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사랑한다며 그냥 돌아섰네 ●지은이_박금리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4. 5. 30
●전체페이지_144쪽 ●ISBN 979-11-91914-59-7 03810/신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2,000원
산골 농사꾼 삶의 노정을 곡진하게 일구어낸 시편!
박금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사랑한다며 그냥 돌아섰네』가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박금리 시인은 한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일했고 출판사를 경영한 적도 있다. 이번 시집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해서 쓴 네 번째 시집으로 충남 목천의 외진 산골마을에서의 삶의 노정을 곡진하게 일구어낸 시편이다.
빈 들을 보니 다시 농사짓고 싶어졌다
허망한 저 누더기 흙덤북에
터진 발바닥 묻어 생채기 틈바구니
농약에 절어 삭아 빠진 진흙 진창을
백설기 찌는 시루 가마에 김 메꿈을 하는
떡살마냥 밀어 넣어
늙은 짐승의 막바지를 이겨 버리고 싶다
세상의 어느 잘난 놈 있어
거름통으로 익어가는 내 정수리에
오줌 한 방 갈기어 주겠냐마는
쉰내 나는 목숨이 오줌통이 아니 된들
화장터 재가 되어 강물에 뿌려지면
저 남도 바닥의 삭은 홍어와
한 몸이 되지 말란 법 있다더냐
썩고 후미진 곳도 나락과 채미는
제 벗은 몸으로 초근을 내리는 법
이제까지 썩혀왔던 문둥이 헤진 살을
저 쑥굴헝 논바닥에서
버둥거리며 새 살을 돋아내고 싶다
―「농욕(農慾)」
“빈 들을 보니 다시 농사짓고 싶”은 시인은 끝이 없는 씨 뿌리고 거두는 농사일처럼 새로운 시집을 냈다. 이번 시집은 농사와 관련된 시집이지만 시인의 시적 철학을 집대성했다. “농약에 절어 삭아 빠진” 농부의 삶이 “거름통으로 익”듯 시인은 스스로 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논바닥에서/바둥거리며” 후손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농부의 마음이 오롯하다. 온몸으로 “새 살을 돋아”내듯 생의 희망을 노정(路程)했다.
가만 보면 농사는
사람만을 위해 짓는 게 아니다
잎새에 붙어 잠시 수액을 빠는
진딧물이나 굴파리도
내 노고를 먹고 사는 한 가족이다
살충제나 수화제에 중독되어
잠시 잎채소를 탐하다 가는
별 볼 일 없는 버러지들이나
내 땀을 먹고 살다 가기는 마찬가지니
저것들도 농사짓는 이유의 한가지이다
뿐이랴 배추청벌레 무당벌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사람이라 일컫는 식솔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순간이 오기까지
농사의 비지땀과 한순간을 맺고 산다
내 육신 기운 딸려 자빠져 버리면
마지막 양분 덜어 먹으며
사람 농사 마무리 지어 주러
저 깊은 땅속 농사에도 찾아와줄까
―「농사의 이유」
“가만 보면 농사”와 시는 닮았다. “사람만을 위해 짓는 게 아니다”. 시와 농사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딧물”과 “굴파리”를 위해서 짓기도 하고, 시를 모르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섬긴다는 말이다. 이처럼 재 너머 논밭에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시인이 쓴 시는 넉넉하다. 검박하고 알곡 가득 찬, 진실한 시집이다. “배추청벌레”나 “무당벌레”나 자본을 좇아 도시로 떠나고 없는 폐허 속 모든 생명들에게 시인 박금리는 시와 농사를 빌려 철저하게 세상의 환한 봄을 이루려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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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시인의 말·04
제1부
농부윤회·13
농욕(農慾)·14
다시 배우다·16
파종·17
농사꾼·18
발톱을 뽑다·20
생사·22
창·24
농사의 미래·26
그 사이·29
농사의 이유·30
쌀·32
산과 들에서처럼·34
그들 앞에서·36
가을걷이·38
노각·40
눈 내리니·44
