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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 백암(柏巖) 김공(金公) 행장
공의 휘(諱)는 륵(玏)이고, 자는 희옥(希玉)이며, 자호(自號)는 백암(柏巖)이다. 그 선조는 예안인(禮安人)인데, 중세(中世)에 영천(榮川)으로 옮겼다. 4세조 휘 담(淡)이 문학(文學)으로 세종조(世宗朝)와 문종조(文宗朝)에 현달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에 발탁되었고, 세조(世祖) 때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가 뒤이어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고 졸(卒)하니, 시호가 문절공(文節公)이다. 그 전에 승지공(承旨公)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자가 바로 판서공이고, 다음이 사명(士明)인데 성균관 생원으로 창원 황씨(昌原黃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이 공을 낳았다. 판서공이 자식이 없어 데려다 후사를 삼았는데, 뒤에 특은(特恩)으로 생원공과 황씨가 모두 이조 판서와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은 어려서 영특하고 장중(莊重)하여 보통 아이와 같지 않았고, 천성이 선량하였다. 10세 때 부친상(父親喪)을 당했는데 상례를 치르면서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숙부 사호(士皥)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매번 볼 때마다 감탄하기를,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 하였고, 선조의 묘갈(墓碣)을 세우면서는 비에 글씨를 새기지 않고 말하기를, “장차 뒷날을 기다린다.” 하였다. 조금 장성하여 소고(嘯皐) 박공 승임(朴公承任)과 금계(錦溪) 황공 준량(黃公俊良)에게 배웠는데, 이미 내외(內外), 경중(輕重)을 구분할 줄을 알았다. 그리고 또 퇴도(退陶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뜻을 독실히 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였다. 모친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중하게 여긴 바는 여기에 있지 않았다.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19)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고, 만력 병자년(1576, 선조9)에 비로소 벼슬을 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승정원 가주서에 보임되었다. 일찍이 일본 사신을 호송하였고, 무인년(1578)에 조정에 들어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대교(待敎)와 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 전적에 올랐고,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일에 연루되어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겨울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경진년(1580)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면(辭免)되었고, 다시 전적이 되어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하였다. 신사년(1581)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사간원 정원으로 옮겨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또 병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으로 옮겼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찬에 올랐다. 또 전적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성균관 직강으로 옮겼다가 이어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4, 5년 사이에 관직을 옮기고 승배(陞拜)된 것이 전후로 거듭되었으나 겸대(兼帶)는 그대로였고, 대각(臺閣)에 있을 때 직언(直言)과 정론(正論)을 하며 전혀 주저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임오년(1582)에 옥당(玉堂)에 있을 때 상소하여 임금 행실의 잘못된 점과 시정(時政)의 잘못을 논하면서 매우 직설적으로 말하자 상(上)이 불쾌하게 여겨 패초(牌招)하여 꾸짖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공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바르게 대답하자 임금이 더욱 노하였는데, 마침 근신(近臣)이 공을 위하여 변론하였기 때문에 상의 마음이 풀려 술을 하사하고 위로하고서 파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 여름에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걸군(乞郡)하여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다. 그 전에 영월군에 수재(守宰)가 부임하자마자 번번이 죽는 괴상한 일이 자주 있자, 사람들이 영월군을 사지(死地)라고 여겼다. 공이 부임하자마자 맨 먼저 노산군(魯山君)의 능을 찾아가서 치제(致祭)하려고 하니, 군 사람들이 놀라 번갈아 찾아와서 간하였다. 그러나 공은 듣지 않고 달려가 배알하고 재방(齋房)을 설치하였고, 제사 때에는 반드시 직접 하였다. 또 노산군을 거두어 묻은 자의 자손을 찾아 무덤을 지키게 하고 복호(復戶)해 주니, 이때부터 읍재(邑宰)가 다시는 죽지 않았다.
