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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한화』는 무명자 윤기선생이 74세이던 1814년경에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井上)은 저자가 살던 어느 우물가를 가리키는 듯하다. 서술 방식은 평소 견문한 교훈이 될 만한 옛이야기를 먼저 기록하고, 이어 당대 현실의 문제에 비추어봄으로써 사회의 부조리가 자연스레 드러나도록 하였다. 이 편은 이름을 한화(閒話)로 붙였지만 저자의 현실 비평 의식이 깊이 반영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 필기(筆記)의 오랜 전통에 기반하여 저술되었다.
● 환시(宦侍)
성종조에 어떤 환관이 근친(覲親)을 하려고 말미를 얻어 서쪽 고을로 가게 되었는데, 지나는 곳마다 수령들이 음식을 넉넉히 제공하고 온갖 아첨을 다해 환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환관이 고향 집에 이르자, 그 고을 아전이 본관 사또에게 고하기를 “지금 이 환관은 성상께서 아끼고 신임하는 사람이므로 모든 고을의 수령들이 달려가 인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하물며 본읍 수령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후한 성의를 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또는 “환관의 왕래에 어찌 사사로이 친교를 맺어서야 되겠는가. 네가 이미 말을 냈으니 대략 의례적인 문안이나 하려무나.”라고 하였다. 이에 환관이 크게 원한을 품었다.
환관이 조정에 돌아가자 임금은 본관 사또가 어찌 대접하더냐고 하문하였고, 환관은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후하고 풍족하게 대접해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중에 정관(政官)이 그 수령을 다른 직책에 의망(擬望)하자, 그때마다 임금이 낙점(落點)을 하지 않아 여러 해 동안 벼슬이 막혔다.
어느 날 강연(講筵)에서 군자와 소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임금이 “요즘 세상에도 소인이 있다.”라고 하였다. 대신이 “전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그 일을 이야기하고서 “이 사람은 내관(內官)이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이유로 아첨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소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대신이 퇴궐하여 그 실상을 탐지하고 나중에 강연에서 아뢰자, 임금이 즉시 그 환관을 참수하라 명하였다.
인조조에 서정연(徐挺然)이 사복 정(司僕正)으로 숙직하다가 별감이 어떤 환관을 데리고 와서 어승마(御乘馬.임금이 타는 말)를 끌어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서정연이 그 까닭을 묻자 별감은 “이 내시는 석마(錫馬.말을 하사함)의 은전을 입었으므로 말을 지급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서정연이 “숙직 관원에게 고하지 않고 네 마음대로 끌고 가는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하며, 도로 마구간에 들이도록 명하고 가장 시원찮은 말을 골라서 내주었다.
어느 날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노닐 적에, 그 환관이 동류(同類)들과 함께 “지난번 내가 석마의 은전을 입고 사복시(司僕寺)에 갔더니, 입직 관원 사복 정 서 아무개가 가장 좋은 어승마를 내주어서 300금에 팔았네.”라고 소곤거려 일부러 임금의 귀에 어렴풋이 들리게 하였다. 임금이 환관을 불러 상세히 묻고서 나중에 서정연의 임용에 낙점을 하지 않았다. 대신이 틈을 보아 아뢰기를 “서정연은 평소 강직함이 돋보였는데 근래 오래도록 벼슬에서 밀려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지 듣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그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대신이 실상을 탐문하여 고하자, 임금은 그 환관을 주살하도록 명하였다.
이 두 환관이 명주(明主)의 생각을 헤아려 정반대의 말로 참소한 것은 앞뒤 사례가 똑같다. 그러나 밝은 거울이 마침내 샅샅이 비추고 죄를 지으면 끝내 달아날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소인의 심보는 대체로 이와 같다. 그런데 만약 성종과 인조의 세세히 살펴 주는 성덕과 참소를 미워하는 결단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이런 때를 당하여 참소와 간특함이 어디로부터 나오고, 사특한 지름길이 어디로부터 열리며, 바른 선비가 어찌 원통함을 한탄하고, 공론이 어찌 막힐 염려가 있었겠는가. 이는 참으로 이른바 ‘임금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於戲不忘〕’는 경우이니, 400년 동안 국가가 공고히 유지된 것이 어찌 우연일 뿐이겠는가.
● 충무공 이순신의 동개〔李忠武舜臣櫜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처음 권관(權管)이 되었을 때, 동개(櫜鞬.활집)가 매우 아름다웠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사람을 보내 빌리고자 하니, 충무공이 거절하면서 “이것은 빌리자는 말인가, 바치라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서애가 전해 듣고 기특하게 여겨 비로소 발탁할 뜻을 품게 되었다.
지금 풍속으로 말하자면 충무공은 반드시 활집을 바쳐서 친해지려 했을 것이고, 서애는 반드시 노하여 배척했을 것이다.
● 풍원군 조현명의 이엄〔趙豐原顯命耳掩〕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영변 부사(寧邊府使)가 재상들에게 이엄(耳掩)을 선물하면서 다른 물건도 매우 많이 보내 주었는데, 풍원군은 다른 물건과 함께 모두 물리쳤다. 나중에 비변사의 회좌(會座)에서 재상들이 모두 새 이엄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풍원군은 “공(公)들의 이엄이 좋군요. 영변에서 보내준 것이오?”라고 물으니,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풍원군이 “나는 받지 않았소.”라고 하자 여러 사람들도 그제야 모두 돌려주었고, 영변 부사는 드디어 등용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별로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외읍(外邑)에서 보내 주는 물건이 풍족하지 않은 것만을 한스럽게 여겨서 풍족하면 등급을 뛰어 옮겨주고, 그렇지 않으면 배척하여 내친다. 이런 식으로 제 몸을 살찌우는 수단을 삼고, 존귀한 사람에게 아첨하는 도구로 삼으며, 벼슬에 오르는 계책을 삼는 자들은 백성을 수탈하는 정치로 못할 짓이 없으니, 스스로를 위한 계책으론 훌륭하다 하겠다. 고인이 이르기를 “생민(生民)의 고혈(膏血)을 어찌 이처럼 허다히 쓴단 말인가.[生民膏血 安用許多]”라고 하였으니, 재상이 된 자가 이를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호남 최 정언〔湖南崔正言〕
영조조에 이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하례 반열에서 의관이 남루한 어떤 사람을 보았다. 서리를 시켜 누구인지 물어보게 하니, 호남에 사는 정언(正言) 최 아무개라고 하므로 이병상은 시종신(侍從臣)이 이토록 빈한한 것을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겼다. 나중에 도목정사(都目政事) 때, 마침 용강 현령(龍岡縣令) 자리가 비었으므로 최 정언을 수망(首望)으로 올려 제수되게 하였다.
최 정언이 여관에 있다가 그 사실을 듣고 집리(執吏)를 불러 책망하기를 “시종(侍從)하는 신하가 쫓겨날 죄를 짓지 않았는데 까닭 없이 지방관에 보임시키니, 이 무슨 행정의 격식인가. 속히 나를 위해 정체(呈遞)하라. 너희 판서의 일 처리가 이처럼 해괴한데 정관(政官)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집리가 달려가 이병상에게 고하니, 이병상이 즉시 견여(肩輿)를 타고 가서 만나보고 “나는 그대가 너무 궁핍한 것이 가련하여 외임에 제수한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노하여 체직장을 올릴 줄은 생각지 못하였소. 이는 나의 잘못이오.” 하며 간곡히 사죄하였다. 최 정언은 “공께서 이미 정관의 체모를 잃으셨으니, 나는 체직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병상은 탄식하고 떠났으며 드디어 조정에 명성을 널리 알려 옥당(玉堂.홍문관)에 선임되었다.
이 이야기는 겨우 10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심을 살피건대 오직 이문만을 탐하여 홍문관, 승정원, 재상의 고귀하고 부유한 자들마저도 한마음으로 경영하여 오직 풍족한 고을 수령이 되기를 도모하여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하지 못할 짓이 없으니, 최 정언의 풍도(風度)를 듣는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최 정언 같은 사람은 본래 얻을 수 없지만, 가령 지금 정관(政官)이 최 정언처럼 가난한 사람을 보았다면 모욕하고 박대할 뿐이고 관직에 제수할 리가 없을 것이다. 또 최 정언의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나는 그가 가련해서 좋은 고을을 제수한 것인데 나에게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되레 나를 노여워하다니, 사람됨이 이와 같다면 어찌 풍족한 고을 수령이 되어 아사(餓死)를 면할 수 있으랴.”라고 할 것이다. 최 정언의 말을 들은 다른 자들도 모두 ‘괴이한 물건’이라고 비웃을 뿐이니, 어찌 기꺼이 몸소 방문하여 사과하고 명성을 널리 알려 청직(淸職)에 선발되게 하였겠는가.
● 황희가 교하 현감에게 편지를 보내 전답을 사기를 청하다〔黃喜貽書交河倅請買田〕
어떤 기록에 조선 초엽의 고사로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종조에 사간원에서 계(啓)를 올려 “영의정 황희(黃喜)가 교하 현감(交河縣監)에게 편지를 보내 전답을 사고자 청하였으니, 백관의 우두머리에 있어선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간관(諫官)은 이 일로 인해 죄를 얻은 자가 없었고, 황희 정승도 명재상이 되는 데 지장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지금 세상이라면 대신(臺臣)은 반드시 멀리 귀양 갔을 것이고, 대신(大臣)은 반드시 그를 원수로 보았을 것이다.
● 홍문관 교리의 아들〔弘文校理之子〕
어떤 홍문관 교리의 자식이 거사(居士)를 매질하여 숨지게 하였다. 감사(監司)가 살인자를 사형시키려 하다가 마침 순행(巡行)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산림(山林) 두 사람이 있었는데, 살인자의 아들은 감사가 필시 이 두 산림을 찾아뵈리라 짐작하고 먼저 한 산림에게 애걸하니, “내가 잘 이야기하여 무사하게 해 주겠네.”라고 대답하기에 그 아들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또 한 산림에게 사정을 고하니, “나는 산야에 병들어 칩거한 사람인데, 감사가 찾아올지도 보장할 수 없거니와 혹 만나더라도 청탁과 관계된 일이라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려우니, 그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듯하네.”라고 대답하기에 그 아들은 수심이 그득한 채로 물러났다.
감사가 과연 앞의 산림을 방문하니, 그 아들이 창밖에 엎드려 이야기를 들었는데 밤새도록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애당초 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 아들은 허락해 준 사람이 이와 같은데 거절한 사람이야 희망을 걸어 무엇하겠는가 생각하면서도 사정이 절박하여 우선 몰래 들어나 보기로 하였다.
감사가 다른 산림을 찾아가자 또 밖에서 귀를 기울이자니, 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에 산림이 “듣자니 아무 고을에 살인 사건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오?”라고 물었고, 감사는 “사람을 죽인 흔적이 또렷하여 용서할 수 없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산림은 “그렇지 않소. 그대가 옥사를 판결함이 어찌 그리 고지식하오. 지금의 사대부는 옛날의 향사(鄕士)와 수인(遂人)에 해당하오. 그가 읍리(邑里)에 있으면 본래 관장(官長)과 차이가 없는데, 하물며 홍문관 교리의 자식이 거사 하나를 매질하다가 우연히 죽였거늘 목숨으로 갚게 해서야 되겠소.”라고 하였다. 감사는 처음에 매우 곤란해 하다가 마침내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떠났다.
그 아들은 감격의 눈물을 감출 수 없어, 방에 들어가 산림을 만나 “저번에 부탁드린 일은 과연 어찌 되었습니까?”라고 묻자, 산림은 “이 일은 과연 청탁에 관계되므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였으니, 그대의 정성스런 부탁을 저버리게 되어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네.”라고 대답하였다. 그 아들은 매우 훌륭한 분이라 생각하고 물러났다.
감사가 과연 살인자를 사형에서 감하여 주자, 앞의 산림은 자기의 공이라고 자랑하였으니, 그 두 산림의 차이가 어떠한가.
● 고인들은 일을 만나면 과감히 말을 올렸다〔古人遇事敢言〕
고인들은 일을 만나면 과감히 말을 올렸으니, 그 성품이 강직해서일 뿐만 아니라, 임금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였다. 말을 듣고서 그 마음의 공과 사를 살피고, 이치만을 따르고 그 사람의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아 채용할 만하면 채용하고, 발탁할 만하면 발탁하고, 용납할 만하면 용납하기를 마치 한 문제(漢文帝)가 행한 것처럼 한다면 한 가지 식견이라도 가진 자들이 누가 충정을 바치기를 원치 않겠는가.
그런데 후세에는 그렇지 못하여 겉으론 숨기지 말라 하면서 기휘(忌諱)에 저촉되면 노여워하고, 겉으론 가납(嘉納)하는 척하면서 행적이 한미하면 내치고, 심하면 당심(黨心)으로 의심하여 이미 시행했던 일로 치부한다. 크게는 주벌하거나 유배를 보내고, 작게는 배척하고 폐고(廢痼)시키니, 누가 뜻밖에 가루처럼 부서지는 곳에 제 몸을 두고자 하고, 깊은 연못에 잠긴 여룡(驪龍)의 턱에 제 몸을 가벼이 던지려 하겠는가.
이 때문에 부자가 서로 경계하고 붕우가 서로 권면하여 조용히 침묵하고 우물쭈물 머뭇거림이 풍습을 이루어, 오직 거실(巨室)에 죄를 얻지 않고 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서 몇 고을 수령을 지내고 몇 등급의 벼슬이 오르는 것으로써 집안을 크게 융성시킬 계책을 삼는다.
이것이 제 몸을 위한 계책으로는 훌륭하다 할 것이나, 세도(世道)는 어찌할 것이며 생민(生民)은 어찌할 것인가.
● 고인의 소차〔古人疏箚〕
고인들은 소차(疏箚)를 올리려 하면 곧 생각대로 솔직하게 기록하여 간혹 임금의 안색을 범하거나 남의 잘못을 논하면서 남에게 부추김을 받거나 저지당한 적이 없었다. 간혹 남들이 알지 못하게 혼자 올리는 자도 있었고, 간혹 대중이 모두 만류해도 듣지 않는 자도 있었으므로 공평하고 정직한 말은 그 문장이 읽을 만하였지만, 사사로이 아부하는 논의는 남들의 비난을 받았다. 나라의 치란(治亂)과 세상의 융체(隆替)가 여기에 매여 있으므로 임금은 반드시 언로(言路)를 열어 두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이것이 천지의 변치 않는 원칙이고 고금에 통용되는 도리이다.
