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가야와 양강(兩岡) 세상에 흠뻑, 한개마을과 무흘구곡 정취에 취하다
2025년 3월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 번의 특강 ①성주고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2013년 10월에 개교하여 지난 2월, 11년 4개월 만에 116개 고을 답사의 긴 여정을 마치고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알려드린 대로, 회원님들 중에 이대론 아쉬움이 있어 그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고을들을 중심으로, 한 번 더 답사하자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숙고 끝에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하여, 2025년 3월부터 2026년 2월까지 <12번의 앙코르 답사>를 진행하기로 하셨습니다. 교장선생님께 감사드리며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 번의 특강>을 준비 중인 교장선생님은 얘기합니다.
<12번의 앙코르 답사>는 기존의 읍치구역 중심의 통치 시설들을 둘러보는 것을 지양하고 경관이 수려하고, 걷기가 편하며, 오랜 전통이 켜켜이 쌓인 유적들을 중심으로 둘러보려 합니다. 또 한 고을을 3, 4개 주제로 나누어 둘러봅니다. 아울러 둘러볼 고을을 미리 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참가자 여러분 의견을 모아 진행하려고 합니다. <12번의 앙코르 답사>가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지는 행복하고 보람 있는 답사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수도산 자락에 기대어 12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청암사의 분위기가 고즈넉하다.Ⓒ김천시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 번의 특강> 제1강은 새봄맞이 소풍으로, 경북 <성주(星州)고을>입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첫째, 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의 유적을 살펴보고 둘째, 성주가 낳은 으뜸 유학자인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 선생이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셋째, 성산이씨 집성촌인 한개마을을 촘촘히 둘러보고 넷째, 수도산에 기대고 있는 청암사와 무흘구곡을 탐방하려 합니다.
<앙코르! 고을학교 열두 번의 특강 ①성주고을>은 2025년 3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성주IC-한개마을(하회댁/교리댁/북비고택/한주종택)-성산동고분군(고분/전시관)-청천서당-동강김우옹신도비-회연서원-무흘구곡(봉비암/한강대/배바위/선바위/사인암/옥류동/만월담/와룡암/용추)-청암사(회당비/대운당비/청암사사적비)-극락암(극락전/보광전)-고봉당부도-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식사 겸 뒤풀이가 있습니다.
▲<성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성주고을>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성주는 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의 땅입니다.
성산가야(星山伽倻)는 6가야의 하나로 벽진가야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6가야는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고령가야(상주)입니다.
성산가야의 실체를 밝혀줄 자료는 매우 빈약하여 <삼국유사> 5가야조의 기록과 성주에 산재하는 고분군의 발굴 조사 등으로 얻을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전부이며,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당시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성주는 성산가야의 고지로 알려져 왔고, 또 성주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군을 성산가야의 고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성주 지역의 주민들도 이러한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지역의 정체성을 성산가야에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산동 고분군은 성산리 일원에 323기, 성산 자락의 고분까지 포함하면 512기에 이른다.Ⓒ성주군
현재까지 조사된 성주 지역의 고분은 74개소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성주읍 일원의 성산동 고분군과 월항면의 수죽리, 용각리 고분군, 금수면의 명천리 고분군은 대규모 고분군으로서 성주 지역의 3대 고분군으로의 위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3대 고분군에는 다른 소규모 고분군에서는 보이지 않은 중대형급 봉토분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 범위가 넓고 입지도 우월합니다. 3대 고분군은 성산가야의 존재와 관계없이 고분군이 조성되던 시기 성주 지역에 대규모 고분군을 축조할 역량을 가진 세 개의 큰 세력 집단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서 성산가야 또는 벽진가야로 지칭된 기사 외에 별다른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성주의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타 유적들에 대한 학술적 조사와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지역의 중심을 차지하는 고분군으로서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우선적인 고려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산동 고분군(星山洞 古墳群)은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성주읍 성산리와 선남면 명포리, 장학리, 신부리에 걸쳐 있어 성산동 고분군, 명포리 고분군, 장학리 고분군, 신부리 고분군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큰 범주에서는 하나의 고분군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산 일원의 고분군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를 시행한 결과, 성주읍 성산리 일원에 323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으며, 선남면 명포리, 장학리, 신부리 등 성산의 자락에 속한 고분을 포함하면 그 수가 512기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한 성산동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고분들은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이고, 봉토분의 외연에 원형 혹은 타원형의 둘레돌을 가지며, 봉토분 내부에 하나의 주곽과 하나 혹은 두 개의 부곽이 있습니다. 고분군 묘제의 유형으로 보면, 매장 주체부 한쪽 장벽에 잇대어 감실을 설치한 평면 ‘凸’자형의 감실 부곽식 고분과 매장 주체부를 할석으로 축조한 할석식 돌방무덤[石室墓], 매장 주체부를 대형 판석을 주로 사용하고 할석으로 보강한 판석식 돌방무덤 등 세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또한 조사한 고분 묘제의 유형에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만의 특징적인 지역성이 나타납니다. 그 지역성은 돌방의 길이 대 너비의 비율로서 5:1의 ‘세 장방형’인 대가야 묘제나, 5.5:1 이상의 ‘극세 장방형’인 함안 아라가야 묘제와 다른 3:1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라 계통에 친연성을 지닌 묘제라고 할 수 있으며, 대구, 칠곡, 구미, 김천 지역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산동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출토한 유물은 굽다리접시와 긴 목 항아리, 짧은 목 항아리, 귀 달린 항아리, 그릇 받침 등의 토기류와 금제 귀고리, 은제 관 꾸미개, 은제 팔찌, 은제 허리띠 꾸미개, 곱은옥, 반지 등의 장신구류, 그리고 둥근 고리 큰 칼과 큰 칼, 창, 화살촉 등의 무기류와 도끼, 낫, 가락바퀴 등의 농, 공구류, 재갈, 발걸이, 말띠 드리개, 말 띠 꾸미개 등의 마구류 등입니다.