군이 험한 고개 사이에 있어서 사람은 적고 부역은 많아 거의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공이 상소하여 그 폐단을 진달하니, 조정에서 그 소장에서 청한 대로 부역을 혁파하도록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해 주었다. 군수가 된 지 3년 만에 군이 크게 다스려져 보리가 하나의 밑둥에 두 개의 이삭이 생기는 상서(祥瑞)가 있었다. 상이 옷 한 벌을 하사하고 교서를 내려 표창하기를,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직분을 다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홍문관 교리로 부름을 받으니, 백성들이 다투어 말머리를 막고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서울에 이르자 상이 인견(引見)하여 노고를 치하하였고, 노산군의 능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한참 동안 한탄하였고 술을 하사하여 취하도록 마시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이다.
경인년(1590)에 사헌부 집의에 올랐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옮겼으며, 이어 의정부 검상에 제수되고, 의정부 사인으로 옮겼다. 성균관 사성을 거쳐 장악원 정(掌樂院正)과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겼다. 이때 상이 공을 총애하는 것이 특별히 깊어 일찍이 하교하기를, “옥당은 논사(論思)하는 자리이므로 아무나 요행으로 올라가게 해서는 안 되니, 김모(金某) 같은 사람을 자리가 비는 대로 충원해야 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집의를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다. 신묘년(1591)에 또 집의에서 동부승지에 올라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상의 비위를 거슬러 호군(護軍)으로 좌천되었다. 곧이어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산질(散秩)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여름에 왜란이 일어나 한 달 사이에 팔도가 모조리 무너졌다. 이때 공이 안집사(安集使)의 명을 받고 본도에 내려왔다. 영남이 맨 먼저 적병에게 침략당하여 낙동강 동쪽 수십 주(州)가 함락되어 적의 소굴이 되니, 조정의 명이 닿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고 수재(守宰)는 달아나고 백성은 뿔뿔이 흩어져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공이 이르러서 글을 지어 도내에 포고하여 충의(忠義)로 격려하고 인륜(人倫)으로 일깨우고, 포고문의 끝에 다시 역순(逆順)과 화복(禍福)으로 반복해서 고하였는데, 가리키는 뜻이 간곡하고 말투가 강개(慷慨)하였다. 이에 사민(士民)들이 감격하고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하여 서로들 권면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공은, 이렇게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행조(行朝)와 거리가 멀어서 왕복하기가 어려운데 만약 상법(常法)만을 고집하고 때에 따라 편의대로 제치(制置)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놓쳐서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죄를 초래하게 될 것이니 안집사의 명을 받은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출척(黜陟)하고 무마(撫摩)하는 정사를 행하기도 하고, 붙잡아 참수하고 감독하고 살피는 직임을 행하기도 하며, 위로하고 순행(巡行)하며 애써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폈다. 크고 작은 기무(機務)를 그때그때 결재하고 수재가 없는 곳은 권의(權宜)로 수재를 두었으며, 재능을 헤아려 직임을 주어서 토정(土丁)을 모아 경내(境內)를 보호하고 왜적을 토벌하게 하여 왜적이 근거를 더 뻗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공이 왜적을 차단한 힘이 없었더라면 죽령(竹嶺) 이북의 제천(堤川)과 원주(原州) 지역은 모두 왜적의 교통로가 되어 경기 부근의 왜적이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왜병과 연접하여 야금야금 국토를 잠식하는 근심과 눈앞에 닥치는 재앙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병마사(兵馬使) 박진(朴晉)이 영남(嶺南)의 동로(東路)에 있으면서 자주 의병을 저지하였는데, 이는 의병의 공로가 자기보다 높을까 봐 염려해서였다. 공은 그와 겨루지 않고 참수하고 노획한 것을 모두 그에게 넘겨주어 그에게 공장(功狀)을 올리게 하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공이 능히 사양한 데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가을에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임소에 가기 전에 앞의 명을 다시 내려 진휼(賑恤)과 양료(糧料) 등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란을 당한 뒤끝인 데다 기근까지 들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 세금을 거둘 길이 전혀 없었다. 