그런데 당론(黨論)이 갈린 뒤로부터 세상에 공론이 없어지고 사람마다 속셈을 지녀서 단지 이욕(利慾)만을 생각하고 의리는 알지 못한 채 친하고 소원함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며, 네 편 내 편을 갈라 사랑하고 증오한다. 존귀한 세력가에게 아첨하고자 하면 그의 향배(向背)에 따라 부추기거나 억누르기도 하여 기꺼이 송골매나 사냥개가 되고, 자기 당여(黨與)를 비호하고자 하면 멋대로 거짓을 꾸며 공명의 수립(樹立)을 위해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짓을 교묘히 한다. 간혹 뒤로 남의 사주를 받고서도 겉으로는 악인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빌리기도 하고, 간혹 어로(魚魯)조차 구분치 못하면서 함부로 분수에 넘는 욕심을 품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상소 한 장이 올라왔다는 말을 들으면, 그 문장을 보지도 않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으레 “이것은 아무개가 시킨 것이지, 어찌 그가 지을 수 있는 것이랴.”라고 한다. 이는 온 세상이 모두 그렇기 때문이지만, 만약 진실로 공심(公心)에서 나와서 제 손으로 지은 자가 있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천운이 아니겠는가.
● 세상에 공론이 없다〔世無公言〕
세상에 공정한 언론이 없어서 비난과 명성, 거짓과 진실이 모두 뒤집히고 어그러졌다. 이른바 시시비비란 것이 자신의 애증(愛憎)을 따른 것이 아니라면 바로 권세의 유무를 따를 뿐이다.
여기 어떤 일이 있다고 치자. 그 옳고 그름이란 흑백(黑白)처럼 분변하기 쉬울 뿐만이 아닌데도, 시비를 판정하는 자들은 매양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은 옳다고 한다. 마음속으로는 진실을 알면서도 명백히 판별하려 하지 않는 자도 있고, 내 편 네 편에 따라 후박(厚薄)을 달리하여 고의적으로 돕거나 돕지 않는 자도 있으며, 마음속에 주관이 없이 남의 말만 믿는 자도 있고, 선입견을 고수하여 자세히 조사하지 않는 자도 있다. 번갈아 전하고 서로 호응하여 오류를 답습하고 잘못을 더하니, 이는 모두 실제로 형적(形迹)을 조사하여 의리로 결단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호오(好惡)와 친소(親疎)에 따라 말을 왜곡하는 데 지나지 않아서 그 근본은 버리고 지엽만 다스리며, 밝고 공정한 것은 애매하게 만들고 무함과 거짓은 덮어 주어 옳은 것은 끝내 그른 데로 떨어지고 그른 것은 마침내 옳은 데로 돌아가니, 비록 참된 시비를 밝히고자 한들 내 편은 적고 남의 말은 많다는 탄식만 생긴다.
인사(人事)의 아름답고 추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물의 참과 거짓, 문장의 좋고 나쁨까지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어서 연석(燕石)이 야광주(夜光珠)보다 보배가 되고, 학구(學究)가 홍조(鴻藻)보다 높아지니,서역(西域)의 장사꾼과 상관완아(上官婉兒)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찌 월족(刖足)의 억울함과 창부(傖父)의 호칭을 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모르겠다. 천운(天運)이 상도를 잃어서 음양의 참서(慘舒)가 변하고, 지도(地道)가 바름을 어겨 경위(涇渭)의 청탁(淸濁)이 뒤바뀌어 그 때문에 인사(人事)도 그에 따라 본색을 잃어버린 것인가.
● 여귀의 보복〔厲之能報〕
백유(伯有)가 사대(駟帶)와 공손단(公孫段)을 죽이고,위기(魏其)와 관부(灌夫)가 함께 무안후(武安侯)를 죽이고,관우(關羽)가 여몽(呂蒙)을 죽이고,왕릉(王凌)이 사마의(司馬懿)를 죽이고,조협(刁叶)이 왕돈(王敦)을 죽이고,강호(姜岵)가 상유한(桑维翰)을 죽였으니, 이는 여귀(厲鬼. 악귀)가 보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순(張巡)이 여귀가 되어 적을 죽였다는 말과 왕량(王良)의 누이가 고양이가 되어 무후(武后)의 목을 졸랐다는 말이 들리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저 죄 없는 사람을 해친 자들이 장차 두려워 뉘우칠 것인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생겨서 방자해질 것인지 알 수 없다.
● 잡술에 미혹됨〔雜術之惑〕
중국인은 매사가 우리나라처럼 어수룩하지 않다. 잡술(雜術)에 있어서도 자주 기발하게 맞히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명을 점쳐 오는 일이 많았다. 근세에 들은 사례로 말하자면, 윤지완(尹趾完)의 운수에 대해서 “볼만한 것이 없다.〔無足可觀〕”라고 하였고, 이재간(李在簡)에 대해서는 “벼슬이 과천에서 그칠 것이다.〔官止果川〕”라고 하였으며, 이면항(李勉恒)에 대해서는 “벼슬이 금오랑에 이르러, 건너간 뒤에 건너오지 못할 것이다.〔官至金吾 旣濟未濟〕”라고 하였다.
윤지완은 내각에 들어간 후에 다리에 병이 나서 물러났으나 정직함이 볼만했고, 이재간은 관직이 판서에 이르러 죄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과천에 이르러서 죽었으며, 이면항은 금오랑이 되어 시위(時偉)를 압송하여 제주에 위리안치시키고 나서 그대로 염병에 걸려 죽었다.
처음의 말로 보자면 윤지완이 어찌 볼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재간의 관직이 과천에 이른다는 말도 어찌 어긋난 것이 아니겠으며, 이미 건너가서 건너오지 못한다는 말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나중이 되어서야 모두 들어맞았고,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모두 기묘하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유언비어나 도참설이 처음엔 애매하다가 마침내 부합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운명을 점치더라도 자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자기가 죽은 뒤에 남들이 기묘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하겠다.
대체로 이러한 잡술이란 흉함을 피하여 길한 데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나마 괜찮지만, 이처럼 운명에 관한 것은 죽기 전까지 애매한 의심 속에서 살게 되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또 운명이 이미 정해진 것이라면, 알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랴. 참으로 심히 미혹되었다고 하겠다.
● 제(齊) 자의 운〔齊字之韻〕
이경양(李敬養)이 국자장(國子長.대사성)이 되어 승보시(陞補試)를 설치하고 시제(詩題)를 출제하기를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사이에서 섭제(攝齊)하지 못함이 한스럽다.”라고 하며 제(齊) 자를 운자로 뽑았다. 제생들이 “제(齊) 자는 어떤 운으로 지을까요?”라고 물으니, 이경양이 “제 자의 운을 왜 다시 묻는가? 응당 제 자로 운을 달아야지.”라고 대답하였다. 제생들은 처음에 지(支) 운으로 할지, 가(佳) 운으로 할지 의심이 되어 물었던 것인데 시관의 말이 이미 이와 같으니, 드디어 제 자로 운을 달았다. 지금 그때 과거 답안을 고찰하면 알 수 있다.
통진 현감(通津縣監) 김광백(金光白)이 석채(釋菜) 때에 유생으로 하여금 축문을 쓰게 했는데, 생폐(牲幣)와 예제(醴齊)라는 구절에서 제(齊) 자로 읽으니, 크게 놀라서 “이 글자는 재(齋) 자로 읽어야 한다. 유생들이 참으로 무식하구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섭제 대사성(攝齊大司成), 예재 태수(醴齋太守)로 비웃었으니, 이는 단지 제(齊) 자가 가지런하다〔齊整〕는 의미의 제(齊)만 되는 줄 알고 옷 아래를 꿰맨다〔衣下縫〕는 의미에선 자(粢)로 발음됨을 알지 못한 것이며, 제사에 재계〔齋〕만 있는 줄 알고 알맞게 섞는다〔和齊〕라는 의미에서는 제(劑)로 발음됨을 알지 못한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것에는 상대가 있다.
그러나 김광백은 본래 무인이라 괴이할 것이 없지만, 국자 선생이라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 사람이 배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양주 송산의 시골 여인〔楊州松山村女〕
근세에 어떤 시골 여인이 재주와 학식이 비상했는데, 남의 첩이 되어 양주(楊州) 송산(松山)에 거주하였다. 폭포를 보고 쓴 시에 “눈처럼 부서지는 둥근 바위에 휘도는 물결이 절벽을 흔드니, 아름답게 부서지는 밝은 구슬이 굴러서 시내로 들어가네.〔寒團雪席回掀壁 朗碎明珠轉入溪〕”라고 하였다. 그 밖의 시들도 대개 이와 같아서 시를 잘한다는 자들이라도 이에 미치기 어려웠으니, 하늘이 재주를 내려줌에 남녀를 가리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또 어떤 처녀와 과부가 각자 시 한 구절로 상대를 구하되, 만일 대구를 잘 짓는 자가 있으면 즉시 몸을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처녀의 시는 “산꽃이 물에 비쳐 물고기가 나비 된다.〔山花倒水魚爲蝶〕”라고 하여, 향(香) 자가 접(蝶) 자의 대가 되기를 구하였다. 과부의 시는 “초록 버들 분홍 복사꽃에 봄은 두 빛이로세.〔柳綠桃紅春二色〕”라고 하여, 형(馨) 자가 색(色) 자의 대가 되도록 구하였다. 그러나 끝내 대구를 잘하는 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두 시는 모두 자신에 관한 일이어서 재주라면 재주라 하겠으나, 그 뜻이 음란하니 말할 가치가 없다.
● 옛날에 문장을 지은 사람들〔古之爲文章者〕
옛날에 문장을 지은 사람들은 이미 하늘이 준 재주가 있고, 또 독실한 공부가 있고, 시세(時世)도 높았으므로 저처럼 성대할 수 있었다. 지금 사람들은 이미 그런 재주가 없고, 또 그런 공부도 없으며, 시세도 점점 낮아졌는데도 옛사람과 대등하기를 바란다. 비유하자면 여자가 큰 소리로 목이 찢어져라 외쳐도 반드시 남자에게 미치지 못해 끝내 목이 잠길 뿐이고, 아동이 온몸으로 힘을 다해도 장성한 사람을 이기지 못해 끝내 쓰러지고 마는 것과 같다. 이제 이미 지난 자취를 고찰하면 증명할 수 있다.
삼백 편(三百篇)은 시(詩)의 원조인데, 변풍(變風)과 변아(變雅)는 이미 정풍(正風)과 정아(正雅)에 미치지 못하고, 더 내려와 한위(漢魏) 시대에는 한위의 문체(文體)가 있고, 당대(唐代)에는 당대의 문체가 있고, 또 당대에는 초당(初唐)ㆍ성당(盛唐)ㆍ중당(中唐)ㆍ만당(晩唐)의 구별이 있으며, 송대에는 송체(宋體)가, 명대에는 명체(明體)가 있으니, 모두 낮아지기만 하였지 높아지지는 못하였다.
《상서(尙書)》는 문장의 원조인데, 전(典)ㆍ모(謨)로부터 비(費)ㆍ진(秦)까지 그 고하의 수준이 어떠하였는가. 한대의 가(賈)ㆍ동(董)ㆍ마(馬)ㆍ반(班), 당대의 한(韓)ㆍ유(柳), 송대의 구(歐)ㆍ소(蘇), 명대의 왕(王)ㆍ이(李)는 각자 한 시대의 뛰어난 문장이었고 그 문체도 시대에 따라 변하였으니, 이는 천지자연의 운수이므로 사람이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저 꽃이 봄철에 처음 꽃봉오리가 터지고 흐드러지게 만개했다가 더 지나면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데, 그 모습과 기상이 시간에 따라 똑같지 않은 것은 이치와 형세가 본래 그런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기력과 재주는 고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고인의 작품을 본받고자 한다면 비록 마음을 다 기울이고 피를 쏟더라도 도습호로(蹈襲葫蘆)가 아니면 반드시 각화당돌(刻畵唐突)에 이르게 되고, 심하면 두찬생경(杜撰生硬)하게 되어 이치에 닿지 않고 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록 사람의 입을 감미롭게 하고 속된 안목을 놀라게 할 만하더라도, 마치 계집종을 아름답게 단장시켜도 끝내 부인의 모습과 닮지 않은 것과 같다.
대개 시란 울적한 생각을 쏟아내어 읊조리고 감탄하며〔陶寫詠歎〕, 비유ㆍ흥기ㆍ풍자ㆍ경계〔比興諷戒〕하고자 하여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고, 문장은 뜻이 소통되고 명확하고 정직하며〔通暢明正〕, 사실을 엮어 허황함을 제거〔摭實去誕)하고자 하여 말은 막힘이 없고 이치는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이른바 빛깔과 울림과 격조가 모두 이로부터 생겨나고, 이른바 법도와 변화가 모두 이로부터 일어나니, 이는 재주와 공부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시대와 세상에 있어서는 하루 사이에도 아침저녁의 차이가 생기니, 일원(一元) 중에 어찌 고금의 다름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시문을 짓는 자들은 다만 자기 재주에 따라 노력해야지, 재주가 미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본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미칠 수 없는데도 억지로 한다면 수릉여자(壽陵餘子)가 남의 걸음을 배우다 엎어진 것처럼 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혹자가 힐난하기를 “그렇다면 지금 옛날을 배울 필요가 없이 비리(鄙俚)한 말만을 취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어찌 이것을 말한 것이랴. 세상에서 약간 이름이 알려진 자가 곧장 눈썹을 치키고 잘난 체하며 ‘나는 당체(唐體)도 지을 수 있고 한체(漢體)도 지을 수 있다.’라고 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에 따라 추종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유독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왜 ‘나는 주남(周南)ㆍ소남(召南)ㆍ요전(堯典)ㆍ순전(舜典)처럼 지을 수 있다.’라고 하지 않고 한당(漢唐)으로 내려오는가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말은 뜻만 통하게 할 뿐이다.〔辭達而已矣〕’라고 하셨으니, 어찌 나를 속인 것이겠는가.”
