례에 걸처 김포, 연천, 동두천 등지에 저를 데리고 가서
탐사를 시켰습니다. 그곳도 역시 땅굴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본격적으로 탐사를 벌린,
그곳들은 민간인 탐사자들이 땅굴신고를 했던 곳이였습니다.
그 당시 심 부이사관은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정지용씨등 민간탐사자들이 신고한곳은
모두 시추작업과 절개작업으로 확실하게 조사를 했다"면서 사기꾼들 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몇년이 지난후 제가 정지용씨등 민간 탐사자들과 함께 땅굴탐사를 해오면서 비로소,
심 부이사관의 말은 거짖과 모략이란 사실을 깨닫게되었습니다.
제가 "다우징탐사로 땅굴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심원흠 부이사관은
제 친척이 군에 입대했을때, 자발적으로 편의를 제공하는등 호의를 표시했는가 하면,
연천 임진강변에서 절개개작업시에는 은밀히 찾아와 " 확실한 땅굴 증거가 나오면
보안유지하고 나에게 연락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위와같이 심원흠 부이사관은 분명히, 다우징 탐사로 땅굴을 찾아낼 수 있을 뿐만아니라,
민간탐사자들이 신고했던 곳들도 모두 땅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조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부이사관으로써 고위급이고, 탐사과 창설시 부터 현재까지
25년이상을 한자리에서 근무한자로써 국방부 탐지업무를 좌지우지하는 최고 핵심멤버입니다.
저와같이 땅굴탐사를 해오고 있는 정지용씨등은 심원흠씨의 행동을 주시해 본 결과,
북한에서 심어 놓은 공작원이 아닌가? 심히 의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후 저는 답답하여 문경에 있는 탄광에 찾아가서 갱도를 다우징으로 탐사하여
탄광 갱도 평면도
를 그려서, 사무실에 찾아가 확인해 본 결과 일치 했다는 사실을, 예를 들며,
청와대에 탄원서를 냈습니다.
얼마후 국방부장관 명의로 해당부서에 지시했다는 통지문은 왔으나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몇년전 신행주대교가 붕괴되었을때,
건설회사에서 제 다우징 탐사 기술을 테스트 한 적도 있습니다.
신행주대교 건설업체인 벽산건설의 요청으로 현장에 갔습니다..
벽산건설 조 전무는 한강 백사장에 관을 묻어 놓고는 저 몰래 탐사테스트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고 현장 탐사에 참여했던 다우징 탐사기술자 3명에게 탐사를 시켜 보았는데,
2명은 땅에 묻어놓은 관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저는 찾아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한 독지가가 찾아와
"다우징탐사 기술로 지하공간을 찾아내면 자금을 대 보겠다" 며 제의해 왔습니다.
그분의 안내로 충북 음성에 있는 금 광산에 찾아가 탐사테스트를 했습니다.
저는 몇시간 동안 산위에 올라가 탐사를 한후 광산의 갱도 평면도를 그렸습니다.
일행이 평면도를 가지고 광산책임자에게 보여주며" 우린 땅굴을 찾는 사람들인데
다우징 탐사 방법으로 광산갱도를 그려왔습니다.실제갱도와 같은지, 확인해 달라" 고
부탁했습니다.
광산책임자는 "일치한다" 면서 저의 일행을 데리고 갱도안으로 들어가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갱도안으로 들어가 본바,평면도에 표시한대로, 광산 입구에서
첫번째 지선은 우측으로, 두번째 지선은 좌즉으로 갈라저 있었습니다.
우리들 눈으로 직접, 다우징 탐사로 땅굴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입니다.
국방부는 지금도 "다우징탐사는 비과학적으로 땅굴을 찾지못한다.
민간인 탐사자들은 우물을 파는 업자로써 사기꾼에 불과하다."며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하여 민간인 탐사자들은 국방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땅굴을 빙자하여
이익을 챙긴 사례는 없습니다.
오히려 민간인 탐사자들은 수원부근 화성에서도 몇개월간이나 객지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자금을 마련해서 시추작업을 벌리고 청음활동을 함으로서
땅굴증거까지 잡아 당국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도 국방부 관계자들은 시추 확인 작업은 커녕 2시간동안 현장만 둘러 본 후,
땅굴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물을 파다가 땅굴징후가 발견된곳을 시점으로 다우징 탐사로 추적해 본 후
경악해했습니다.
수원공군비행장, 해병대사령부, 51사단사령부 영내로
땅굴이 침투한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작년6월에는 화성군 비봉면 주민이 자신의 집 지하에서 나는 작업소리에 시달리다가,
급기야는 인근 땅이 주저않은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젠, 땅굴의 증거가 눈으로도 확인되었습니다.
북한의 남침땅굴은, 땅굴을 찾는 국방부 탐지과 요원들의 비호하에,
문제 제기되었던 김포, 연천 동두천, 하남시를 지나 후방 깊숙히 처내려왔습니다.
수원 이북지역은 현재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간 셈이 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