토기는 ‘성주 양식’으로 지칭될 정도로 다른 지역 출토 토기와 다른 지역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주 양식’ 토기는 5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성주 서남쪽의 산지와 동북쪽의 낙동강에 의해 형성된 성주 분지 내에서 제작, 사용되어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데 형태와 제작의 기술적 특징을 지닌 일련의 토기 군으로, 굽다리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 종류에서 특징적인 형태가 나타나며 외면 색조는 대체로 흑회색 또는 회청색을 띠고 속심은 암자갈색을 띠며, 외면에 대체로 물결 무늬(波狀紋)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토기 군을 말합니다.
성산성(星山城)은 성주 성산동 고분군과 한 묶음으로 구성되는 지역적 특징이 담긴 유적으로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이후 성산성 인근 지역이 군 특수기지가 됨에 따라 산성이 연결 도로로 사용되면서 중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1966년 12월 30일에 지정 해제되었습니다. 현재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안보상의 이유로 군부대 설립은 어쩔 수 없지만, 엄연히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국가 지정 문화재의 가치를 훼손하고 지정 해제한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 부족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성산성은 성산 정상부에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산 정상부 대부분이 훼손되었고, 원래의 지형이 남아 있는 부분은 경계면을 따라 복토 된 사면 부분과 북편 능선의 일부뿐입니다. 또한 기존에 알려진 산성과 관련한 성벽이나 문 터 등의 유구 흔적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부대의 북서편 모서리에 각종 고지도와 문헌에 표기된 조선시대 성산 봉수 터로 알려진 부분이 있으나, 그곳에는 성산성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뿐 그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후 2016년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인 사드 포대의 배치 장소가 성산성 정상의 군부대로 결정되면서 지역 사회에 큰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처음 반대의 이유는 전자파, 소음 등의 영향으로 인한 피해에서 비롯하였지만, 반대 운동이 지속되면서 제대로 관심받지 못하고 간과되고 있던 문화유산인 성산성의 파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사드 포대의 배치 위치가 최종적으로 성산성이 아닌 성주군 관내의 다른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염려되었던 추가적인 훼손은 없었지만, 복원해야 할 유적이 거듭 훼손될 위기에 처하였었다는 사실은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주의 옛 역사를 담고 있는 성산 일원의 유적과 관련하여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산성을 다시 성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미 50년 이상 군부대가 주둔함에 따라 대부분 유적이 파괴 또는 훼손되었지만, 이제라도 군부대를 이전하고 유적에 대한 정밀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회연서원은 양강(兩岡)의 한 분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사후인 1627년(인조 5)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성주군
성주는 ‘양강(兩岡)’의 학풍이 이어져 내려와 ‘대가(大家)’라 불립니다.
성주는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특히 '양강(兩岡)'이라는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으뜸으로,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동강은 1540년생, 한강은 1543년생) 벼슬과 학행이 비슷하여 근세조선 중엽 이후 성주의 대표 인물로 치며 이들의 고향을 큰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대가(大家)’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양강은 모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퇴계의 인(仁) 사상과 남명의 의(義) 사상을 계승하여, 퇴계의 바다처럼 넓은 유화(儒化)와 남명의 산처럼 높은 기절(氣節)을 본받아 영남의 높은 학문의 정통을 세웠습니다.
특히 한강은 당시의 영남 인사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도들이었으며 근기(近畿) 출신의 미수 허목이 따로 한강의 학문을 이어받아 훗날, 근기 학통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한강을 연원으로 한 근기 학통의 계보는 곧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경세치용학파로 이어졌습니다.
청천서당(晴川書堂)은 동강 김우옹을 봉향하던 청천서원이 1729년(영조 5) 창건되었으나 고종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김우옹의 후손인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중건한 것입니다.
서원이 창건된 이후에는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사림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서당으로 중건된 이후 1910년 봄에 김호림의 아들인 심산 김창숙이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교육 구국운동으로 후진의 양성을 위한 교사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동강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723년(경종 3)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귀부, 이수는 화강암으로 모두 완전한 형태이고, 비신은 오석으로 비문은 해서체로 되어 있으며 갈암 이현일이 짓고 미수 허목의 글씨를 집자하였습니다.
동강 김우옹은 어려서부터 한강 정구와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 출입하며 정통 성리학의 맥을 이었으며 1552년(명종 7)에 진사가 되고, 1567년(선조 원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깨어있는 선비들이 주로 임용되던 청요직을 두루 거쳐 직제학, 대사간, 대사헌, 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청천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은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사후인 1627년(인조 5)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입니다. 서원이 있는 곳은 1583년(선조 16)에 정구가 회연초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입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구사당, 강당, 동재, 서재, 신사당, 전사청, 현도루 등이 있으며, 정구가 직접 조성한 서원 앞뜰의 백매원에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그 밖에 한강 정구와 관련된 유물, 유품이 전시된 유물 전시관과 향현사, 관리사가 있습니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 석담 이윤우를 종향으로 모시고 향현사에는 신연 송사이, 용재 이홍기, 육일헌 이홍량, 모재 이홍우, 동호 이서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하였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예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였습니다.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갈 때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는 우승지, 공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사후에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