● 공자께서 효에 대해 답하다〔夫子答問孝〕
공자께서 효(孝)의 물음에 대해 답하기를 “살아 계실 때 예로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 장사 지내고, 예로 제사 지내는 것이다.〔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라고 하였다. 예(禮)라는 한마디 말이 산 자를 섬기고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허다한 도리를 다 포괄하였으니, 성인이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기를 예로 하는 것은 모두 살아서 섬기는 도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살아서 예로 섬기지 않은 자들이 어찌 예로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낼 수 있겠는가. 이제 각각 그 일을 가지고 대략 말해 보겠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어기거나 숨기지 말고, 제멋대로 나다니지 말고, 위험과 모욕을 끼치지 말고, 부모의 옳지 않은 점이 있어도 보지 말고, 매우 천박해도 공경해야 하니, 음식을 충실히 봉양하고 의복을 철 따라 입혀 드리며 질병에 약을 올리는 것은 단지 사소한 일일 뿐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몸에 입히는 수의(壽衣)와 관에 넣는 각종 물건을 후회가 없도록 성신(誠信)을 다하여 마련하되, 가난하면서 부자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장사를 지낼 때는 보기에만 아름답게 하지 말고, 남의 산을 침범하지 말고, 묘소를 넓게 점거하지 말고, 까닭 없이 옮기지 말아서 오직 체백(體魄)을 편히 모셔 흙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해야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집안 살림에 맞게 하여 밥이나 국 한 그릇도 정결하기를 힘쓰며, 풍성하기만 추구하지 말아야 하니 풍성하면 정갈하지 못하기 쉽고, 늦게 올리지 말아야 하니 늦으면 조용하지 못하기 십상이므로 다만 마음을 재계하고 생각을 집중하여 마치 영혼이 와 계신 듯한 정성을 다한다면, 이 또한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이와 다르다. 호오(好惡)와 향배(向背)를 어버이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고, 동작과 행위를 어버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대로 하며, 존엄하게 받드는 듯하지만 마음속으론 아는 것이 없다고 모욕하고, 성실히 봉양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시골 노인으로 대접하며, 거처를 달리하여 곁에서 모시는 때가 적고, 사사로운 일을 숨기기를 꾀하여 어버이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한다. 몸이 부귀하게 되면 드러내놓고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취하며, 재주가 있고 문장이 능하면 오만스럽게 잘난 체하는 표정을 지으니, 이와 같다면 비록 날마다 소ㆍ양ㆍ돼지를 쓰더라도 불효가 되는 것이다. 개나 말조차도 봉양함이 있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의금(衣衾)과 관곽(棺椁)을 제 능력보다 넘치게 마련하고자 하면서 아침저녁의 곡읍(哭泣)은 제 몸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장사를 지내려 할 때는 선영(先塋)을 버려 두고 널리 지사(地師.풍수)를 구하여 조금도 체백(體魄)을 안정시킬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단지 발복(發福)할 땅만 얻고자 한다. 훗날의 부귀가 이 산에 달려 있다고 생각되면, 비록 사람들이 엄히 금하는 자리라도 곧장 투매(偸埋)할 계책을 내었다가 관이 파내져 옮겨지는 환난을 자주 당한다. 이러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또 다른 곳을 엿보아 오래된 조상의 묘소마저 여러 번 옮기기까지 하니, 이는 비록 지사(地師)의 꾐에 빠진 때문이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차마 이렇게 하겠는가.
제사는 이미 제 살림살이에 맞춰 차리지 않고, 또 정갈히 재계하여 정성을 다하지도 않고서 오로지 남에게 잘 보이고 준여(餕餘.제사 음식)를 풍족히 나눠주고자 하여 도리에 어긋난 것을 함부로 구하며 동쪽 서쪽으로 거짓말로 속여 돈을 끌어오고, 조금이라도 꺼리는 일이 있으면 곧바로 제사를 폐하니, 이와 같은 제사라면 제사를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예로 섬기지 못했으면서 상장제례(喪葬祭禮)에만 성의를 다하는 것처럼 하여, 일을 갖추기 위해 구걸하여 빚을 많이 내어 한때의 차림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자 하고,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이 되면 비록 가난한 집이라도 소를 잡고 약과를 만들어 남들의 평판이 좋도록 힘쓴다. 세월이 훌쩍 흘러 곤궁이 더욱 심해지고 빚에 이자가 몇 곱절 불어 다 갚지 못하면 한 번 두 번 재촉당하다가 욕설이며 모욕이 죽은 자에까지 미치니, 이때가 되면 어버이를 위한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고인이 이르기를 “살아 계실 때를 미루어 죽은 이를 받들고, 사람 섬기는 도리를 미루어 귀신을 섬긴다.〔推生事死 推人事神〕”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산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죽은 이를 섬기겠는가.〔未能事生 安能事死〕”라고 하였다. 이는 산 사람을 섬기기를 오로지 남의 눈에 잘 보이려 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를 섬김도 오로지 남의 눈에 잘 보이려 하여, 드디어 그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외물이 남보다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걱정만 못하고, 어버이를 편히 모시려는 마음이 좋은 터를 얻어 훗날의 발복을 구하는 마음만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도도히 흘러온 폐단이 습속으로 굳어져 아무도 그것을 잘못이라 하지 않고 도리어 모두 본받으려 하니, 끝내 이와 같고 말 것인가, 아니면 한번 변해 도에 이를 날이 있을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 오과의 병폐〔五過之疵〕
〈여형(呂刑)〉에 “오과(五過)를 심리하는 옥관의 병폐는 관(官)과 반(反)과 내(內)와 화(貨)와 래(來)인데, 잘못 심리하면 그 죄가 똑같으니, 살펴서 잘 처리하라.〔五過之疵 惟官惟反惟內惟貨惟來 其罪惟均 其審克之〕”라고 하였는데, 관(官)은 위세(威勢)이고, 반(反)은 덕을 갚고 원한을 갚는 것이고, 내(內)는 여자의 청탁이고, 화(貨)는 뇌물이고, 래(來)는 간청이다.
다섯 가지 중에 위세와 뇌물이 심한데, 뇌물이 위세보다 더욱 심하므로 또 “옥사를 맡은 자는 위세를 부린 자에게만 법을 적용하지 말고, 뇌물을 준 부자에게도 끝까지 적용해야 한다.〔典獄 非訖于威 惟訖于富〕”라고 하였으니, 이는 부자(富者)에게 법을 적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말한 것이다. 주나라 목왕(穆王)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으므로 물정(物情)을 두루 알아서 세태를 자세히 말한 것이 이와 같다. 삼대(三代)에도 그러했는데 후세야 논해 무엇하겠는가.
천하의 병폐는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만일 이 다섯 가지 병폐가 없으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오늘날 송사를 심리하는 자들은 이 다섯 가지로만 마음속의 기준을 삼아 사실을 따져 보지도 않는다. 옥송(獄訟)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와 벼슬도 다 그러하다. 과거를 주관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자들은 권세가 있는 자는 두려워하고, 뇌물을 주는 자는 사랑하고, 부녀자의 청탁을 받으면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고, 간청을 받으면 안면에 구애되고, 덕을 입으면 갚기를 생각하고, 원한이 있으면 해치기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관(試官)과 정관(政官)이 정해지면 사람들은 곧 세력가가 힘을 썼다느니, 부자가 뇌물을 썼다느니, 아무개와 아무개는 고모의 자매의 조카간이라느니, 아무개와 아무개는 인척이고 붕당이라느니, 아무개와 아무개는 옛날의 은덕과 세의(世誼)가 있다느니, 아무개와 아무개는 묵은 원한이 있고 사이가 좋지 않다느니, 이번 과거에 아무개는 붙고 아무개는 떨어지며, 아무개는 장원(壯元)이 되고 아무개는 탐화(探花)가 될 것이라느니, 이번 인사에 아무개는 청요직이 되고 아무개는 수령이 되며 아무개는 내쫓길 것이라느니, 심지어 아무개는 아무 고을의 원이 되고 아무개는 아무 직책으로 옮기며 아무개는 통망(通望)할 것이고 아무개는 초사(初仕)를 할 것이라고 하는데, 착착 들어맞지 않음이 없다. 또 과거와 벼슬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친소(親疎)와 향배(向背), 시비(是非)와 훼예(毁譽)마저도 이 다섯 가지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다섯 가지 이외에 다시 어떤 의리가 있고 어떤 공론이 있겠는가.
혹시 하늘이 이 백성을 내고 이 세상을 길러 주면서 본래 이와 같이 부여해 주었는데, 성인이 특별히 가르침을 베풀어 인도하고 단속하기를 마치 하민(下民)에게 겸허히 물어 삼후(三后)에게 명하듯이 한 것인가.〔淸問下民 乃命三后〕 그렇다면 성인이 다시 나오기 전에는 혼란스럽게 뒤섞인 채 각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 또한 이치의 당연함이니, 개탄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순조 계유년 식년과〔當宁癸酉式年科〕
당저(當宁) 계유년(1813, 순조13) 식년과를 갑술년(1814) 봄으로 물려 시행하기로 하였다. 과거 기일에 앞서 각 도에 시관(試官)을 차송(差送)하였는데, 유영오(柳榮五)를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삼았다. 10여 일이 지나 비변사에서 초기(草記)를 올려 “유영오는 명경(明經) 출신입니다. 한 도의 시험을 관장하는 자리에 명경 출신을 앉힐 수 없으니, 다른 자를 선발하고 이를 살피지 않은 정관(政官)을 추고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옛날에는 시관의 후보에 명경 출신을 의망하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문장을 잘하는 자를 고르지 않고 오직 청탁과 아첨을 기준으로 삼아 문필을 관장하고 인재를 선발하는 자리를 공공연히 음식과 돈을 모으는 기회로 삼으니, 매번 재주 없고 수준 낮은 자들이 선발되는 폐단을 면치 못하였다. 시관이 되기를 구하는 자는 제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뽑아 주는 자도 신중을 기하지 않아 더러운 냄새가 진동하고 추악한 소문이 도로에 그득한데도 전최(殿最)에선 반드시 공정하였다고 평가하며, 정주(政注)에서도 등급을 넘어 발탁한다. 이것은 본래 타락한 습속이 이미 근래의 관례가 된 것이니, 오늘날의 정관(政官)이 어찌 세속을 초월한 식견이 있어서 세상에 없던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근본을 바로잡지 않고 말단을 책망하는 것은 그 또한 우활하다.
명경 출신이 시험을 관장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들에게 제술(製述)의 공부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른바 제술 문관(製述文官)이란 자들은 대부분 남의 글을 빌려 급제한 자들이므로 일상의 편지로 응대하는 법만 익혔을 뿐 어찌 과문(科文)의 규식과 요령을 알겠는가. 도리어 명경 출신이 그나마 경서를 송독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하니, 명경이라 하여 이들만 못하다고 한다면 어찌 억울하고 가소롭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시관을 한번 지내고 나면 대부분 온 세상의 비웃음을 면치 못하니, 이제 만약 제술이든 명경이든 막론하고 문장에 능한가, 능하지 못한가의 실상을 자세히 조사하여 시관에 임명하거나 내치면 좋을 것이다. 단지 명경이라서 안 된다고 한다면 명경 가운데 시관을 감당할 자가 없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또 명경 출신이 만일 약간의 공심(公心)을 지녔다면, 도리어 경(經)에 어두우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그저 뇌물만 받고 합격자를 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앞의 이야기는 반드시 어떤 자가 부정을 행하려 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대신에게 말을 한 것이리라. 아니면 유영오가 화교(和嶠)의 벽(癖)이 너무 심하고 동취(銅臭)가 멀리까지 퍼진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지난날 과거가 있을 때마다 문제 삼지 않다가 이제 와서 더더구나 10여 일이나 지난 후에야 이런 말을 하였겠는가. 나는 유영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유영오 한 사람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다만 명경과 제술이란 명칭이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 전후의 행실이 딴판인 사람〔兩截人〕
예양(豫讓)은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에게는 개돼지처럼 행동하다가 지백(智伯)에게는 절개를 지켜 충성을 다했고,배구(裴矩)는 수(隋)나라 때에는 아첨을 하다가 당(唐)나라에서는 충성을 다했고,가후(贾诩)는 각(傕)과 사(汜)의 모주(謀主)가 되어 제실(帝室)을 어지럽힌 것이 왕위(王偉)가 후경(侯景)을 돕던 것처럼 하다가 위(魏)나라에 들어와서는 공명을 세워 생을 마쳤으며,위징(魏徵)은 이밀(李密)의 기실 참군(記室參軍)과 두건덕(竇建德)의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된 것이 마치 풍도(馮道)가 아침에 당나라를 섬기다가 저녁에 진(晉)나라를 섬긴 것과 같았다. 그러나 당나라를 섬길 때에는 충직을 다하여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는 모두 앞뒤의 행실이 딴판인 사람들이다.
이것이 임금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신하는 제 몸을 돌보지 않고서 단지 임금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지조를 바꾸어야 하는 것인가. 어진 임금이 등용하면 사악한 자들이 모두 변화하여 충선(忠善)한 자가 되는 것인가. 훗날의 선행이 전날의 악행을 속죄할 수 있다면 선비는 처음의 출처는 논하지 말고 단지 끝의 행적만 보아야 하는가. 사람이 모두 임금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여겨 못할 짓이 없다가 밝은 임금을 만나면 이에 명신(名臣)이 되는 것인가.
임금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마땅히 아첨하는 자, 임금을 잊은 자, 여러 왕조를 섬긴 자를 따지지 않고 나의 신하가 된다면 모두 충성을 다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그 사람이 평소의 행실을 모두 바꿀 줄을 미리 알아서 갑자기 국사(國士)로 대우할 수 있겠는가. 남의 아내를 유혹한 자가 나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를 취하면서 장차 그 여자가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의 능욕을 꾸짖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가. 남의 말을 사는 자가 사람을 차고 깨물어 상하게 한 말을 구하면서 장차 그 말이 나에게 와서 순하게 길들여지리라 바랄 수 있는가. 주 무왕(周武王)이 만약 숭호(崇虎)와 비중(費仲)을 썼다면 주나라의 충신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으며, 한 고조(漢高祖)가 만약 정공(丁公)과 조무상(曹無傷)을 썼다면 한나라 열사(烈士)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임금은 재주에 따라 신하를 등용해야 하고 그의 옳지 못함을 본 연후에 배척하며, 신하는 마땅히 먼저 출처를 바르게 해야 하니, 큰 절개를 잃었다면 훗날 비록 볼만한 행실이 있더라도 어찌 지난날을 속죄할 수 있겠는가.
