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아라일동 376-22번지. 2005년 전후 이장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위인선현유적(묘 터)
애국지사 고수선의 묘는 산천단에서 동쪽으로 50~60m쯤 되는 곳에서 남쪽으로 25m 지점에 있다. 길가에 ‘獨立抗爭記’가 세워져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愛國志士 고수선(高守善) 獨立抗爭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수선 지사는 대정읍 가파도에서 부 고영조(高永祚) 모 오영원(吳永元)의 외동딸로 1898년 5월 4일 태어나시다.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던 지사는 1919년 33인 중의 한 분인 박희도(朴熙道) 선생의 지시를 받아 유철향(兪喆鄕)의 집 지하에서 신경우(申敬雨) 등 동지 학생들과 모여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적색 댕기와 삼일운동에서 쓸 태극기를 만들어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가하셨다. 그 후 피신하는 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내와 연락하는 사무를 보다가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동년 11월경 귀국하여 370원을 모금하여 상해로 송금하고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 동경에서 동지 이덕요(李德耀) 등과 상야공원(上野公園)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중 일경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방면되었으나, 1922년 항일용의자로 고광수(高光洙)와 함께 피체되어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아 손가락이 불구가 되는 고초를 당하였으며, 1989년 8월 11일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는 남편인 金泰玟과 쌍묘로 되어 있으며 비석은 고수선 지사가 남편을 위하여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고수선 지사에 대한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고수선 지사는 1906년 여덟살의 나이로 가파서당에 들어갔으며 1년이 되기 전에 천자문을 다 읽고 1년 후에는 동몽선습을 마치는 등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가파도에서는 7살까지 살았고, 그 이후는 모슬포로 이사가 살았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는 데 목말라했던 고수선은 4km가 떨어진 야학을 몰래 다니려 했으나 아버지에게 들켜 포기했다가 공부를 계속하려는 딸의 마음을 헤아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한글을 한 시간내에 깨우치면 소원을 풀어 준다는 조건이 허용되었고 이 시험에 거뜬히 합격한 고 지사는 대정공립보통학교에 유학하는 행운을 얻었다. 대정보통학교를 마친 그녀는 프랑스인 신부 미르셀로구(具瑪瑟)에 의해 설립운영되고 있던 신성여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때 혼자 걸어서 제주시까지 도착하는 악착스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학교에서 스스로 민족주의에 눈을 돌리면서 1916년에는 우리 나라 여성교육의 명문인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高普)에 입학하였다. 특히 어머니 오영원씨는 교육열이 높아 고수선 여사의 서울과 일본 유학시절을 모두 따라다니며 삯바느질로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에는 고등여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중에 상급 학교(그들이 진학했던 학교로는 경기고등학교, 진명고등학교, 숙명고등학교, 경기여의전 등이 있었다.)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도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무렵 제주에서 서울로 유학한 여성은 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셋뿐이었다. 이 시절 일화 중 고수선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역사와 미술을 가르치는 일본인 시바다 교사가 이순신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자, 그 자리에서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또한 일장기를 그리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몰래 태극기를 그린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고수선은 학교에서 불령(不逞) 학생으로 낙인찍힌다.