공이 국가의 비상한 변고를 통탄하고 눈물을 뿌리며 명을 받고서 개연히 그 직임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경영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었고, 급한 대로 구제하여 일을 망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전후로 서계(書啓)를 수십 번 올렸는데, 모두 근심하고 간절한 뜻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때로는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여 유민(遺民)을 위무(慰撫)하고 장정을 소집함으로써 백성을 안주시키고 군대를 뽑아 점고할 계책을 삼으니, 영남의 여러 주(州)가 이에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사년(1593)에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라 경상 우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교서의 대략에, “흩어진 백성을 불러모으고 의로운 무리를 떨쳐 일으켜 여러 주(州)로 하여금 백성들이 안도하고 왜적이 엿볼 수 없게 한 것은 경의 힘이었다.” 하였다. 이때 명(明)나라 군대가 본도에 머물러 진을 치고 있었는데, 양료사(糧料使) 이성중(李誠中)이 병으로 죽었다. 공이 한 개인의 몸으로 기무가 매우 많은 때에 그 일을 맡아서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이리저리 책응(策應)하였는데, 군량을 대고 기민(飢民)을 진휼하기를 모두 시기적절하게 하니 온 도가 그에 의지하여 그를 중하게 여겼다. 겨울에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제수되었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사간원 대사간으로 바뀌고, 또 한성부 우윤으로 바뀌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이어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라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간이 정철(鄭澈)이 최영경(崔永慶)을 잘못 죽인 일을 추론(追論)하였는데, 한두 동료가 정철을 두둔하자 대간들이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상이 특별히 공을 부제학에 제수하여 처리하게 하니, 가부를 결정하면서 말과 의리가 엄정하였다. 식자(識者)들이 듣고 모두 감탄하기를, “옛 현인에게 처리하게 하였더라도 이보다 더 낫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을미년(1595)에 부제학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어 차자(箚子)를 올려 16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성학(聖學)에 힘쓰는 일, 세자를 가르치는 일, 대신을 중시하는 일, 체찰사(體察使)를 파견하는 일, 장수를 가르치는 일, 수령을 가려서 선발하는 일, 군량미를 저축하는 일, 군병을 훈련시키는 일, 언로(言路)를 여는 일, 현명한 인재를 구하는 일, 민심을 기쁘게 하는 일, 형정(刑政)을 가다듬는 일, 상기(喪紀)를 삼가는 일, 지세(地勢)를 살피는 일, 마정(馬政)을 정비하는 일, 화의(和議)를 끊는 일이었다. 말이 매우 적절하였고, 뜻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회복(恢復)의 공을 거두는 말에 대해서는 더욱 반복하여 뜻을 기울였다. 상이 매우 칭찬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국가를 위해 도모하는 계책이 모두 지극하다.” 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나갔다가 병신년(1590) 1월에 장 부인(張夫人)의 상을 당하여 벼슬을 떠났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일본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공이 거상(居喪)하느라 집에 있다가 국가의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을 생각하고는 의를 부르짖으며 고을의 자제를 모집하고 사재를 내어 병기를 만들고 군량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는 데 제공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지어 열읍(列邑)의 충의지사(忠義之士)에게 보내 원수를 무찌르기 위해 함께 일어나자는 의리로 깨우쳤다. 이윽고 공에게 기복(起復)하라는 교지가 내려져 다시 안집사로 삼으니, 공이 생각하기를 ‘왜적이 만약 크게 유린하여 그 책임을 맡을 사람이 없다면 어찌 감히 복중(服中)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왜적의 형세가 조금 느슨하고 여러 수신(帥臣)들이 대처하는 것이 지난번과는 다르니, 장수를 많이 두는 것은 어지럽게 할 뿐이고 일에 득될 것이 없는데 어찌 예법을 무너뜨리고 권도(權道)를 따라서 선왕(先王)이 만들어 놓은 예법의 죄인이 되겠는가.’ 하고 상소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소장이 재차 올라가자 상이 이에 허락하였다. 상(喪)을 마치자 대사성으로 불렀는데 올라가는 도중에 대사간으로 바뀌었고, 얼마 있지 않아 부제학으로 옮겼는데, 이때가 만력(萬曆) 26년 무술년(1598)이었다.