● 성씨의 변천〔姓氏變改〕
성(姓)이란 조상이 나온 곳의 혈통을 잇는 것이고, 씨(氏)란 자손이 분파된 곳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세계(世系)를 고찰하고 종족(宗族)을 증명한다.
이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귀한 종족이 되기를 사모하지만 성이 드물고 궁벽하더라도 바꿀 수 없고, 사람은 누구나 어진 조상이 있음을 좋아하지만 조상이 유(幽)ㆍ려(厲)와 같은 악씨(惡氏)이더라도 고칠 수 없다. 이는 키의 장단(長短)과 용모의 연치(姸媸)가 태어날 때 한번 정해진 것과 같고,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이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데 후세에는 해괴하고 가소로운 일이 많아서 제 성을 버리고 제 성이 아닌 것을 성으로 삼기도 하고, 제 조상을 숨기고 제 조상이 아닌 사람을 조상으로 삼기도 하고, 제 족속을 저버리고 제 족속이 아닌 것을 족속으로 삼기도 한다.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人倫)을 파괴하면서도 스스로 영예롭게 여기고 도리어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됨을 알지 못하며, 스스로 지혜롭게 여겨 도리어 고치기 어려운 어리석음이 되는 줄 알지 못하니,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그 처음의 성과 조상을 보존할 수 있는 자가 드물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세기(世紀)에 이제(二帝)ㆍ삼왕(三王)ㆍ진(秦)ㆍ한(漢)이 모두 황제(黃帝)를 조상으로 삼아 그 전수된 세대가 뒤집히고 잘못되었으니, 실로 역사를 그르친 원조가 된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서로 답습하여 제멋대로 속였고, 명성을 사모하는 무식한 부류들이 대부분 먼 조상으로 인정하여 성명을 바꾸었다. 이를테면 삼하왕(三河王) 여광(呂光)이 여망(呂望)을 높여 시조(始祖)로 삼아 불천지묘(不遷之廟)를 세운 것과 같은 경우이다. 당나라 때는 고요(臯陶) 이하의 사람을 모두 명호(名號)와 작위(爵位)를 추존하여 심지어 “상어대부주가 노담을 낳았다.〔上御大夫周生老聃〕”라고까지 하였고, 오대(五代) 때의 곽숭도(郭崇韜)는 곽자의(郭子義)의 묘에 배례하는 등 혼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적(夷狄)의 경우엔 스스로 비루함을 부끄러워하며 늘 중화를 사모하는 마음을 품었으므로 거짓으로 속임이 더욱 심하다. 《위사(魏史)》에서 탁발씨(拓拔氏)에 대해 “북인들이 흙을 탁(拓)이라 하고, 임금을 발(拔)이라 한다.”라고 하고, 또 “하늘을 쪼개고 나왔고, 땅에서 솟아나 자랐다.”라고 하였다. 가한(可汗) 모(毛)로부터 12대를 전하였으니, 즉 대(貸), 관(觀), 루(樓), 월(越), 추인(推寅), 리(利), 사(俟), 사(肆), 기(機), 개(蓋), 쾌(儈), 린(隣)을 거쳐 힐분(詰汾)에까지 이르렀다. 12대는 모두 한 글자로 이름을 삼았고 추인(推寅)만이 두 글자로 이름을 삼았으니, 모두 사신(史臣)이 나중에 붙여준 것이다.
후경(侯景)과 이지고(李知誥)는 유래가 자세치 않아서 신하로 하여금 그 명호와 지위를 추후에 제정하게 하였는데, 이지고의 증조 이상은 의조(義祖)의 선대를 취하였다. 주온(朱溫)은 주호(朱虎)를 시조로 삼았다. 이사원(李嗣源),석경당(石敬瑭),유지원(劉知遠)은 모두 사타(沙陀 돌궐족의 일종) 출신이다. 이사원은 바로 막길렬(邈佶烈)로서 성씨가 없는데, 그의 고조 이하는 이름이 모두 고상하다. 석경당은 위(衛)나라 석작(石碏)을 시조로 삼았고, 유지원은 한나라 명제(明帝)의 아들 병(昞)을 시조로 삼았는데, 모두 자기 뜻대로 제 조상을 삼고 이름을 만들었으니, 매우 무도하다.
옛사람들은 성을 바꾸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니, 예컨대 진완(陳完)이 전(田)씨로 바꾸고,정청(鄭靑)이 위(衛)씨로 칭하고,범수(范雎)가 장(張)씨로 고치고,전천추(田千秋)가 차(車)씨로 고치고,소석(疎晳)이 속(束)씨로 고치고,해강(奚康)이 혜(嵇)씨로 고친 등의 경우가 매우 많았으므로 족보와 전기도 모두 근거가 없다.
장구령(張九齡)과 장열(張說)은 매우 친애하고 존중하였으므로 함께 족보를 만들었고,황정견(黃庭堅)과 황악(黃渥)은 족보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형제로서 종족을 합쳤으며,두정륜(杜正倫)은 성남(城南)의 두씨들과 족보를 같이하자고 요구하였다가 허락받지 못하였다.공지(孔至)가 《백가의례(百家疑例)》를 편찬하면서 장열(張說)이 근세의 신족(新族)이라 하여 삭제하였는데, 장열의 아들 장게(張垍)가 노하여 “천하의 족성(族姓)이 너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리 함부로 뜯어고치는가.”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지우(摯虞)가 《족성소목(族姓昭穆)》 10권을 지었다가 사도(司徒)에게 탄핵을 당하였다. 때로는 요요화주(遙遙華胄)로서 관직을 구하는 수단을 삼고, 때로는 묘소의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팔아서 매혼(賣婚)의 기롱을 받기도 하였다.거처를 족성(族姓)으로 삼아 북곽(北郭)이니 동문(東門)이니 처지에 따라 불렀고, 지리지에서 성씨를 취하여 삼오(三烏)니 오록(五鹿)이니 상황에 따라 호칭을 삼았으니, 이는 고금의 공통된 병폐이다.
우리나라는 예의로 풍속을 이루어 거의 이런 폐단이 없었는데, 근세 이래로 점차 허위가 많아져 씨족보첩(氏族譜牒)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진실을 잃었다. 빈궁하고 행실이 좋지 못한 자가 늘 족보를 편수(編修)하는 일로 명분을 삼아 농간과 조작을 일삼은 예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서얼(庶孼)로서 제 본분을 편히 여기지 않고 그 호칭을 부끄러워하던 자들은 모두 서(庶) 자를 빼버리고, 벽성(僻姓)과 고족(孤族)으로 벌열에 끼지 못하는 자와 내력이 불분명한 자들도 후손이 없는 자의 뒤에 이어 붙여 뇌물이 낭자하고 계략이 교활하다. 어미가 있는데도 어미가 없어지고, 적손이 있는데도 적손이 없어지고, 후손이 없는데도 후손이 생기고, 조상이 없는데도 조상이 생기니, 뒤섞이고 혼탁하여 세상의 기롱과 비웃음을 받는다. 이는 비록 스스로 지난날의 행적을 버리고 새로운 종족을 도모하기를 좋아한 것이지만, 천년의 역사를 왜곡하고 온 세상을 속인 것이니, 윤기(倫紀)를 어지럽히고 명분(名分)을 어그러뜨린 죄를 어찌하겠는가.
● 상앙이 법을 만들다〔商鞅作法〕
상앙(商鞅)이 법을 만들면서 증명서가 없는 사람을 유숙시킨 자도 연좌시켰는데, 나중에 상앙이 망명할 때에 객사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 없어서 “법을 만들어 스스로 해를 당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탄식하였다.
유의(劉毅)가 패전하여 밤에 우목사(牛牧寺)에 투숙하려 하니, 절의 중이 거절하면서 “예전에 선사(先師)께서 환위(桓蔚)를 들였다가 유 위군(劉衛軍)에게 피살당하였으니, 지금 수상한 사람을 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노다손(盧多遜)이 애주(崖州)에 유배되었는데 여관에서 어떤 노파가 말하기를 “노승상이 내 자식에게 어떤 일을 시켰는데, 자식이 그 뜻에 따르지 않자 온 집안을 남쪽으로 귀양 보내어 친족들은 죽고 늙은 나는 산골짜기를 떠돌게 되었소. 노승상은 어진 이를 시기하고 세력을 믿다가 지금 남쪽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니, 내가 죽기 전에 혹 만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소.”라고 하였다.
소철(蘇轍)이 뇌주(雷州)로 귀양 갔을 때 민가를 빌려 살게 되었다. 그러자 장돈(章惇)이 민가를 강탈하였다고 생각하여 고을에 알려 그 백성을 추궁하였더니, 빌려준 문서가 명백하여 더 추궁하지 못하였다. 후에 장돈이 뇌주로 귀양 가게 되어 거처할 민가를 물색하니, 그 백성이 “전에 소공(蘇公)이 왔을 때 장돈 승상 때문에 우리 집이 거의 망할 뻔하였으므로 지금 빌려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정위(丁謂)가 구준(寇準)을 참소하였을 때, 정위와 풍증(馮拯)이 중서성(中書省)에 있으면서 처음에 구준을 애주(崖州)로 귀양 보내려 하다가 정위가 갑자기 의심이 들어 “애주는 두 번씩이나 큰 파도를 건너야 하니 어떻겠소?”라고 물으니, 풍증이 예예라고만 대답하기에 뇌주로 귀양지를 정하였다. 정위가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풍증이 드디어 애주로 귀양지를 정하니, 호사가들이 “만약 뇌주에서 구사호(寇司戶.구준)를 만났다면, 인생 어디선들 서로 만나지 않을쏜가.〔若遇雷州寇司戶 人生何處不相逢〕”라고 말들을 하였다.
채확(蔡確)이 〈거개정시(車蓋亭詩)〉로 인해 멀리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데, 여급공(呂汲公 여대방(呂大防))이 좌상(左相)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변호의 말도 하지 못하고, 범순인(范純仁)이 채확의 죄를 경감시켜 달라고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범순인이 여대방에게 “이 길이 가시밭길이 된 지가 이미 칠팔십 년인데, 우리가 열어 놓았으므로 아마 스스로 면치 못할 듯하오.”라고 하고서 이윽고 정치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천도(天道)는 신명해서 한 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것이 마치 술잔을 서로 돌리듯 하니, 범공(范公)으로 말하면 이런 이치를 잘 알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끝내 영주(永州)의 귀양길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총애와 지위의 성대함을 믿어서 스스로 남의 생사와 화복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자신의 잘못을 논하거나 주장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사지(死地)에 몰아넣어 제 욕심을 통쾌하게 풀지만, 자기도 언젠가는 죄를 얻어 사지를 모면하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천고(千古)가 매한가지여서 앞뒤로 이런 사례가 이어지니 애달플 뿐이다.
● 우십문과 소무〔于什門與蘇武〕
위(魏)나라 우십문(于什門)이 연(燕)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연나라 임금 풍발(馮跋)이 절을 하라고 핍박하며 목을 눌러도 굽히지 않으니, 풍발이 노하여 억류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의관이 해지고 서캐와 이가 들끓으니, 풍발이 의관을 보내 주었는데도 받지 않았다. 연나라에 억류된 지 21년 만에 돌려보내자 위주(魏主)가 책문을 지어 종묘에 고하였으니, 이는 소무(蘇武)가 돌아왔을 적에 태뢰(太牢)로써 무릉(茂陵.한 무제의 능)에 배알하게 한 것과 같이하기 위함이었다. 위(魏)나라 임금 조방(曺芳)이 폐위되자, 범찬(范粲)은 타던 수레에서 기거하며 발로는 땅을 밟지 않고 36년 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끝내 수레의 침소에서 죽으니, 문문산(文文山)에 비해 더욱 어려운 일로써 아마 고금을 통틀어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후인들은 19년간 충절을 지킨 소무만 알 뿐 우십문이 있는 줄 모르고, 3년간 누각을 내려오지 않은 문천상만 알고 범찬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은 어째서인가. 혹시 소무와 문문산은 한송(漢宋)을 섬기고, 우십문과 범찬은 양위(兩魏)를 섬겼기 때문인가. 신하가 임금을 위해 절개를 지킨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처한 나라와 임금을 따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로 인해 더욱 한탄스러운 일이 있다. 소무의 관속(官屬) 중에는 이미 항복하거나 죽은 자가 있어 소무를 따라 돌아온 자는 아홉 사람인데, 모두가 자경(子卿.소무의 字)과 같은 인물들이다. 상혜(常惠)ㆍ서성(徐聖)ㆍ조종근(趙終根)은 모두 중랑(中郞)에 제수되었으나 나머지 여섯 사람은 역사서에 이름조차 오르지 않았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예로부터 수립한 공적이 동일한데도 드러나고 묻힌 차이가 생기기도 하고, 뜻과 사업이 같으면서도 승진되고 침체되는 다름이 있기도 하고, 거짓으로 꾸민 자가 함부로 공신에 끼기도 하고 정당한 자가 도리어 묻히기도 하며, 용렬한 자가 표창을 받고 뛰어난 자가 도리어 버려지기도 한다. 묻히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터무니없는 죄로 멸시를 당하기도 하고, 버려지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억울한 누명으로 죄에 빠지기도 하였다. 영웅과 준걸이 큰 포부를 펴지 못하고, 고상한 사람과 절개 있는 선비가 세상에 묻혀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어찌 한량이 있으리오만 어느 세대의 누구인지 전해지지 않았으니, 또 어찌 더욱 애석하지 않겠는가.
저 〈겸가(蒹葭)〉 시에 “이른바 저 사람〔所謂伊人〕”, 〈백구(白駒)〉 시에서 “그 사람이 옥과 같네〔其人如玉〕”,숙손통(叔孫通)을 비웃은 노나라 양생(兩生),공승(龔勝)을 위해 곡했던 초나라 노부(老父)는 서적 속에서 그림자나마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으니, 그 또한 다행이라 하겠다. 아, 슬프다.
● 고인들은 사사로운 일로 공도를 해치지 않았다〔古人不以私害公〕
양(梁)나라 관군 장군(冠軍將軍) 여승진(呂僧珍)은 그 선조가 파 장사를 생업으로 삼았다. 조카가 가업을 버리고 관직을 구하자, 여승진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너에게 정해진 분수가 있는데, 어찌 함부로 다른 것을 구하느냐. 속히 파 가게로 돌아가라.”라고 하였다.후주(後周) 주행봉(周行逢)의 사위 당덕(唐德)이 보리(補吏)가 되기를 구하자, 주행봉이 말하기를 “네 재주로는 관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만약 네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내가 감히 법을 어겨서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밭 가는 소와 농기구를 주어 돌려보냈다.
