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식물 메밀
▶메밀꽃과 흰 옥양목 저고리
세상도 바뀌고 풍속도 달라지고 자식 키우는 것도 많이 변했다. 내 어릴 적 엄마나 누나에게 잘못해 밉상스러운 짓을 하게 되면 그 벌로 마른 누룽지를 얻어먹지 못했다.
밥을 지어 퍼고 난 다음 가마솥의 누룽지를 별도로 긁어모아 자식들에게 별미로 나누어주던 집은 그래도 조금 양식이 넉넉한 집안이었고 대부분 빈한한 가정에서는 밥누룽지솥에 물을 붓고 숭늉을 만들어 양식을 늘였던 시절이었으니 누룽지를 못 얻어먹는 것은 큰 벌이 되었다. 요즘 아이들 입이 그 맛을 알 리 없겠지만 쌀밥 누룽지 맛이야 말할 것 없고 그 먹기 싫었던 보리밥도 누룽지만은 아주 고소한 맛이 있었다. 정말 기막히게 맛있는 누룽지는 메밀묵 누룽지다. 더불어 묵누룽지 만큼이나 맛있는 것으로 뜨거운 묵이 식을 때 생기는 꼬득꼬들한 묵껍질이 있다. 묵껍질로 만든 묵채국은 아버지께만 드린다.
옛 미풍양속의 하나로 동리마다 상조계가 있어 혼사가 있거나 상喪을 당하면 묵 한 함지 또는 단술 한 동이 혹은 콩나물 한 시루를 길러 보내기도 했다. 특히 묵 부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메밀을 깨끗이 씻어 빻아 물에 불리고 손으로 부비면서 흰 전분을 가라앉히기를 거듭하여 다시 고운 채로 메밀껍질 거르기를 여러 차례 해야한다. 그래야 묵이 부드러우면서 검지 않고 희고 곱다. 그리고 묵을 끓일 때는 불 조절을 하여 불을 때면서도 쉬지 않고 계속 나무주걱으로 저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묵이 타고 묵에 불 냄새가 나면 못쓰게 된다. 더욱이 남의 집에 보낼 묵이면 정성을 다해야 했다.
내 나이 대여섯살쯤 되었을까. 어머니께서 이웃동리 잔치집에 보낼 메밀묵을 끓이셨다. 이른 아침부터 디딜방아에 메밀 빻기를 시작하여 한낮이 넘어서야 끓던 묵을 넓은 함지에 퍼담아 삼베천으로 덮어두고 막걸리 한 동이를 걸러 일꾼들 참을 이고 들로 나가셨다.
집을 보던 나는 해가 저물어 갈 그사이 식어 굳어진 묵 한 함지 껍질을 홀랑 다 벗겨 먹은 것이다. 석양 무렵에 소를 몰고 들에서 먼저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는 기절을 하신 것이다. 껍질이 벗겨져 누더기가 되어 버린 묵을 어떻게 잔치집에 보낼 수 있으랴.
종아리를 맞는 벌을 받았는데 회초리가 아닌 수수홰기로 만든 빗자루대로 맞았으니 벌겋게 자국만 날뿐 그리 아플 리가 없어 우는 시늉만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대청마루에 앉아 속이 상해 혼자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면서 그때서야 나도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 일생 어머니께 매맞아 본 기억도, 어머니 앞에서 진정 반성의 눈물을 흘려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는가 싶다. 어머니는 밤새워 다시 묵을 끓이셨다. 호롱불 하나 밝혀두시고. 불효였지. 그렇지만 어머니께서 일찍 저 세상으로 떠나셨으니 불효도 13년밖에 하지 못했다.
먼 훗날 누나가 들려준 얘기지만 어머니께서 내 종아리가 부어 오른 것을 보시고 더 속상해 눈물이 나신 것이라 했다.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못난 자식이 그렇게도 소중하셨던가요. 메밀꽃만 보아도 흰 옥양목 저고리 어머니가 보고 싶다.
▶사라질 위기의 속성 작물
메밀은 모밀, 메물이라 부르기도 하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속성작물이다. 키 높이 60~90㎝로 자라는데 줄기는 둥글고 조금 붉은 빛을 띠며 속은 비어있고 많은 가지를 친다. 잎은 어긋나고 삼각 심장형이며 원줄기 아래쪽 잎은 잎자루가 있으나 꽃대가 자라는 윗 부분은 잎자루가 없고 줄기를 감싼다. 꽃은 줄기가지 끝에 여남은 송이가 둥글게 뭉쳐서 여름과 가을사이에 흰빛 또는 담홍색 꽃이 무한 꽃차례로 무리 지어 피어나는데 꽃잎 5장, 암술 1개, 수술 8개로 구성되었다. 메밀꽃은 특이하게 같은 품종이라도 수술이 길면 암술이 짧고, 암술이 길면 수술이 짧은 꽃이 반반씩 생겨나는데 이러한 단주화短柱花와 장주화長柱花로 구별되는 것을 이형예異型蘂 현상이라 한다. 그래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긴 수술을 지닌 꽃과 긴 암술을 지닌 꽃 그리고 짧은 수술을 지닌 꽃과 짧은 암술을 지닌 꽃이 반드시 필요하고 서로 다른 꽃 사이에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꽃 지고 세모난 열매가 익으면 껍질 안에 하얀 녹말이 들어있다.