명나라의 찬획(贊畫) 정응태(丁應泰)가 동정(東征)했던 제장(諸將)들을 무고하면서 아울러 우리나라가 왜적을 유도하여 반란하였다고 무고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사리에 어긋나고 망녕되었다. 선조대왕이 정응태의 참소가 먹혀들면 해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피(引避)하고 내전(內殿)에 들어가 시사(視事)하지 않았다.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간쟁하기를, “전하의 자리는 천자에게서 받았고 선군에게서 전해 받은 것으로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한데, 지금 어찌 한 사람이 참소하여 입을 놀렸다고 해서 선뜻 인피하고 수백 년을 내려온 종사를 위해 도모하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 변고가 생긴 뒤로 상이 경연에 나와 신료를 접견하지 않았고,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의식도 소략한 것이 많았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논하였는데, 모두 임금을 바로잡는 훌륭한 계책과 국가를 경영하는 큰 계책들이었다. 이때 서애(西厓)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수상(首相)으로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문충공을 싫어하는 자들이 밤낮으로 배격하여 쫓아낼 모의를 하고 있었다. 정응태가 우리나라를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국가에서 진주(陳奏)하여 변리(辨理)할 것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소인배들이 문충공이 국가의 대신이면서 스스로 가겠다고 청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것을 트집잡아 배격하려고 번갈아 말을 하고 선동하였으며, 상도 문충공에게 바람이 없지 않았다. 공이 개연히 간쟁하여 문충공이 죄가 없음을 밝혔으나 간사한 무리가 상을 속이고 가려서 파직되었다.
기해년(1599, 선조32) 봄에 천장접대사(天將接待使)가 되었다가 이어 병으로 면직되었고, 뒤에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법을 지켜 치우치지 않으니 온 도(道)가 숙연하였다. 경자년(1600)에 조정에 돌아와 형조 참판이 되었고, 신축년(1601)에 호조 참판으로 바뀌었다. 임인년(1602) 겨울에 하절사(賀節使)로서 명나라에 갔는데, 병부(兵部)가 우리나라가 또 군대를 청한 것에 대해 군대를 수고롭혀 다시 동원하기 어려움을 말하고 사신에게 조목조목 대답하게 하였다. 공이 하나하나 답하며 곡진히 사정을 말하는데 참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어 마침내 황제가 일본에 대해 약속하는 칙지(勅旨)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 계묘년(1603)에 복명(復命)하고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외직으로 나가 안동 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을사년에 홍수가 났는데, 고을이 낙동강 가에 위치하고 있고 또 청송(靑松)과 진보(眞寶)에서 흘러나온 물이 합류하여 치닫고 넘쳐나서 무너진 가옥과 물에 떠내려간 사람과 가축이 이루 셀 수 없었다. 공이 노심초사하여 진휼하고 구제하는 정사를 행하면서 말하기를, “본주(本州)는 조령의 상류(上流)에 위치하여 동남(東南) 지방의 도회(都會)가 되어 국가가 위급할 때 의지하는 바가 다른 열군(列郡)과 비교할 수 없으니, 비록 온 도의 힘을 다하여 물을 막고 다스리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하고, 관찰사에게 상신(上申)하여 주변 고을의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송항포구(松項浦口)에 두 개의 큰 제방을 쌓아서 치닫고 터지는 물의 세력을 줄여 고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덕을 보고 있다. 고을 동쪽에 옛날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이 있어서 퇴도(退陶) 선생을 제향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한 수해를 당하였다. 공이 여러 고을의 부로(父老)들과 도모하여 옛터에서 100여 보(步) 떨어진 한적하고 트인 곳에 새로 짓고서 그 기물을 넉넉하게 하고 노비를 더 붙였는데, 들어간 비용은 모두 공의 녹봉에서 내었으니, 비록 무너지고 어지러운 때에도 현자를 높이고 학문을 일으키는 데 급급했던 뜻이 이와 같았다.