진(秦)나라 왕맹(王猛)이 아들 왕피(王皮)를 부탁하면서 열 마리의 소를 주어 농사 밑천을 삼아 주도록 유언하였다. 진(晉)나라 유홍(劉弘)이 형주 자사(荊州刺史)가 되었을 때, 유홍의 사위인 하후척(夏侯陟)을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삼으라는 조서가 내렸다. 유홍은 “천하를 통솔하는 사람은 천하와 한마음이어야 되니, 만약 반드시 인척인 뒤에야 등용할 수 있다면 형주의 열 고을에 어찌 열 명의 사위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피초(皮初)의 공훈을 상주하여 양양 태수에 보임하였으니, 옛사람들이 사욕으로 공도를 해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식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고 좋은 옷과 음식만을 제공하여 그 지기(志氣)를 교만하게 만들고, 그가 자라나서 숙맥(菽麥)도 분간하지 못하도록 어리석고, 행실이 선비 축에 끼지 못하며, 문장은 어로(魚魯)를 구분하지 못하더라도 자식ㆍ사위ㆍ친인척을 막론하고 그를 위해 청탁하고 뇌물을 써서 과거에 장원을 도모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해 준다. 외직으로 풍족한 고을과 큰 번진(藩鎭), 내직으로는 청요직과 녹봉이 많은 자리를 마련해 주어 오직 좋은 관직을 두루 거치지 못할까, 권세가 높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옛날의 도리와 비교해 보면 비록 부끄러워할 줄은 모른다 하더라도 천리를 어기는 짓이니, 어찌 훗날의 재앙이 없겠는가.
● 훈계는 받아들일 자가 아니면 베풀 수 없다〔訓戒不可施於非其人〕
송(宋)나라 무제(武帝)는 미천할 때에 쓰던 농기구를 간직하였다가 자손에게 보였고, 또 일찍이 신주(新洲)에서 갈대를 벨 때 장황후(臧皇后)가 만들어 준 베적삼이 있었는데, 귀하게 된 뒤에 회계공주(會稽公主)에게 맡기면서 “후손들 중에 교만과 사치에 빠진 자가 있으면 이것을 보여라.”라고 하였다.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태자 용(勇)에게 저장(葅醬) 한 그릇을 하사하면서 “네가 상사(上士)로 벼슬할 때 늘 먹던 것이다. 만약 지난날을 기억한다면 당연히 나의 뜻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남송 문제는 그 적삼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낯빛을 지었고, 효무제(孝武帝)는 칡 등롱(燈籠)과 마승불(麻蠅拂)을 보고서 “시골 영감이 이런 것을 얻은 것은 이미 과분하다.”라고 하였으며, 태자 용(勇)은 교만과 사치를 부리다 총애를 잃어 폐위되었다.
선조들이 자손을 위한 마음은 필시 옛날 물건을 보고서 지난날을 생각하고, 부귀에 처하여 빈천하던 때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전해 온 가풍(家風)을 준수하고 조상이 세운 전통을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란 것인데, 자손 된 자들은 선조의 간절한 염려를 체득한 자가 드물고 도리어 부모를 욕하며 업신여기는 습속이 대부분이니, 훈계란 것이 받아들일 자가 아니면 베풀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조상이 훈계를 남겼으나 태강(太康)처럼 그 덕을 멸한다면 어찌하겠는가.
● 한 고조가 노나라를 지나면서 태뢰로써 공자께 제사를 올리다〔漢高帝過魯以太牢祀孔子〕
한(漢)나라 고제(高帝)가 노(魯)나라를 지나면서 태뢰(太牢)로써 공자(孔子)께 제사를 올렸고, 그 뒤로 제왕들이 노나라에 가서 공자께 제사를 올린 일이 많았다. 위(魏)나라 문제(文帝)는 노(魯)에 영을 내려 공자구묘(孔子舊廟)를 수리하고 100호(戶)와 이졸(吏卒)을 두어 수위(守衛)케 하였다. 진(晉)나라 무제(武帝)는 태학(太學) 및 노국(魯國)에 조서를 내려서 철마다 삼생(三牲)을 갖추어 공자께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원위(元魏 북위) 때에는 공자를 중서성(中書省)에서 제사 지냈고, 양 무제(梁武帝)는 처음으로 공자의 사당을 세웠으니, 바로 주현(州縣)에 공자 사당을 세운 시초이다.
당나라 무덕(武德) 연간에 태학(太學)에 석전(釋奠)을 올리고, 주공(周公)을 선성(先聖)으로 삼고 공자를 배향하였다. 정관(貞觀) 10년(636)에 방현령(房玄齡)이 주공에 대한 제사를 정지하고, 공자를 선성으로 삼고 안자(顔子)를 배향하기를 건의하였다. 개원(開元) 27년(739)에 공자를 추시(追謚)하여 문선왕(文宣王)으로 삼고, 석전에 궁현(宮懸)을 쓰고, 공자의 제자들에게는 공ㆍ후ㆍ백(公侯伯)을 각각 추증하였다. 송나라 주자(朱子)가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세우고 제생(諸生)을 이끌고서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석채례(舍菜禮)를 행하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심의(深衣)와 방리(方履) 차림으로 선성께 참배하였으니, 이는 의기(義起)의 예로써 한 것이다.
원 무종(元武宗) 때에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칭호를 추가하였는데 지금까지 그것을 따르고 있다. 이미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라고 불렀으니 성인을 존숭함이 극진하였으므로 시대마다 따르면서 다른 말이 없었는데, 당 현종(唐玄宗) 때에 이르러 왕호(王號)를 추가하였고, 원나라 때는 또 대성지성(大成至聖) 네 자를 추가하여 마치 후세에서 제왕에게 휘호(徽號)를 올리듯이 하였으니, 어찌 꼭 이렇게 한 후에야 성인을 극진히 존숭하는 것이겠는가. 주자가 말하지 않은 것인데, 후세에서 도리어 이처럼 존호(尊號)를 더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일찍이 명나라 사람의 잡기(雜記)를 보니 “천지와 일월이 모두 존칭(尊稱)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또 원나라 황제가 정한 칭호를 따라 쓰면서 드디어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칭호로 삼으니,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 최호의 행적〔崔浩行跡〕
최호(崔浩)는 처음에 노장(老莊)의 서적을 신뢰하지 않아 혹세무민의 학설이라고 여겼고, 또 불법(佛法)을 배척하며 “어찌 이런 오랑캐의 신을 섬기겠는가.”라고 하여 정직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근신들의 비방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거처하면서 도사(道士)를 섬겼다. 구겸지(寇謙之)가 《과계(科戒)》를 받고, 이보문(李譜文)에게서 《도록진경(圖籙眞經)》을 받아 ‘보좌북방태평진군(輔佐北方太平眞君)’이라 주장하자, 최호는 황제에게 “성왕(聖王)이 명을 받을 때 반드시 하늘의 감응이 있는데 하도낙서(河圖洛書)는 충수(蟲獸)의 글자에 말을 붙인 것이니, 오늘날처럼 인신(人神)을 마주 대하고 필적이 찬연한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위주(魏主)에게 천사도장(天師道場)을 세우고 친히 도록(圖籙)을 받도록 권하였으니, 바로 후세의 여용지(呂用之)와 임영소(林靈素)의 소행과 같았다. 나중에 민담(閔湛)과 치표(郗標)의 말을 듣고 삭로(索虜)의 선대 일을 자세히 써서 네거리에 돌을 세웠다가 스스로 종족이 멸절되는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최호의 평생 행적을 더듬어보면 언행을 종잡을 수 없고, 신과 인간을 속여서 임금에게 아첨하고 하늘에 죄를 지었으므로 정직하다는 명성을 구하다가 도리어 화를 당하였으니, 이 또한 하늘이 그의 넋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이를 만하다.
《북사(北史)》에는 “그의 처 곽씨(郭氏)가 읽던 불전(佛典)을 빼앗아 태우고 그 재를 측간에 버렸는데, 뒤에 죄를 얻어 성남(城南)으로 호송될 때 위사(衛士)들이 마차 위에서 일제히 오줌을 갈기니, 최호의 부르짖는 소리가 길 가는 사람에게까지 들리므로 사람들이 그 보응(報應)을 받았다고 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부처의 영험함을 신비롭게 꾸며낸 이야기이다. 만약 보응(報應)으로 말하자면 최호의 재앙은 바로 천리(天理)의 보응이지 부처의 보응이 아니다.
● 충신이 임금께 간하는 다섯 가지 의의〔忠臣諫君有五義〕
충신이 임금을 간하는 데 다섯 가지 의의가 있어서 첫째가 휼간(譎諫), 둘째가 당간(戇諫), 셋째가 항간(降諫), 넷째가 직간(直諫), 다섯째가 풍간(諷諫)인데, 공자께서 “나는 풍간을 따르겠다” 하셨으니, 그렇다면 임금을 간하는 의의를 알 만하다.
고필(古弼)이 어떤 일을 아뢸 때, 위주(魏主.위나라 세조)는 한창 유수(劉樹)와 바둑을 두면서 고필에게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필이 한참을 모시고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나 유수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귀와 등을 후려치면서 “조정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은 실상 네놈의 죄로구나.”라고 하자, 위주가 낯빛을 고치고 바둑을 멈추고서 즉시 그가 주달하는 말을 옳다고 하였다. 고필이 공거(公車)에 나아가 대죄하자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사(社)를 쌓는 일에 힘을 다해 쌓고서 현단복에 면류관을 쓰고 섬기면 신이 복을 내린다고 하였으니, 관을 쓰고 신발을 신고 직무를 수행하라.”라고 하였다.
남당(南唐)의 태제(太弟) 경수(景遂)가 궁료(宮僚)들과 잔치를 할 적에 장이(張易)가 간언을 올렸는데, 경수가 막 손님들과 옥술잔을 돌려가며 구경하느라 돌아보지 않았다. 장이가 노하여 “전하께서는 보배를 중히 여기고 선비를 경시하십니다.”라고 하며 옥술잔을 들어 땅에 던져 깨뜨렸다. 모든 이들이 놀랐으나 경수는 매무새를 고치고서 사과하였고 장이를 더욱 돈독히 대하였다.
고필과 장이는 직간을 하였다고 이를 수 있으나, 당시 임금의 용납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반드시 대불경(大不敬)의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위 문후(魏文侯)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내가 말을 하면 어기는 사람을 볼 수 없다.”라고 하자, 악사 경(經)이 거문고를 잡고 위 문후를 쳐서 면류관의 수술을 깨뜨렸다. 경이 말하기를 “요순(堯舜)은 말을 하면 남들이 어기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걸주(桀紂)는 남들이 말을 어길까 두려워했으니, 신은 걸주를 친 것이지, 우리 임금을 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위 문후는 면류관을 고치지 않았고, 거문고를 성문에 매달아 경계로 삼았다.
진 평공(晉平公)이 합당치 않은 말을 하자 악사 광(曠)이 거문고를 들어 후려치다가 옷깃을 밟고 미끄러져 궁벽을 쳤다. 신하들이 벽을 바르려 하자 진 평공은 “놔두어라. 이것으로 과인의 실수를 경계하리라.”라고 하였다.
두 임금이 간언을 용납하여 신하의 충직을 드러낸 덕은 성대하다. 그런데 두 악사는 교훈이 되지 못할 듯하다. 임금이 허물이 있으면 신하가 간하는 것은 당연한 직분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눈물을 떨구며 머리를 조아린 자도 있었고, 어전(御殿)의 난간을 부러뜨리고 임금의 옷자락을 당긴 자도 있었으니, 모두 충성스런 마음에서 나와서 임금을 감동시켜 만류코자 했을 뿐이지, 어찌 직접 임금을 후려치고서 걸주를 친 것이라고 스스로 말한 경우가 있었는가. 걸주 때에 용방(龍逄)과 비간(比干)은 간언을 하다 죽임을 당했지, 임금을 후려치면서 간언했다고는 듣지 못했다. 비록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먼저 임금을 섬기는 예를 잃었으니, 어떻게 임금의 잘못을 간할 수 있겠는가.
두궤(杜蕢)가 잔을 든 것과 여회(呂誨)가 질병으로 비유한 것은 거의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더 좋은 예가 있으니, 맹자는 “사람의 잘잘못을 모두 허물할 수 없고, 정치의 잘잘못을 비난할 것이 없다.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군주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한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면 온 나라가 안정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왕(齊王)을 세 번 만나고도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간하지 않은 것으로 간한 것이다.
● 송나라 심경지〔宋沈慶之〕
사람의 수치 중에 먼저는 정결하였다 나중에 더러워지는 것만 한 것이 없고, 또 남을 기롱하였다가 제 스스로 답습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이 두 가지를 겸한 자가 송(宋)나라 심경지(沈慶之)이다. 당시에 하상지(何尙之)가 벼슬에서 물러나 녹비관(鹿皮冠)을 쓰고 지내다가 다시 기용되자, 심경지는 “오늘은 어찌 녹비관을 쓰지 않았소?”라고 기롱하였다. 후에 심경지가 시흥공(始興公)이 되어 집에 거처하는데 임금이 하상지를 시켜 다시 조정에 나오게 권하자, 심경지가 웃으며 “심공은 하공처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본받지 않소.”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앞서 심경지는 네 채의 집이 있었는데, 하룻저녁에 자손과 친척을 거느리고 누호(婁湖)로 옮겨 가면서 네 채의 집을 관아에 바치고, 여유롭고 일없이 지내면서 조정의 하례가 아니면 문을 나서지 않았으니, 삼가고 조심하기를 잘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80세가 되자 재차 혼란한 세상에 나가서 유원경(柳元景)과 안사백(顔師伯)의 모반을 적발하여 강하왕(江夏王) 의공(義恭)을 죽이고 제 몸도 보전하지 못했으니, 삼가고 조심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창두공(蒼頭公)이 호피모(狐皮帽)를 쓰고서 남의 녹비관을 비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운명이 이와 같이 정해져서 끝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세상에서 남에게 한번 지적을 당하면 곧장 관직을 벗고 시골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하다가 끝내는 다시 전날의 모양으로 되돌아오는 자가 매우 많은데, 만약 이런 자들에게 심경지의 사적을 들려준다면 그들도 필시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 남녀의 욕망〔男女之慾〕
남녀는 사람의 큰 욕망이 걸려 있으므로 만약 구별과 예절이 없다면 방탕하여 행실에 절제가 없고, 재주가 뛰어나고 간교한 자들은 반드시 음탕하여 종족을 어지럽히는 데 이르렀으니, 이것이 성인이 7세에 자리를 함께하지 않도록 하고,구별이 없고 의리가 없는 것을 금수의 도리로 여긴 까닭이다.