메밀의 원산지는 야생종이 발견되고 있는 바이칼호 일대와 만주․아무르강 유역에 걸친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1세기 전후 한나라 때 분묘에서 메밀씨앗이 발견되었고 이 땅에서 재배역사도 천년은 넘었으리라 본다. 메밀이 문헌의 기록으로는 「향약구급방」에 처음 나온다. 메밀 품종에는 달단종․유시종․숙근종, 수확시기에 따라 여름 메밀과 가을 메밀로 나누기도 하며 각 지방마다 많은 재래종이 있다. 메밀은 생육 수확기간이 아주 짧아서 가뭄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파종시기를 놓친 농작물의 대작代作으로 응급작 구실을 하면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영양가도 높으면서 독특한 맛이 있어 구황救荒 식물로 많이 재배되어 왔다. 메밀의 어린순은 나물로도 많이 이용되는데 쓴맛이 전혀 없으므로 가볍게 데쳐 바로 무침나물로 먹을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 강원도 땅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깨알깨알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밤길 80리를 나귀등에 장짐을 싣고 장터를 옮겨가며 여름 낮과 밤사이 펼쳐지는 한 늙은 홀아비 장돌뱅이의 과거 회상이야기.
인생사 젊은 시절 어쩌다 물방앗간에서 단 한번 맺은 정분. 질긴 인연들.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리는 밤 달빛 아래 핀 메밀꽃에 묻어나는 그들의 애환과 낭만, 신비한 자연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1936년 발표된 이효석의 대표작.
▶혈압강하제 「루틴」을 추출한다
메밀의 한방 이름은 교맥蕎麥, 양맥養麥, 오맥烏麥이라 하며 잘 익은 씨를 약으로 쓴다. 메밀에 관하여는 옛 의서 「본초강목」 「본초비요」 「민간험방」 「기효양방」 「간편단방」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메밀의 약성으로 맛은 달고 성질은 차며 비위․대장경에 작용한다. 독이 없다. 위胃를 열어주고 장腸을 편안하게 하며 상기上氣를 내려주고 쌓이고 막힌 것을 통하게 한다. 기운을 돕고 정신을 맑게 한다.
약효는 항염증, 해독, 해열, 진통, 보기, 체한 것을 내리게 하는 작용이 밝혀져 있으며 적용질환은 위와 장의 염증을 제거하여 만성설사 이질을 치료한다. 도토리도 이와 효능이 비슷하다. 현대적 약리실험에서 메밀은 콜레스테롤 증가를 억제하는 작용이 뚜렷하여 동맥경화증 예방과 치료에 탁월한 효능이 입증되었으며 혈압관계는 복용 첫 주부터 뚜렷하게 내린 상태에서 일정기간 유지되었다. 최고혈압 30mmhg, 최저혈압 20mmhg 이상이 내린 실험사례가 확인되기도 했다. 그리고 항지간 작용도 밝혀져 있다.
메밀은 한방 전문치료약으로 쓰이기보다는 민간에서 식이요법으로 민속 약으로 소중히 여겨 왔다. 자양강장의 으뜸 작물이면서 기를 보하고 위와 장에 적체되어 있는 것을 풀어줌으로써 주체식체를 내려주고 만성설사를 멈추게 한다. 고혈압, 동맥경화, 뇌출혈의 예방과 치료 재발방지를 위해 널리 쓰인다. 소염작용이 강하여 가벼운 염증은 쉽게 가라앉히며 간염을 치료한다. 또한 멍든데, 뼈를 삔데, 타박상, 생손앓이, 관절염 등에 메밀가루에 생강즙과 술로 반죽하여 붙이면 통증이 없어지면서 특효가 있다고 했다. 악성종기, 부스럼, 피부염에도 그 독 기운을 뺀다. 메밀은 치료목적으로 사용할 때는 메밀쌀 200g을 하루 양으로 하여 묵을 만들어 먹는다.
예부터 메밀껍질은 베갯속으로 명성이 높았다. 젖먹이 아이 베개에는 꼭 메밀껍질을 넣고 만들어서 두풍과 열기를 식혀 머리가 맑아지도록 배려했다.
메밀은 잎과 꽃 열매에서 혈압강하제인 루틴Rutin을 추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