병오년(1606)에 체차(遞差)되어 돌아갔고, 무신년(1608) 3월에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光海)가 새로 즉위하여 불러서 대사성에 제수하였는데, 가을에 병을 핑계로 돌아왔다. 경술년(1610)에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제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대사성이 되어서 동료들을 이끌고 기축년(1589, 선조22)에 억울하게 죽은 이발(李潑), 이길(李洁), 백유양(白惟讓), 정개청(鄭介淸)을 신원(伸冤)해 주기를 청하였고, 또 본조의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면서 누차 소장을 올려 일이 시행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광해가 자기의 생모(生母)를 추존(追尊)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삼고, 별묘(別廟)를 세워 제사 지내고 그 이름을 봉자전(奉慈殿)이라고 하였다. 공이 헌장(憲長)이 되었을 때 마침 제사를 마치고 나서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는 등의 일이 있자, 공이 아뢰기를, “추숭(追崇)하는 전례를 지금 이미 거행하였으니, 당초에 바로잡지 못한 책임은 참으로 돌아갈 곳이 있거니와, 품절(品節)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등급에 따른 차등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종묘의 효경전(孝敬殿)과 똑같이 하였으니, 어찌 별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즉시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시켰는데, 승지와 대간들이 번갈아 소장을 올려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신해년(1611)에 파면되어 돌아왔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역옥(逆獄)이 일어났는데 죄수 집안의 글에, ‘남중(南中)의 영수(領袖)가 추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일이 공에게까지 미쳐 의금부에 붙잡혀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불안해하였으나 공은 태연히 흔들리지 않았고, 국정(鞫庭)에서 답변하게 되자, 공이 말하기를, “추숭하는 예는 신이 하향했을 때의 일이라 알지 못하였고, 품절은 마땅히 헤아려서 줄여야 한다는 뜻은 신이 사실 말했습니다.” 하니, 광해가 심히 노하여 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 상공(李相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이 상공(李相公),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심 상공(沈相公)이 반복해서 광해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일이 거기에서 그쳐 삭직(削職)만 당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뒤에 또 백사 이 상공이 말을 하여 직명(職名)을 도로 주었다.
병진년(1616, 광해군8) 11월 16일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니, 춘추가 77세였다. 부음이 이르자 원근에서 달려와 조문하는 사람들이 마치 자기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였고, 장사 지낼 때에는 모인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경신년(1620)에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공의 선조 문절공(文節公) 및 소고(嘯皐) 박공(朴公)과 함께 제향하였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은 바로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한 이듬해이다. 공을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라 하여 조문하여 제사하고 성찬을 들지 않았으며,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 사제(賜祭)하기를 의주(儀註)대로 하였다. 효종 4년(1653)에 선무(宣武)의 공(功)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을 추증하였다.
공은 인동 장씨(仁同張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순희(順禧)의 따님이요, 연복군(延福君) 증 이조 판서 안양공(安襄公) 말손(末孫)의 현손이다. 공보다 30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46세였다. 돌아가신 해 모월 모일에 군의 북쪽 빈동(賓洞)에 있는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기선(幾善)은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을 지냈고, 차남 지선(止善)은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장녀는 군자감 정(軍資監正) 권래(權來)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사인(士人) 이백명(李伯明)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통선랑(通善郞) 이유도(李有道)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생원 김시정(金是楨)에게 시집갔다. 그 나머지 아들 둘이 있는데 잠선(潛善)과 종선(從善)이고, 딸이 넷 있는데 이덕량(李德良), 이우익(李友益), 이영환(李榮煥), 황중준(黃仲俊)에게 시집갔다. 찰방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견(鋻)이고 생원을 지냈다. 도사가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윤(鋆), 형(鎣), 수(鐆), 란(鑾), 옥(鋈)이고, 딸은 생원 김진(金溍), 사인 금호겸(琴好謙)ㆍ정이무(鄭而武)에게 시집갔다. 잠선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이 석(錫), 후(鍭)이다. 종선이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박(鑮)은 진사를 지냈고, 유(鍒), 연(鋋), 근(釿), 릉(錂)이다. 생원이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종준(宗準)이고, 둘째는 종연(宗衍)이며, 딸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의 아내가 되었다. 사위는 신기(申璣), 이장춘(李長春), 권유(權濡)이다. 윤이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원(宗源), 종보(宗溥)이고, 딸은 사인 정요봉(鄭堯封), 변수(邊洙)에게 시집갔다. 형(鎣)이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락(宗洛)이고, 딸은 사인 이장발(李長發), 권국추(權國樞), 이중무(李重茂)에게 시집갔다. 수(鐆)가 3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택(宗澤), 종문(宗汶), 종제(宗濟)이고, 딸은 생원 박시춘(朴施春), 사인 송세윤(宋世胤), 이학로(李鶴老), 박시천(朴施天), 이응망(李應望)에게 시집갔다. 란(鑾)이 5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태(宗泰), 종학(宗澩), 종벽(宗㵨), 종록(宗祿), 종정(宗汬)이고, 딸은 사인 민중경(閔重慶), 김담령(金聃齡), 권인석(權仁錫), 손동복(孫東復)에게 시집갔다. 옥(鋈)이 6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서하(瑞河), 윤하(潤河), 성하(聖河), 득하(得河), 석하(碩河), 경하(景河)이고, 딸은 사인 정빈(鄭鑌), 정곤(鄭錕), 조퇴(趙頧), 김한국(金翰國)에게 시집갔다. 종준은 자식이 없어서 아우 종연의 아들 정하(鼎夏)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하면 모두 500여 명이다.