예로부터 중구(中冓)의 추잡함은 여러 기록에 실려 있다. 예컨대 성맹자(聲孟子)와 경극(慶克),연 문후(燕文后)와 소진(蘇秦), 진(秦) 선 태후(宣太后)와 의거왕(義渠王),장양후(莊襄后)와 노애(嫪毐), 한(漢)나라 여후(呂后)와 심이기(審食其),관도공주(館陶公主)와 동언(董偃),조비연(趙飛燕)과 적봉(赤鳳),두 태후(竇太后)와 도향후(都鄕侯) 창(暢),진(晉)나라 가남풍(賈南風)과 정거(程據),전진(前秦)의 구 태후(苟太后)와 이위(李威),제(齊)나라 하비(何妃)와 양민(楊珉),양(梁)나라 서비(徐妃)와 기계강(曁季江),위(魏)나라 고후(高后)와 양백화(楊白華),호후(胡后)와 정엄(鄭儼),풍 태후(馮太后)와 이혁(李弈),북제(北齊) 호후(胡后)와 화사개(和士開),당(唐)나라 무후(武后)와 설회의(薛懷義),위후(韋后)와 무삼사(武三思),양태진(楊太眞)과 안녹산(安祿山) 등등이 모두 남녀의 욕망과 금수의 도리에서 연유하였다.
그리고 《시경》의 〈장자(墻茨)〉, 〈순분(鶉奔)〉, 〈폐구(敝笱)〉, 〈신대(新臺)〉 등의 편과 역사서에서 진(晉)나라 진영(辰嬴)이 두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 것,초 평왕(楚平王)이 태자 건(建)의 아내를 취한 것,제 환공(齊桓公)의 고자매(姑姊妹 고모) 중에 시집가지 않은 자가 7인이란 것, 한 혜제(漢惠帝)의 장후(張后), 오주(吳主) 휴(休)의 주후(朱后),위주(魏主) 비(丕)가 한나라 황제의 두 딸을 맞아 자녀(姊女)를 삼고, 또 위 무제(魏武帝)의 궁인(宮人)을 취하여 자신을 모시게 한 것,당 태종(唐太宗)이 소자왕비(巢刺王妃)를 맞아들인 것,고종(高宗)이 태종의 재인(才人) 무씨(武氏)를 세운 것,현종(玄宗)이 수왕(壽王)의 비(妃)를 아내로 맞았던 등등의 일은 모두 윤리를 어그러뜨린 것이 윗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또 송 효무(宋孝武), 위 효무(魏孝武), 고양(高洋), 양광(楊廣), 주온(朱溫) 등은 더욱 말할 수조차 없는데, 이것도 모두 남녀의 욕망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위 문명(魏文明) 풍후(馮后)가 환자(宦者) 부승조(苻承祖)를 총애하고,효문(孝文) 풍후(馮后)가 환자(宦者) 고보살(高菩薩)을 가까이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남색(男色)이다. 안릉(安陵), 용양(龍陽), 상퇴(向魋), 미자하(彌子瑕), 등통(鄧通), 동현(董賢), 임인우(林仁遇), 진자고(陳子高)와 같은 자들이 전책(傳冊)의 영행편(佞幸篇)에 드러났고, 역사에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임금의 존귀함으로 3천의 후궁을 거느리고 또 천하에 아름다운 여인이 많거늘, 하필 완동(頑童)을 가까이한 연후에 마음에 통쾌하겠는가. 역사서에 “함녕(咸寧), 태강(太康) 이후로 남총(男寵 남색)이 크게 유행하여 여색(女色)보다 심하니 이를 숭상하지 않는 사대부가 없고, 온 천하가 본받아 심지어 부부마저 떨어져 지낸다.”라고 하였다. 심약(沈約)의 참회문(懺悔文)에 “기수(淇水)의 상궁(上宮)은 참으로 별것 아니지만, 복숭아를 나누고 소매를 끊은 것은 또한 죄가 많다고 하리라.〔淇水上宮 誠云無幾 分桃斷袖 亦足稱多〕”라고 하였고, 도곡(陶糓)의 《청이록(淸異錄)》에서는 “서울 남자들이 제 몸을 팔면서 맞고 보내는 것이 태연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이런 풍조가 당송(唐宋) 시대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 괴이하다. 혹시 천하만사에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 이런 것인가.
● 노여움은 사랑에서 생긴다〔怒生於愛〕
사람은 제 자식의 악(惡)을 모르니, 사랑에 빠져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자식의 악을 알게 되면 사랑이 노여움으로 변하니, 실상 노여움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자식을 사랑하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자식의 교만과 방자함을 길러 주게 되고, 악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마음이 몹시 상하게 되면 노여워한다. 그러므로 《서경》에 “자식이 그 아버지의 일을 공경히 하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면, 아버지는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子弗祗服厥父事 大傷厥考心 于父不能字厥子 乃疾厥子〕”라고 하였으니, 미움이란 사랑의 반대이고 사랑이란 미움의 근본이다.
석호(石虎)의 태자 석수(石邃)와 석선(石宣)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자, 석호가 “나는 정갈한 재 세 섬으로 내 창자를 씻어내고 싶다. 어찌 모두 악자(惡子)만 낳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유 태후(劉太后)가 병이 위독할 때 사람을 보내 폐제(廢帝) 유자업(劉子業)을 불렀더니, 유자업이 “병자 근처엔 귀신이 많으니 어찌 갈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태후가 노하여 모시는 자에게 “칼을 가져다 내 배를 갈라라. 어찌 이런 자식을 낳았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뜻이 비슷하여 몹시 애통하다. 그러나 근본을 탐구하면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으며, 배를 가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희학〔戲謔〕
손호(孫皓)가 늘 신하들을 시켜 공경(公卿)들을 조롱하였고, 송(宋)나라 효무제(孝武帝)는 신하들을 모욕하며 늘 놀렸는데 수염이 많은 자를 양(羊)이라 부르고, 왕현모(王玄謨)를 노창(老傖)이라 하고, 유수지(劉秀之)를 노간(老慳)이라 하고, 안사백(顔師伯)을 언(齴)이라 불렀다. 효무제의 아들 자업(子業)도 이를 본받아 동해왕(東海王) 위(褘)를 늘 여왕(驢王)이라 불렀는데, 후에 명제(明帝)가 위를 여강왕(廬江王)에 봉했으니 희롱한 것이다.
희학이란 방탕한 무뢰배들이나 하는 짓으로 결코 사군자(士君子)가 할 만한 행실이 아니다. 보통 사람도 그러한데 하물며 임금으로서 신하를 희롱해서야 되겠는가. 나라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함이 마땅하다.
요즘 사람들은 남과 교제할 때 희학질을 친하다는 표시로 삼아 어깨를 치고 소매를 잡고서 희롱하고 깔깔거리며 저속한 말을 골라서 하고, 건들건들 불량한 태도를 서로 배운다. 어른을 보면 촌스럽다고 비웃으며, 오직 주의(周顗)의 추잡한 말과 행실,양억(楊億)의 조롱과 모욕만을 본받아 따르고, 심지어 서로 내자식이라 부르고 서로 그 어미를 욕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친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이 때문에 단아한 선비는 날로 배척되어 외로워지고, 잡스런 뜨내기들만 날로 횡행하며 쾌락을 즐기니, 저 오나라 송나라에서 서로 희롱한 것은 여기에 비하면 오히려 고상하다 하겠다. 아, 교화가 밝아지지 못하고 습속이 물들기 쉬움이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 사비가 명예를 구하다〔謝朏之要譽〕
예로부터 주옹(周顒),상질(常秩),진숙이(陳叔易)와 같은 무리처럼 종남(終南)에 은거하여 출세의 첩경으로 삼고,소초(小草)가 원지(遠志)로 된 사람이 매우 많으니, 세상에서 먼저는 정직하다가 뒤에는 더러워졌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모두 단지 〈수초부(遂初賦)〉를 따르지 않았거나 혹은 원규(元規)에게 팔렸을 뿐이다.
심경지(沈慶之)가 하상지(何尙之)를 비웃었다가 도리어 더 심하게 된 것은 본래 이미 괴이한 일인데, 사비(謝朏)와 같은 경우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처음에 소도성(蕭道成)이 사비가 무거운 명성이 있다고 여겨서 반드시 그를 좌명(佐命 새 임금을 도와 등극시키는 일)에 참여시키고자 하여 은근히 풍자하는 말을 하였으나 따르려 하지 않았다. 찬탈한 후에 사비가 시중(侍中)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므로 옥새를 받아와야 했다. 사비는 “제(齊)나라에 응당 시중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서 베개를 베고 누워 버렸다. 전조(傳詔)하는 자가 사비에게 질병을 핑계하라고 시키자, 사비는 “나는 질병이 없다.”라고 하며 드디어 조복을 입고 동액문(東掖門)으로 걸어 나가서 후에 제나라에 벼슬하여 상서(尙書)가 되었다. 소연(蕭衍 양 고조(梁高祖))이 장차 찬탈을 꾀할 때, 사비를 불러 군자제주(軍諮祭酒)로 삼자 응하지 않다가, 고조가 즉위하자 갑자기 가벼운 배를 타고 대궐로 나아가 사도(司徒)에 제수되었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높은 값을 구한 자인데, 매양 한번 혁명할 때마다 번번이 처음엔 거절하다가 끝내는 벼슬을 받았으니, 그의 심적(心跡)의 교활함은 도리어 풍도(馮道)가 그나마 외식(外飾)이 없던 것보다 못하다.
사비 형제는 오로지 입을 다물고 목숨을 보전하는 데만 마음을 기울였으니, 울림왕(鬱林王)이 폐위되었을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 사약(謝瀹)이 한창 손님과 바둑을 두면서 변란 소식을 듣고는 바둑돌을 둘 때마다 번번이 “응당 조심했어야지.” 하고, 바둑을 끝내자 집에 돌아가 누워서 끝내 바깥의 일을 듣지 않았다. 선성왕(宣城王)이 대통(大統)을 이으려고 도모할 때 사비는 시중으로 있으면서 외직을 구하여 오흥 태수(吳興太守)가 되었는데, 아우 사약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에서 오직 술이나 마시라.”고 하고서 몇 말의 술을 보내면서 “힘써 이것을 마시고 세상일에 상관하지 말라.” 하니, 사약은 항상 술 마시는 것을 일삼았다. 그들이 자기 몸만 도모하여 임금이 폐위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기를 마치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의 살찌고 마른 것을 보듯이 여겼다. 위란(危亂)의 때를 당해서는 물러나 고상하게 누웠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에는 나아가서 좋은 관직을 차지했으니, 장차 저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세상에서 무거운 명성을 업고 헛된 명예를 낚고, 남건(濫巾)을 절취(竊吹)하고, 높은 벼슬에 끼이고,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앉아서 작록을 받는 자들은 아마도 사비의 전법사문(傳法沙門)이라 할 것이다.
● 고인들은 씨족을 중시하였다〔古人重氏族〕
고인들은 씨족(氏族)을 중시하였다. 씨(氏)는 조상을 구분하는 것이고, 족(族)은 족류(族類)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법(宗法)이 문란하지 않아야 세계(世系)가 밝아진다.
그러나 성(姓)을 하사하여 바뀐 경우가 있으니, 동보(董父)가 기르던 용을 길들여 순(舜)을 섬기자 순은 동(董)이란 성과 환룡(豢龍)이란 씨를 하사하였고, 유루(劉累)가 환룡씨에게서 용을 길들이는 법을 배우자 하(夏)나라 공갑(孔甲)이 그에게 어룡(御龍)이란 씨를 하사하였고, 또 항백(項伯)과 누경(婁敬)이 유씨(劉氏)가 되고, 서세적(徐世勣)과 안포옥(安抱玉)이 이씨(李氏)가 되었다.
관직으로 씨를 삼은 경우로는 조괄(趙括)의 후손들이 마복군(馬服君)으로 인해 마씨(馬氏)가 되고,이릉(李陵)의 후손들이 병전(丙殿)으로 인해 병씨(丙氏)가 되었으며,월나라 후손들이 구산(歐山)의 남쪽에 채읍(采邑)을 받았으므로 구양씨(歐陽氏)가 되었고,창고리(倉庫吏)의 후손들이 창씨(倉氏)와 고씨(庫氏)가 된 것이 그것이다.
다른 성을 끌어 쓴 경우로는 정계(鄭季)가 위온(衛媼)과 사통하여 청(靑)을 낳고서 위(衛)를 성으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성을 몰라서 스스로 정한 경우로는 노자(老子)가 오얏나무 아래서 태어나서 이(李)를 성으로 삼고,경릉(竟陵)의 중이 물가에서 아이를 주워서 스스로 점을 쳐 ‘기러기가 육지로 나온다.〔鴻漸于陸〕’는 점괘를 얻고서 육(陸)이라 성을 붙인 것이 그것이다.
사적(事跡)으로 인하여 성을 바꾼 경우로는 제오륜(第五倫)이 그 선조 제제전(齊諸田)이 원릉(園陵)으로 옮겼기 때문에 차례대로 씨를 삼았고,갈씨(葛氏)는 낭야(琅琊)의 제현(諸縣)에 거주하였으므로 제갈씨(諸葛氏)로 불렀으며,주(周)나라가 고양(高陽)의 후손을 주(邾)에 봉해 주었는데, 후손들이 그 읍(邑)을 떼버리고 주(朱)로 씨를 삼았다.
송(宋)나라가 망하자 종실 유응지(劉凝之)가 위(魏)나라로 달아나서 오원(伍員 오자서)이 복수한 것을 사모하여 원(員)이라 성을 고쳤는데 당나라 원반천(員半千)이 그 후손이다.목화(木華)는 단목사(端木賜)의 후손인데 원수를 피하기 위해 단(端)을 버리고 목(木)만으로 성을 삼았다.경방(京房)의 본성은 이(李)인데 점괘로 인해서 고쳤고,진덕수(眞德秀)는 본성이 신(愼)인데 피혐하기 위해 고쳤으며,범수(范雎)는 매를 맞고 도망하였기 때문에 장(張)으로 바꿨고,전천추(田千秋)는 나이가 늙어 작은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갔으므로 성을 차(車)로 고쳤다.마궁(馬宮)의 본성은 마시(馬矢)이고,속석(束晳)의 본성은 소(疎)이고, 혜강(嵇康)의 본성은 해(奚)이고, 도곡(陶穀)의 본성은 당(唐)이고, 문언박(文彥博)의 본성은 경(敬)이다.
