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조금은 음침한 분위기의 카페 구석진 자리에 두 명의 남녀가 앉아
무언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특별히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레몬색의 짧은 커트머리에
시원스런 이목구비가 은근히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여자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눈빛 가득히 표독스러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또 여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왼쪽 뺨에 길게 그어진 칼자국 때문인지
잘생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잔인한 인상을 풍겼다.
여자가 남자에게 한 여자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사진속의 여자는 검은색의 긴 생머리와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지만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무척이나 차갑고 도도한 느낌을 주면서도
앳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진을 건네받은 남자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입 꼬리를 슬쩍 올리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오호~이번 먹이는 꽤 구미가 당기는데?”
“이름은 이 한비, 천화고 2학년. 화령의 짱이구
배경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가능해??”
“큭큭!! 어떤 년인지 너한테 걸리다니 좀 불쌍한 걸?”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구 확실히 할 수 있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화령이 어떤 써클인지는 알지?
어설픈 애들 가지구 섣불리 덤비다 큰코다치지 말구 확실히 처리해.”
“나를 모르냐? 두말 하면 입 아프지.........”
***
“휘야. 난 왜 태어났을까?”
‘당신은 언제부터인가 내게 이런 모습만을 보여주시는군요.’
휘는 오늘따라 부서질 것처럼 위태해 보이는 한비를 말없이 바라보며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을 삼켜야 했다.
“십년 전에.......그 여자가 날 버리고 떠나던 날.......그날.......한 아이를 만났어.
천사처럼 해맑은 그 아이 때문에 난 울지 않을 수 있었어.
그런데.......그 아이를 다시 만났어.......
십년이란 세월동안 날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그 애를 다시 만났어.......
근데........난.......받아줄 수가 없었어.......
저주받은 내 운명 때문에.......처음 만든 친구란 아이 때문에......”
젖어드는 한비의 눈을 보며 휘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당신은 이렇게 제게 남은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마저
무참히 깨버리시는군요.’
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한비는 든든한 휘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들은 한비를 보며
한참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휘는
한비가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안아들었다.
“왜 그토록 힘든 길을 가려 하십니까.
당신의 선택이 당신 스스로를 지옥 속으로 끌어 들이고 있음을 아십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해버린 저 역시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났으니까요.
그럼에도 당신만은 곁에 둘 수 있기를, 어리석은 희망임을 알면서도
당신을 욕심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희망을, 욕심을 버리겠습니다.”
휘에게 안겨 술집을 나가는 한비의 얼굴위로 휘의 중얼거림이,
두 번 다시는 불가능할 것 같은 휘의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한비는 천진한 얼굴로 잠이 들어있었다.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 샘으로.......]
“또 전화기 꺼져있어?”
한숨을 내쉬며 폴더를 닫는 한비에게 재열이 물었지만
대답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락도 없이 벌써 4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는 길연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서운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삐빅!!~
문자 소리에 급하게 폴더를 연 한비는
열 때보다 더욱 다급하게 폴더를 닫아버렸다.
“혹시 길연이야?”
“아냐.”
역시나 걱정스러움이 배어나오는 목소리로 묻는 재열에게
간단히 대답한 한비는 교실을 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었기에........
옥상으로 올라온 한비는 하성의 문자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르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날 밀어내도 기다린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러나 문자를 삭제해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말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비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길연아, 우리 아직 친구인거냐?”
아무도 듣지 못하는 중얼거림이 한비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한비는 옥상에서 손을 잡아주던 따뜻한 길연을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은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장편 ]
비연지화-[37화]
은설화
추천 0
조회 258
04.12.28 22:17
댓글 5
다음검색
첫댓글 길연이가.....SK텔레콤을 쓰는군요...(ㅡ_ㅡ 유후)
오래전 부터 싹튼 길연이의 은밀한 배신이 시작 되는 것인가...ㅠㅠㅠㅡ.ㅡ;;;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살아가야한다는거...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한다는건 정말 힘든 일이겠죠;;;;;;;;;
허허..인물들 간의 갈등이 참 잼나네여 ^^
한비를 외롭게하고 길연이 한비를 배신할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