공은 인품이 고요하고 돈후하였으며 남의 허물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집에 있을 때에는 지극히 효성스럽고 자애로웠으며, 양모(養母) 장씨 부인을 섬기는 데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다. 고산 찰방을 사직하는 상소와 걸군소(乞郡疏)에서 효자의 심사를 모두 말하니, 사람들이 이영백(李令伯 이밀(李密))의 표문(表文)과 진무열(陳茂列)의 상소와 대등하게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평소에 화평하여 기쁘거나 노한 기색이 없었고, 기운은 어질고 말은 온화하며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으나 일단 일을 만나면 과단하고 강단이 있어 의연히 범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호서를 안찰(按察)할 때 전 우후(虞候) 박진원(朴震元)이라는 자가 남의 계집종을 빼앗아 첩으로 삼고 그 주인을 구타한 일이 있었다. 공이 법으로 처벌하려고 하자 한 고을의 수령이 박진원을 위해 편지를 보내기를 “박진원의 첩은 동궁(東宮)과 매우 가까운 친척이 되는데 지금 어찌하여 박진원을 괴롭히고 욕을 보입니까.” 하였는데, 공이 답하지 않았다. 임해군(臨海君)이 또 편지를 보내 풀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고 마침내 처벌하였다. 임해군이 또 남의 염전의 이익을 빼앗으려고 하여 궁노(宮奴)가 왕자의 편지를 가지고 오자 공이 말하기를, “왕자가 평소에 나를 알지 못하는데 지금 편지를 보낸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거절하고 받지 않았고, 종이 거만한 말을 하자 장(杖)을 쳐서 쫓아 버렸다. 안동에 있을 때 임해궁(臨海宮)의 종이 기세를 부리고 교만하였으나 관찰사 이하 아무도 금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부(府)의 치소(治所)에 이르러 말을 타고 곧바로 달려 들어와 당(堂)에 올라와 배알하자 공이 끌어내리게 하였으나, 종이 들으려 하지 않자 호통을 쳐서 당 아래로 끌어내려 쳐 죽였다. 이에 사납고 버릇없는 자들이 숨을 죽이고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다. 안집사가 되었을 때 한번은 밤중에 군사들이 놀라는 일이 있었는데, 공이 편안히 앉아 움직이지 않자 조금 뒤에 안정되었다. 위세 앞에서나 창졸간에도 그 지키는 바를 변치 않음이 또 이와 같았다.
광해가 생모를 추숭한 것은 실로 뒷날 동조(東朝)를 유폐(幽閉)시킬 조짐이었다. 공이 그 의문(儀文)과 품절(品節)에 대해 힘써 간쟁한 것은 미연에 조짐을 막으려는 뜻이었으나 끝내 이 일로 좌죄(坐罪)되어 쫓겨났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모후(母后)가 유폐되고 인륜이 무너져 사직(社稷)이 거의 망하게 되자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그 다스림은 평이하고 간략하며 부지런하고 섬세하여 자잘한 것도 빠뜨리지 않았고, 사명(使命)이 경내에 들어오면 그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관복을 입고 기다리면서 예를 매우 공손히 하였다. 문 안에 잡객을 들이지 않아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고, 평소에 신중하여 사적인 일로 공무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 비록 벗이 읍재(邑宰)가 되더라도 문안오지 않으면 먼저 찾아간 적이 없었다. 읍의 수령이 일찍이 일로 인하여 공을 범하고 업신여긴 적이 있었는데, 공이 이조에 들어가 청반(淸班)에 오르자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고 감복하였다.