위 효문(魏孝文)은 황제(黃帝)가 토덕(土德)으로 왕 노릇을 하였는데, 토덕이 만물의 근원이므로 원(元)으로 성을 바꿨으니, 이런 종류가 매우 많다.
양홍(梁鴻)이 은둔하여 연기(連期)로 성을 바꾼 데 이르러선 아무 근거가 없다. 이와 같다면 씨족(氏族)을 어찌 밝히며, 종계(宗系)가 어찌 문란치 않겠는가. 척발(拓跋)이 중국에 들어와 삭로(索虜)의 여러 성씨가 중복되고 궁벽하다 하여 함부로 바꾸니, 드디어 중원의 성씨가 어지러워졌다.
우문씨(宇文氏)에 이르러선 또 공을 세운 순서에 따라 36성 및 99성으로 삼았고, 사졸들은 모두 장수를 따라 성을 지었으므로 질서가 없이 혼란스럽다. 천하 사람들은 때에 따라 어떤 성을 삼았을 뿐인데, 복성(複姓)으로 걸복(乞伏), 독발(禿髮), 저거(沮渠), 혁련(赫連), 이주(尒朱), 복고(僕固), 완안(完顔), 기악온(奇渥溫)과 같이 역사서에 보이는 것도 이루 기록할 수 없이 많다. 그런데 후세에 오직 장손(長孫), 숙손(叔孫), 달해(達奚), 두로(豆盧), 울지(尉遲), 독고(獨孤), 굴돌(屈突), 우문(宇文), 모용(慕容), 흘간(紇干), 척발(拓跋), 가루(賀婁), 만사(万俟), 이루(伊婁), 사선(似先), 협질(足夾跌), 하란(賀蘭), 가서(哥舒) 등은 그것이 오랑캐의 성인 줄 분별할 수 있다. 3자 성은 대부분 글자를 생략하여 간략함을 따르는데, 후막진(侯莫陳), 가주혼(可朱渾) 두 성은 당나라 말엽까지 존재하였으니, 대체로 성씨의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우리나라는 비록 드러내놓고 바꾼 일은 없으나 문명(文明)이 극에 달하고 외식(外飾)이 너무 심하여, 근세 이래로는 오로지 거짓을 일삼아 궁벽한 성씨나 황당한 사적으로는 현족(顯族)과 어울리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대체로 몰래 교묘한 꾀로 보첩(譜牒)을 문란시키고 부조(父祖)를 뒤바꿔 스스로 명문의 후예에 붙였다. 또 비천한 부류들은 간혹 아비가 분명치 않아서 다른 성을 끌어 쓰는 자도 있고, 간혹 잃어버리거나 도망가거나 하여 다른 사람을 아비로 부르는 자도 있어서 모두 그 연원을 알 수 없으니, 도리어 옛날에 성을 바꾼 자들이 그나마 근본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보다 못하다.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가.
● 고인들이 지은 이름에 고상하지 않은 예가 많다〔古人命名多不雅者〕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의 잡기(雜記)를 보니 “고인들이 이름을 지은 것 중에 고상하지 않은 것이 많아서 추(醜)ㆍ악(惡)ㆍ질(疾)ㆍ포(暴)ㆍ파(破)ㆍ패(敗)와 영부(佞夫)ㆍ망인(妄人)은 물론 은질(隱疾)까지도 피하지 않았다. 진(晉)나라 사장(謝莊)은 풍(風)ㆍ월(月)ㆍ산(山)ㆍ수(水)ㆍ경(景)으로 그 편방을 취하여 다섯 아들을 이름 지었으니, 허망한 일이다. 정살귀(程殺鬼)ㆍ맹감귀(孟噉鬼)는 가장 흉포하고, 조귀(趙鬼)ㆍ풍혼(馮魂)은 가장 요사스럽고, 사마견자(司馬犬子)ㆍ매충아(梅蟲兒)는 가장 치욕스럽고, 양문종(楊文宗)ㆍ요문종(姚文宗)ㆍ한현종(韓顯宗)ㆍ당세종(唐世宗)ㆍ이원종(李元宗)ㆍ이인종(李仁宗)은 가장 기휘(忌諱)를 범하였고, 유목(劉木)ㆍ조초(趙草)는 가장 천박하고, 양기(梁飢)ㆍ막한(莫寒)은 가장 곤궁하고, 걸복공자(乞伏孔子)ㆍ양맹자(楊孟子)는 가장 방자하고, 기슬(蟣蝨)ㆍ장시(張豺)ㆍ전랑(田狼)ㆍ양독(梁犢)ㆍ근돈(靳豚)ㆍ적서(翟鼠)ㆍ요려(姚驢)는 가장 비루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에 달린 것이지 이름에 달린 것이 아니다. 간혹 이름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행실이 뒤따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이름은 천박하지만 행실이 취할 만한 자에게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로부터 이름 짓기를 중시하였으니 또한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천인(賤人)들의 이름에 흔히 이적(夷狄)ㆍ금수(禽獸)ㆍ축물(畜物)ㆍ예악(穢惡)에 관련된 글자가 많으니,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므로 사대부들도 간혹 이렇게 소자(小字 아명)를 지었다가 자손 된 자들이 피휘(避諱)하기 어려워 남들의 조롱을 받기도 한다. 이는 모두 망녕된 풍속이다.
사람의 장수와 요절은 처음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이니, 어찌 이름으로 수명을 연장시킬 이치가 있겠는가. 반드시 이렇게 해서 장수를 누릴 수 있다면 혹시 할 수도 있겠으나, 이름이 아무리 해괴망측하더라도 요절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이는 경계로 삼아야 하는데도 매양 답습하니 괴이한 일이다.
● 부인의 뛰어난 식견〔婦人之卓識高見〕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이모(姨母) 노씨(盧氏)를 방문하니, 그 표제(表弟 이종제)가 활과 화살을 끼고 꿩과 토끼를 들고 돌아오고 있었다. 적인걸이 “내가 재상이 되었으니, 아우를 관직에 보임시키려고 하오.”라고 하자, 노씨가 “늙은 몸에 자식 하나만 있으니, 빈천을 달게 여길지언정 여주(女主)를 섬기고 싶지 않네.”라고 대답하여 적인걸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위(魏)나라 부승조(苻承祖)가 권세를 잡자 친인척들이 달라붙었는데, 종모(從母) 양씨(楊氏)가 부승조의 어미에게 말하기를 “언니가 비록 한때의 영광을 얻었지만 제가 근심 없는 즐거움을 누림만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옷을 주어도 받지 않고 간혹 받으면 묻어 버렸으며, 노복을 주면 “우리 집에는 식량이 없어서 기를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하였다. 부승조가 수레를 보내 영접하려고 하니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안아다 수레 위에 앉히자 크게 통곡하면서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하기에 부씨들은 그녀를 ‘바보 이모〔癡姨〕’라고 불렀다. 후에 부승조가 패망하였을 때에는 홀로 화를 면하였다. 이 두 부인의 빼어난 식견은 참으로 따를 수 없다.
세상의 장부들로 자신의 지식이 남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대부분 권문(權門)에 달라붙어서 밤낮으로 아첨을 떨어 좋은 벼슬자리를 구한다. 또 자제를 위해 관직을 구하기를 남보다 뒤질세라 두려워하여 근거 없는 모략과 교묘한 참소를 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친인척간에 끌어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비록 스스로 계책이 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필경에 화를 면치 못한다.
세상의 부녀자들은 오직 부귀가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음만 알아서 간혹 부정한 지름길이 있으면 온갖 수단으로 아첨을 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이 기회를 틈타 잘 보여서 거스르지 말라고 부추긴다. 만일 조금이라도 자신을 지킬 줄 알아 모닥불에 모여드는 거지 떼가 되려 하지 않으면, 이내 ‘성품이 빈천을 좋아하니 끝내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꾸짖는다. 노씨와 양씨의 풍도를 듣는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도 드물도다.
● 사람을 죽여 이익을 구한 자는 대체로 모두 그 재앙을 돌려받았다〔殺人以邀利者率皆反受其殃〕
사람을 죽여 이익을 구한 자는 대체로 모두 그 재앙을 돌려받았다. 심충(沈充)이 이미 패하고서 옛날의 장수 오유(吳儒)의 집에 들어가니, 오유는 그를 유인하여 이중벽 속에 집어넣고 웃으며 말하기를 “3천 호를 받아 후(侯)가 되겠구나.”라고 하였다. 심충은 “네가 의리로써 나를 살려 준다면 우리 집에서 반드시 후하게 보답을 할 것이고, 만약 이로움 때문에 나를 죽인다면 네 족속이 몰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유는 심충을 죽였는데, 후에 심충의 아들 심경(沈勁)이 마침내 오씨를 멸족시켰다.이주조(爾朱兆)가 낙양에 들어가자 성양왕(城陽王) 휘(徽)는 옛날에 베푼 은혜를 믿고서 황금 100근과 말 50필을 가지고 구조인(寇祖仁)에게 의탁하였다. 구조인은 그 재물을 탐하여 휘를 죽이고 그 머리를 이주조에게 보냈다. 이주조의 꿈에 휘가 나타나서 구조인의 집에 황금 200근과 말 100필을 두었다고 알려 주었다. 이주조가 그 황금과 말을 요구하였으나 수량에 차지 않자, 이에 구조인을 높은 나무에 목매달고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였다.송 명제(宋明帝)가 진안왕(晉安王) 자훈(子勛)을 죽이고 나서 세조(世祖)의 자손을 평소처럼 대하였는데, 건안왕(建安王) 휴인(休仁)이 “송자후(松滋侯)의 형제가 아직 살아 있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이에 세조의 자식 28명을 모두 죽였다. 후에 명제는 휴인을 모역(謀逆)의 죄로 무함하여 죽였다.제 명제(齊明帝) 때 시안왕(始安王) 요광(遙光)이 고ㆍ무(高武)의 자손을 모두 죽여야한다고 황제에게 권하였는데, 뒤에 요광은 반란을 꾀하다가 대군(臺軍 관군)에 의해 참수당하였다. 예로부터 이와 같은 예는 매우 많으니, 보복이 틀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 즉시 재앙을 받은 자도 있다. 원흉(元凶)의 변에 장초지(張超之)가 황제를 합전(合殿)에서 시해하였는데, 무릉왕(武陵王)이 들어와 토벌하자 장초지가 달아나 합전의 어상(御床)이 있는 곳에 이르러 군사들에게 피살당하였다.진안왕(晉安王)이 패전했을 때 육초지(陸超之)가 단정히 앉아 명을 기다리는데, 육초지의 문생(門生)이 포상을 탐내서 육초지를 죽였다. 염을 할 때 그 문생도 관을 들기를 도왔는데, 관이 떨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노암(路巖)이 양수(楊收)를 참소하여 강릉(江陵)에서 사사(賜死)되게 만들었는데, 나중에 노암도 사사되었으니, 바로 양수가 죽었던 자리였다.이부(李符)는 춘주(春州)를 악지(惡地)로 여겨 조보(趙普)에게 노다손(盧多遜)을 그곳으로 좌천시키도록 건의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부도 죄를 얻어 춘주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양언홍(楊彦洪)은 주온(朱溫)에게 이극용(李克用)을 죽이도록 권하면서 “호인(胡人)은 급박하면 말을 타니, 말을 탄 자를 보거든 쏘십시오.”라고 하였다. 양언홍이 마침 말을 타고 앞에 있었는데, 주온이 쏘아 죽였다.
천도(天道)의 신명스러움이 이토록 교묘한데도 소인들은 매양 눈앞의 이익을 탐하여 아무도 징계할 줄 모르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 여자의 관직〔女子之官職〕
하늘은 먼저 땅에 은택을 베풀고, 임금은 먼저 신하에게 예를 행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먼저 예를 보이는 것이 강유(剛柔)를 감싸는 의리이다. 공자께서는 “부인은 남에게 복종하므로 감히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바가 없다. 종일토록 규문(閨門)에 거처하면서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행동을 홀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성녀(聖女)ㆍ현녀(賢女)ㆍ열녀(烈女)ㆍ재녀(才女)의 호칭이 있었으나, 훌륭한 황제와 임금들은 조정의 신하처럼 관작(官爵)으로 임명해 준 예가 없었으니, 진실로 음(陰)은 양(陽)과 대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의 직분이란 오직 술과 밥을 마련하고, 누에 치고 길쌈하며, 집안의 일을 맡아 할 뿐이다. 비록 지ㆍ용ㆍ재ㆍ혜(智勇才慧)가 남자보다 나은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단지 남편을 보좌하여 그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권할 뿐이고, 끝내 남자의 반열에 끼일 수 없으니, 이것이 성인께서 남녀의 사이에 질서를 정하여 암탉이 우는 경계를 남기신 까닭이다. 정치가 혼란한 세상에 이르러서는 혹 관직을 주거나 칭호를 성대하게 붙여 준 것은 모두 말할 것이 못 된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피향박사(披香博士) 요방성(淖方成)이 있었고,환령(桓靈) 때에 처음 여상서(女尙書)를 두었으며, 위 명제(魏明帝)는 이를 이어받아 여상서 6인을 두었다. 석호(石虎 후조(後趙) 제3대 임금) 때에도 여상서가 있었다.
여시중(女侍中)으로는 원위(元魏 북위(北魏)) 시대에 원차(元叉)의 처 호씨(胡氏)가 있었고, 제(齊 북제(北齊))나라 때에는 고악(高岳)의 모친 산씨(山氏)와 조언심(趙彥深)의 모친 부씨(傅氏)가 있었고, 고제(高齊 북제의 임금) 때에는 육령훤(陸令萱)이 있었고, 남한(南漢) 시대 유엄(劉龑)에게는 노경선(盧瓊仙)과 황경지(黃瓊芝)가 있었다.