봄날·45
제2부
회한·49
가족 잔치·50
가로등 애가·52
달팽이식 사람·54
장날 예찬·56
상여·58
자식·59
자화상·60
벗·62
사랑·63
늦사랑·64
간장 종지·66
복선·67
변비·68
화장·70
보라꽃·71
계곡에서·72
꽃잎·74
제3부
술·77
소주의 도수가 낮아진 날·78
포장마차 홍합 담치·80
술탐(貪)·82
옛날 여자·84
강江·85
흐린 날에 탁주 먹기·86
신통한 삶·88
성묘·90
술술술·91
사랑과 이별·92
늙다구니·94
향·96
사랑하는 마음·98
별은 낮부터 있어 왔다·100
주사·102
주정·103
솔숲·104
제4부
활·107
시와 노래의 시대는 가고·108
줄다리기·110
입 공양·111
그에게·112
갑론을박·114
사랑이 끝나다·115
염색쟁이 여사님·116
은자를 그리워하다·118
개씨부랄·120
의문부호·121
하늘 땅 새에 가장 슬픈 일·122
불면의 전과·125
들꽃·126
나무가 땅에게·128
별 여행·129
단풍·130
구토·131
시인의 산문·133
■ 시집 속의 시 한 편
나락들이 거죽을 벗고
농사의 끝에 알곡이 되어
누군가의 속으로 들어가듯
농사의 끝 마당은
가을날 서녘 하늘 노을 속에
벌건 피 적시어 놓고
핏기 없는 육신이 되어
대지의 입속에 빨려 들어가는 거다
거기 그 자리에 누워 거름이 되어
산천 수목의 수액으로 화하고
바람 부는 날 가지 속에 맺혀 흔들리며
내 자손들 어찌 사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오는 가을날 열매들 살찌우고
참한 알곡이 되는 거다
―「농부윤회」 전문
■ 시인의 말
결국 돈이나 벌다 가는 게 인생이다
갖은 멋스런 말로 미사여구를 달아도
한평생 울며 겨자 먹기로 살아온 삶의 찌꺼기를
멍하니 들여다보면
돈 벌다 가는 것 외에 더 큰 의미는 없다
이것이 가시밭길 끝장 머리인 줄 알았다면
장판 장돌뱅이가 되어 흩날리거나
한판 크게 놀다 가고 싶거든
미련한 중생들 머리끝에서 놀다 갈 것을
한때 가치가 어떻네 지성이 어떻네 하며
왜 오지랖 넓은 척 짧은 인생 허비했는지…
결국 돈이나 벌어먹는 간단명료한 길을 걷다
늙어지면 섭생이나 잘하다 가는
우리는 애틋하고 비통하며
허망하기 짝없는 버려진 부랑아다
아, 일푼무관한 시를 쓰며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더불어 시를 쓰게 만든 세상은 그 얼마나 비열한가
2024년 5월
박금리
■ 표4(약평)
시인 박금리는 누구인가? 그는 한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에서 일했고 출판사를 경영한 적도 있다. 그러던 그가 느닷없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했다. 그 후 서울과 문단에 거리를 둔 채 충남 목천의 외진 산골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텃밭을 일구며 틈틈이 흙내 가득한 시를 쓰고 있다. 그의 시는 “빈 들을 보니 다시 농사짓고 싶어졌다”(「농욕(農慾)」)처럼 생의 희망을 노정(路程)한다. 그리고 “농사는 사람만을 위해 짓는 게 아니”(「농사의 이유」)라며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섬기는 사랑에 기반한다. 모두 자본을 좇아 도시로 떠나고 없는 폐허 속에서, 시인 박금리의 시는 농사를 빌려 철저하게 세상의 환한 봄을 이루려는 산 자의 노래이다.
_양문규(시인)
박금리 시인이 돌아왔다. 거대한 선물을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여윈 살집이/옛 시절 내 무관심이 파내어버린/흔적만 같아”(「늦사랑」), 이제는 우리 영혼을 살찌우려고 그가 시의 대지로 돌아왔다. “떡살마냥 밀어 넣어/늙은 짐승의 막바지”(「농욕(農慾)」)를 펄떡이는 정신으로 과시하며 돌아왔다. “악한 것들의 갖은 악다구니 아랑곳없이”(「농사꾼」) 재 너머 논밭에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시인이 쓴 넉넉하고 검박한 알곡 가득 찬, 실로 오랜만에 진실한 시집을 읽고 또 읽는다.
_김응교(시인•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 박금리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총무국 부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술꾼』, 『슬픈 추수의 밤이 놓여 있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