병란 이후로 공경(公卿)의 녹봉이 적어 자식을 위하여 관직을 구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공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부인이 일찍이 이에 대해 말을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제가 무능하면서도 분에 넘치는 영화를 누리고 있는데 또 아이들을 위해 은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 매우 검약하여 출입하고 왕래할 때 의복이나 말이나 노복이 가난한 선비와 다름이 없어 길에서 만나더라도 그가 재상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풀뿌리를 캐먹더라도 온갖 일을 할 수 있다.’ 했으니, 너희들은 항상 이 뜻을 잊지 말라.” 하였다.
광해 초부터 세도(世道)가 날로 그릇되는 것을 보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때로 산수 간에서 배회하며 투호(投壺)하고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여 담박하기가 마치 세상에 뜻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나라를 잊지 않아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천장을 쳐다보고 한숨쉬기도 하고, 풍악이 울리는 잔치의 술자리에서도 나랏일이 전도되었다는 말이 나오면 근심하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
40년간 벼슬살이를 하면서 나아가고 물러나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하고 좌천되기도 하여 근심과 즐거움이 같지 않았으나 충성스럽고 미덥고 곧고 결백하기는 시종 한결같았다. 이는 대개 그 자품(資稟)이 이미 두터운 데다 또 일찍이 도(道)가 있는 이를 가까이하여 군자가 입신(立身)하고 행신(行身)하는 도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과 인륜,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리에 대해 이처럼 독실하였고, 사업에 발휘된 것이 또 모두 우뚝이 높아 우러러볼 정도였다. 문집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처음에 공의 자제들이 군(郡)의 동쪽 문단리(文丹里) 뒤에 있는 산록(山麓) 모향(某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는데, 빈동(賓洞)에 있는 부인 장씨의 묘와 10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금상(今上) 신유년(1681, 숙종7)에 공의 증손 종연 등이 복인(卜人)의 말에 따라 안동부 재산현(才山縣)에 있는 불로곡(不老谷) 모향의 언덕에 이장하고 부인 장씨를 합장(合葬)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71년 되었는데 종연이 그 아들 정원을 보내 현일에게 이르기를, “제 증조부의 덕행과 공렬은 글로 남길 만한데 저희 집안이 불행하여 조부와 부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시어 대인(大人) 선생께 행장과 묘지명(墓誌銘)을 써 달라고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는데, 세대가 더욱 지날수록 아는 자가 더욱 적을 것이니, 마침내 민멸되어 후손을 일깨우고 후세에 알릴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지금 집에 보관하고 있던 행실기(行實記) 한 통을 보내 그대에게 청하니, 부디 불쌍히 여겨 행장을 써 주시어 뒷날 묘갈명(墓碣銘)을 청하고 묘지명을 구할 바탕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현일이 일어나 말하기를, “선정(先正)의 훌륭한 덕업은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있고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말학(末學)인 소생이 서술하여 일컬은 뒤에야 드러나겠습니까. 더구나 현일은 궁벽한 시골의 후생으로 학식이 얕고 글솜씨가 없는데 어떻게 대군자의 도덕과 공렬을 표현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사양합니다.” 하였다.
김군이 갔다가 다시 와서 거듭거듭 청하기에 현일이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가첩(家牒)에 의거하여 향리(鄕里)와 세계(世系)와 역관(歷官)과 행사(行事)의 대강을 서술하여 평소에 흠모한 마음을 담았다. 그러나 덕행을 잘 표현할 만한 재주가 없어 공이 가슴속에 품고 있던 깊은 뜻을 미루어 친절하고 음미할 수 있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점이 부끄럽고 두렵다. 당세(當世)에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채택하여 필삭(筆削)을 가해 주기 바란다.
금상 12년 병인(1686) 동지 후 1일에 이현일은 삼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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