고종황제가 승하하던 해인 1919년 고수선은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1919년 2월 28일에는 제주도에서 유학한 학생 박규훈(朴圭勳)으로부터 대대적인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함께 유학중이며 이미 깊이 사귀고 있던 강평국․최정숙과 내통하여 동지적 결속을 다졌다. 그해 3월 1일, 교직원들은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수업을 중단한 채 학교 문을 잠그고 교무회의를 열었다. 당시 고 지사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감의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었는데도 정오가 다가오자 김일조(金日祚)와 힘을 합쳐 기숙사의 뒷문을 부수고 두 사람이 선두에 서서 파고다공원으로 달려나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일본도를 휘두르며 시위를 진압하는 기마경찰의 말갈기를 힘껏 잡아당겨 기마경찰을 떨어뜨리고는 도망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그 날 밤 훈육을 담당한 일인(日人) 교사 아사노(淺野)에게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당당히 대답하고 우리 나라는 곧 독립될 것이라고 당돌하게 주장하기도 하였다.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한 고 지사는 충남 논산에 있는 초등학교에 부임하였다. 일년을 근무한 지사는 1920년 여순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국내 일본 경찰에 이미 망명 사실이 알려져 수배령이 내려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우여곡절 끝에 임정요인 장두철(張斗徹)과 만나 신상문제를 논의한 끝에 적지인 東京에 건너가 그곳 유학생들과 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동경에 잠입한 지사는 박정식(朴偵植)을 만나 연락을 취하며 동지를 규합하였고 우에노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획책하다 붙잡혀 3일간의 구류를 받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동경의 오시오까 醫專에 입학하여 의사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1923년 9월 1일 일어난 대지진으로 조선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불문코 마구 죽이는 생지옥이 벌어졌다. 지사는 열흘 넘게 걸어서 시모노세끼까지 가서 탈출 귀국하였다. 간신히 서울에 도착해서는 총독부병원에 입원했다. 등잔 밑이 어두울 것이라 생각하고 총독부병원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종로서 형사에게 연행되어 2주일 동안 연필을 손가락 사이에 넣어 비틀고 코에 물을 붓는 등의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의학도로서 공부밖에 한 것이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한 덕분인지 무혐의로 풀려났다.
건강이 어지간히 회복되자 경성의전(京城醫專)에 입학하였다. 지사는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 여의사 1호가 된 것이다. 그 후 우리 나라 현대의학의 선구자 인당(忍堂) 김태민을 만나 혼인을 하였는데 나이 30세였다. 지금의 조천을 비롯해 한림과 서귀포, 고산 등을 돌아다니며 ‘장춘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의료활동을 펼치던 두 사람은 1944년 충청남도 강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강경에서 개업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형사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 항상 요시찰인으로 남아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6.25가 발발하면서 오랜 피난생활을 하였다. 1.4후퇴 때 다시 귀향한 두 사람은 의사생활을 청산하고, 김태민은 독서와 서예로 만년을 보냈으며 고수선은 1954년에는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외친 남성 입후보자에게 '암탉이 울어야 새벽이 오는 법'이라 되받아쳤던 일화는 유명하다.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운주당이 고수선 여사의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한 무대가 되었다. 또한 90 노령이 될 때까지 10여년 동안 대한노인회 제주도 연합회장을 역임하면서 노인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집안 일을 돌보는 가사보다는 독립운동, 여권신장과 정치, 사회활동에 더욱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고수선 여사는 1989년 8월 11일 자택에서 9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제이티뉴스 050520)
제1대 도민회, 제3대 민의원에 출마했고, 한국국악협회 제주도지부장, 한국예총 제주도지부장을 역임했다. 제1회 만덕봉사상을 수상했고, 1980년 정부는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제민일보 2006/3/14 )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기자였던 최은희(崔恩喜)가 지은 [조국을 찾기까지]에는 고수선 지사에 관한 대목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다.
<‥‥고수선은 3월 1일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운동에 직접 가담한 후 3월 5일이 되자 전국적으로 불붙는 만세시위운동에 빨간 머리동이를 만들기 위해 貞信女學校 선생인 兪珏卿, 경성여고보 선생인 兪喆卿 쌍둥이 형제가 친정살이를 하는 桂洞 김치광으로 사용하는 석굴에 들어가 입구에 거적을 치고 촛불을 밝혀서 사흘 동안에 걸쳐 그 일을 모두 마쳤다. 그 후 그는 1920년 수배된 몸으로 인천에서 여순을 거쳐 상해에 건너가 임시정부의 장규철과 회합하고 동경에 건너가 우에노공원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3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고 관동지진을 겪고 귀국후에는 黃玉 형사에게 붙들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대하실록 제주백년 432~440쪽)
고수선 지사의 묘는 2005년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했고, 아들 김률근씨는 광복회 제주지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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