여학사(女學士)로는 진 후주(陳後主) 때에 궁인(宮人) 원대사(袁大捨) 등이 있었고,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에 패주(貝州) 송씨(宋氏)의 다섯 딸인 약췌(若萃)ㆍ약소(若昭)ㆍ약화(若華)ㆍ약륜(若倫)ㆍ약헌(若憲)이 있었다.
여박사(女博士)로는 송 효무제(宋孝武帝) 때에 한난영(韓蘭英)이 있었고, 여교서(女校書)로는 설도(薛濤)가 있었고, 여진사(女進士)로는 임묘옥(林妙玉)이 있었다.
내장군(內將軍)으로는 당(唐)나라 위후(韋后) 때에 하루씨(賀婁氏)가 있었다.
윤발(綸綍 왕명)의 출납을 맡은 자로는 당(唐)나라 상관첩여(上官婕妤 상관소용)가 있었고, 사사(史事)를 담당한 자로는 한(漢)나라 조대가(曹大家)가 있었다.
제후에 봉해진 자로는 여열후(女列矦), 음안후(陰安矦), 한 고조(漢高祖)의 형수, 명자정후(鳴雌亭矦) 허후(許負), 노후(魯矦) 저씨(底氏)의 아들 해연(奚涓)의 모친과 임광후(臨光矦) 여수(呂嬃), 소하부인(蕭何夫人) 찬후(酇矦)가 있었다.
여장군(女將軍)으로 진(晉)나라 왕흠(王廞)의 딸 정렬장군(貞烈將軍)이 있었고, 고심(顧深)의 모친 공씨(孔氏)가 군사마(軍司馬), 당(唐)나라 위주(衛州)의 여자 후씨(矦氏), 활주(滑州)의 여자 당씨(唐氏), 청주(靑州)의 여자 왕씨과의(王氏果毅), 진(陳)나라 여자 백경아(白頸鵶)가 거란(契丹)의 회화장군(懷化將軍)이 되었다.
여자로 국정을 담당한 자로는 제(齊)나라 육대아(陸太姬)가 있고, 병권을 주관한 자로는 당(唐)나라 평양공주(平陽公主), 고량(高凉)의 세씨(洗氏)가 있었다.
또 남자를 사칭하여 관위(官位)를 얻은 자로는 제(齊)나라 양주(揚州)의 의조록사(議曹錄事) 누정(婁逞), 당(唐)나라 소의군병마사국자좨주(昭義軍兵馬使國子祭酒) 석씨(石氏), 삭방병마사어사대부(朔方兵馬使御史大夫) 맹씨(孟氏), 촉(蜀)나라 사호참군(司戶參軍) 황숭하(黃崇嘏)가 있었다.
이러한 종류가 매우 많아서 부녀배들이 이것을 훌륭한 일로 자랑하고, 장부(丈夫)들도 부러워하는 자가 많으니, 이 어찌 교훈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예(羿)ㆍ망(莽)의 찬탈은 그래도 말할 수 있으나, 여와(女媧)ㆍ무조(武曌)의 혼란은 이야기 할 수조차 없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태사(太姒)의 성덕을 칭송하면서 반드시 그 근본을 문왕(文王)에게 두었다. 이를 본다면 그 뜻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어찌 부인과 장부가 나란히 패권을 다투는 것을 취할 만한 일로 여겼겠는가.
● 명성을 숨기고 영예를 두려워하다〔晦名而懼譽〕
한(漢)나라 북해왕(北海王) 목(睦)은 중대부(中大夫)가 그를 “충성하고 효성스럽고, 자애롭고 인자하시며, 현자를 공경하고 선비를 좋아하십니다.”라고 칭송하자, “그대는 나를 위태롭게 만드는구나.”라고 말하였다.위(魏)나라 북해왕(北海王) 곤(袞)은 문학(文學) 방보(防輔)가 표(表)를 올려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자,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다만 죄를 증가시킬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종친 중에서 두려워하고 삼간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칭송으로 인해 몸을 위태롭게 만들었으므로 식자들은 반드시 명성을 감추고 칭찬을 두려워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미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개관요(蓋寬饒)가 허씨(許氏)와 사씨(史氏)의 노여움을 사서 죄를 얻자, 정창(鄭昌)이 구제하면서 말하기를 “위로 허(許)ㆍ사(史)에게 붙은 적이 없고, 아래로 금(金)ㆍ장(張)에게 청탁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더욱 선제(宣帝)의 노여움을 격발시켰다.
소자첨(蘇子瞻.소식)이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서 조정의 시기를 받자, 장안도(張安道)가 구제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실로 천하의 기재(奇才)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후에 동파(東坡)가 그 글을 보고서 혀를 내둘렀고, 자유(子由 소철(蘇轍))는 바로 장서(張恕)의 덕을 본 것이라고 여겼다. 고인들이 명성을 두려워함은 참으로 이유가 있다. 저 제 자랑을 하면서 남을 업신여기고, 칭찬을 좋아하면서 남의 지적을 듣지 않는 자는 모두 재앙의 씨앗이다. 또 거짓을 꾸며 명성을 구하는 것은 실질이 있는 자도 오히려 두려워하거늘, 하물며 속이 빈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어리석다고 말할 뿐이다.
● 한위공이 덕으로 사람을 사랑하다〔韓魏公之愛人以德〕
동파(東坡)가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영종(英宗)이 그를 지제고(知制誥)에 임명하려 하니, 한위공(韓魏公)이 말하기를 “소식(蘇軾)은 원대(遠大)한 그릇이므로 요컨대 조정에서 잘 배양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사모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게 한 뒤에 등용하신다면 사람들이 딴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등용하시면 단지 그에게 누를 끼칠 뿐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직사관(直史館)을 제수하였다. 동파가 말하기를 “한공은 사람을 덕으로 사랑한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세상으로 말하자면 한공은 남의 벼슬길을 막은 사람이 되고, 소공은 반드시 원한을 품고 보복하였을 것이다.
● 당개가 어사가 되어 문언박을 논박하다〔唐介爲御史論文彥博〕
당개(唐介)가 어사(御史)가 되어 문언박(文彥博)이 전권을 독점하고 붕당을 세우고 궁궐과 결탁하였으며, 익주(益州)의 지사(知事)가 되었을 때는 등롱금(燈籠錦)으로 귀비(貴妃)의 총애를 입어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지금 또 선휘사(宣徽使)로서 장요좌(張堯佐)와 결탁하였다고 하면서 그를 축출하기를 청하였다. 귀비는 장요좌의 질녀이므로 인종(仁宗)이 노하여 이부(二府 중서성과 추밀원)의 관리를 불러 상소문을 보여주니, 당개가 면전에서 문언박을 질책하면서 “언박은 스스로 반성하시오. 그런 점이 있다면 숨기려 하지 마시오.”라고 하자, 문언박은 절하며 사죄해 마지않았다. 당개를 어사대(御史臺)에 보내 심문하라는 조서가 내리자, 문언박은 홀로 만류하면서 재배하고 말하기를 “어사는 직언을 올리는 직책이니, 더 죄를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당개는 영주 별가(英州別駕)로 좌천되었고, 이튿날 문언박은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나중에 문언박이 다시 재상이 되었을 때 어사 오중복(吳中復)이 당개를 다시 부르기를 황제에게 청하자, 문언박이 말하기를 “당개가 한 말이 또한 신의 병폐에 적중하였는데 너무 심한 견책을 받았으니, 오중복의 말처럼 다시 부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자방(子方 당개)으로 말하면 참으로 언관(言官)이라 이를 만하고, 노공(潞公 문언박)과 같은 사람은 참으로 재상이라 이를 만하다.
이와 같다면 천하가 태평해지지 못할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지금 세상이라면 100명의 당개가 있어도 반드시 이런 말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논박을 당한 자가 비록 죄를 받더라도 그가 받은 벌이 너무 가볍다 여겨서 사람들을 사주하여 죄를 엮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면전에서 질책할 때에는 반드시 가리고 변명하면서 기세를 높여 꾸짖었을 것이니, 기꺼이 절하며 감사해 마지않았겠는가. 어사대에 보내 탄핵할 때에는 반드시 온 힘을 기울여 고문하였을 것이니, 구제하려 하였겠는가. 재차 정승이 되어 오중복이 당개를 다시 부르기를 청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오중복을 당개의 붕당이라 지목하여 함께 모함해 빠뜨렸을 것이니, 어찌 이끌어 천거하려 했겠는가.
● 당개의 공정한 논의〔唐介之公議〕
장요좌(張堯佐)의 질녀가 인종(仁宗)의 총애를 입어 장요좌가 갑자기 진출하니, 당개(唐介)가 상소를 올려 양국충(楊國忠)을 그 예로 삼았다. 또 포증(包拯)과 오규(吳奎) 등 7인과 더불어 죄를 열거하여 논핵하자 황제가 장요좌의 직책을 빼앗고, 당개에게 6품복을 내려 용감하게 간언한 것을 표창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장요좌를 선휘사(宣徽使)에 제수하자 당개가 또 간쟁하니, 황제가 “제수의 추천이 처음 중서성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당개는 문언박(文彥博)이 귀비(貴妃)에게 아첨하고 장요좌와 결탁하였으니, 문언박을 축출하고 부필(富弼)을 재상으로 삼으라고 요청하였으며, 또 오규가 사태를 관망하면서 간사함을 행한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급히 이부(二府)의 관리를 불러 상소문을 보여주니, 당개는 면전에서 문언박에게 따졌다. 추밀 부사(樞密副使) 양적(梁適)이 당개를 꾸짖어 전각 아래로 내려가게 하였으나 당개는 더욱 격렬히 간쟁하였고, 황제는 크게 노하여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그러자 채양(蔡襄)은 “당개가 참으로 광직(狂直)하나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도 임금의 미덕이니, 그의 목숨을 보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당개는 영주 별가(英州別駕)로 좌천되었고, 이튿날 문언박을 파직시키고 오규를 내쳤다. 중사(中使)를 보내 당개를 유배지까지 호송하게 하면서 도중에 죽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또 황금을 하사하고 그의 초상을 그려 편전에 걸게 하였다.
일개 신하의 외로운 충정이 면전에서 따지고 조정에서 쟁론하면서 귀비의 총애도 개의치 않고, 재상의 존귀함도 돌아보지 않고, 황제의 위엄을 범하면서 솥에 삶기는 형벌도 달게 받고자 하였으니, 하늘에서 받은 기운을 평소 배양하고 가슴 가득한 피에 격분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인종은 공정한 마음으로 밝은 조정에 임하여 매우 노여워하면서도 그의 충직함을 실로 가상하게 여겼고, 잠시 좌천을 시켰으나 표창하는 뜻을 겸하여 보였으니, 전후의 은혜와 영광이 끊임이 없었다. 인종이야말로 성주(聖主)라 할 만하니, “어떤 말이 네 마음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리에 비추어 반성해야 한다.〔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라는 말에 가깝다 하겠다.
임금이 이와 같고 신하가 이와 같다면 사사로운 지름길이 어찌 끊어지지 않으며, 공정한 논의가 어찌 펴지지 않으며, 천하가 어찌 태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령 당개가 인종을 만나지 못했다면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멸족을 당했을 것이고, 가령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원악지(遠惡地)에 유배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며, 반드시 부필의 사주를 받았다고 의심받아 연좌되었을 것이다. 또 반드시 오규와 양적은 문언박의 붕당이고, 채양과 오중복은 당개의 붕당으로 여겨져 벼슬이 오르거나 내쳐졌을 것이니, 어찌 의복을 내리고 호송해 주며 황금을 하사하고 화상을 그리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겠는가.
● 위기와 무안이 서로 헐뜯다〔魏其武安相毁〕
위기(魏其 두영(竇嬰)의 봉호)와 무안(武安 전분(田蚡)의 봉호)이 서로 헐뜯으니, 황제가 조정에서 대질하여 시비를 가리게 하였다. 조회가 파하고 나가는 길에 무안이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을 불러 수레를 함께 탔는데,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장유(長孺 한안국)와 함께 벼슬 없는 늙은이를 다스릴 것이니, 양다리를 걸치고 망설일 것이 무어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안국은 “그대는 어찌 스스로 기뻐하지 않습니까. 위기가 그대를 헐뜯으니, 그대는 마땅히 관을 벗고 인끈을 풀어 황제에게 돌려주면서 ‘신이 폐부(肺腑)와 같은 친족으로서 요행히 관직을 얻었으나 본래 적임자가 아닙니다. 위기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라고 한다면, 황제께서 반드시 그대를 겸양스럽다고 여겨 그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위기는 필시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문을 닫아걸고 혀를 깨물고 자살할 것이오. 지금 사람들이 그대를 비방하자 그대도 남을 비방하니, 비유하자면 장사치나 여인네들이 말다툼하는 것과 똑같으니, 어찌 이리 체모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무안은 사죄하면서 “다툴 때에는 너무 급하여 그렇게 할 줄 몰랐소.”라고 대답하였다.
진(晉)나라 왕준(王濬)이 황제를 만날 때에 매번 자신의 공적을 진술하였는데, 범통(范通)이 말하기를 “세운 공적은 아름다우나, 아름다움에 처신하는 방법이 진선(盡善)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공이 개선하는 날에 각건(角巾)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가 입으로 오(吳)를 평정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가, 어떤 자가 묻거든 곧 ‘성주(聖主)의 은덕이고 장수들의 힘 때문이지, 늙은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오.”라고 하자, 왕준은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는 내가 편협한 탓이오.”라고 대답하였다.
한안국과 범통의 말은 본래 장자(長者)다운데, 전분과 왕준도 그 말을 듣고 즉시 사과하였으니, 어찌 어질지 않은가. 지금 사람들은 몸가짐을 단속하고 일을 처리함이 형편없고, 남에게서 지적과 탄핵을 받으면 구차하고 장황하게 변명하는 소장을 올리고, 또 남을 꾸짖을 만한 꼬투리를 찾아내기를 마치 길거리의 아이들이 삿대질하며 서로 욕하듯 한다. 약간의 공로라도 있으면 반드시 과장하여 덧붙여가며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쳐서 반드시 남의 위에 서서 두터운 포상을 받으려 하고, 남이 혹 다른 말을 하면 마치 원수와 싸우듯 한다. 가령 한안국과 범통과 같은 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 어찌 공연히 남에게 굽힐쏘냐. 너는 필시 저들의 붕당으로서 나를 설득하려 하는구나.” 하면서 성을 내며 교제를 끊을 것이니, 어찌 전분과 왕준처럼 자신을 굽혀 사과하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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