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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에코랜드 원문보기 글쓴이: 도우며살자
1.치우능원 사당 비문 초안 (한글 과 한자)
* 치우능원 비문 초안을 쓰게된 동기.
지금 중국 산동성 문상현에는 치우능이 있고 중국 지방정부는 이를 10 만평 규모로 공원화 하여 치우능을 능원으로 격상시키고 그곳에 치우 사당과 산동성에서 서불이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떠나던 낭야 유적지와 곡부에 있는 공맹 사당 등 몇몇 유적지를 하나의 관광 권으로 묶어 한국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을 세운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먼저 이 치우 능에 가셨던 분들에 의해 치우능 사당건립금을 우리 한국인 성금으로 찬조하고 치우능 비문에 치우는 우리 조상이라는 의견이 들어가면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고 이에 그 지방 관서장이나 당 간부가 적극 호응 하였다 하며 먼저 가셨던 분들은 이미 지인들을 통하여 약간의 성금 조성까지 하셨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지방에 있다는 가림토의 흔적을 찾으러 갔다가 먼저 가셨던 분들과 그곳 치우의 능을 들렸었는데 그들은 우리 일행을 멀리서 부터 마중 나왔었고 호텔에서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다.
필자야 공짜 술과 요리를 받은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들이 내미는 계획서 초안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즉 치우를 中華兵祖 라 했고 그곳에 염제신롱 황제헌원 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보는 三祖堂을 세운다는 것 이었다.
즉 그 능원 건설계획서 이름이 이래와 같이 중화병조치우능원(中華兵祖蚩尤陵園) 이었고 그 아래 붉은줄 둘이 쳐진것을 보면 산동이 옛날에 동이족에게 속해 있었다 는것은 좋은데 그 동이족이란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즉 東夷란 혹 큰(大) 할(弓)을 가졌으니 다른 오랑캐에 비하여 좋은것 이라 하는 사학자도 있지만 이는 중화인들이 지기네들은 가운데 앉아있으니 中華라하고 동서남북 사방의 족속을 모두 오랑캐로 보는 말 이므로 이를 우리가 사용한다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 오랑캐를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학자는 염제신롱, 황제헌원도 우리 동이족 이라고 하시지만 우리사서인 한단고기 18 대 환웅중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14 세 환웅인 자오지 천황이며 다른 기록에 혹 있는지 몰라도 아래에 기재되는 그들의 사서인 史記만 보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 아니고 오히려 치우천황과 처절하게 싸운 적 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고구려 역사까지 빼앗아 동북공정을 하려는 그들이 치우능을 통하여 우리 민족까지 동참시키게 한 다음 우리국가, 우리 민족까지 그들의 속국, 속족으로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따라서 이를 항의 해 본 결과 그들이 제시한 것은 계획서의 초안이고 中華 兵祖 에서 中華 소리를 뺄 수도 있다고했다.
그렇게만 된 다면 치우사당은 개인들 몇이 할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성금으로 훌륭히 세울 수도 있고 그 비문이나 안내문도 우리뿌리를 밝히는 식으로 지을 수도 있으며 이것을 양측에서 조정 하고 문서로써 확실히 약속한 다음에 개인 몇이 어렵게 성금을 모을게 아니라 인터넷, 또는 각 언론사를 통하여, 언론사를 주축으로 성금 모금을 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동행 했던 분의 권유로 아래 비문 초안을 작성해 보는데 여기서 중국인들과 조정때 몇 글자가 빠져도 한민족 정신이 살아있는 내용이라면 고구려 역사를 먹으려는 그들에게 역동북공정의 원초적 초석이 될것으로 보지만 만약 우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이는 또다른 동북공정의 야욕이 표출되는것으로 볼 수밖에 없음으로 적극 반대해야 할 것이다.
*** 치우능원 사당 비문 초안문을 읽기 전에
* 이 글이 중국 측과 협의에서 채택 되거나 본뜻이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약간 수정이 된다면 치우능원에 사당이 조성될 때 그 비문이나 안내판으로 쓰려 한다.
* 비문으로 했으면 좋겠지만 글이 길고 또 스텐판도 오래가고 좋으니 스텐판으로하여 사당 앞에 세우게 하되 한글은 중앙에 두고 한문과 영문을 그 좌우로 두게 한다.
* 글 내용은 간단하게 하려 했으나 반 동북공정을 하려면 치우께서 한민족임을 확실히 밝혀둬야 함으로 공정하게 한,중 사서를 모두 인용하되 서론으로 치우의 존재를 먼저 한민족사로 인용하고 다음은 중국 사서를 인용하나, ...그러나 그게 아니라...해야 하므로 다시 한민족사서는 뒤에 쓰려한다. 따라서 양쪽 사서를 다 쓰려니 글 내용이 좀 길어진다.
* 본문 내용은 한, 중 양측 민족을 확실히 분리하여 우리가 그들의 속국, 속족이 아님을 밝혀야 하고 또 이는 민감한 문제이므로 양쪽 사서를 그대로 인용하는것으로하되 비문이란 역시 재미나야 함으로 수많은 사서 자료중에 재미난 부분만 발취하고 중복디는 말은 가급적 피하려 했다.
* 한문으로된 안내판 문에서 한글이나 영문이 들어가게 한것은 솔직히 말해서 한자로는 발음할 수 없는 말을 넣어 한글이 한자보다 우수한 세계적 글자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 이 안내문 초안은 우선은 필자가 쓰지만 필자는 워낙 박학무식 한데다가 졸필이므로 한민족의 뜻이 살아있는 다른 분의 글을 기대하며 또 한자는 우선 우리가 전에 사용하던 한자로 쓰지만 요즘 중국에서는 간자를 쓰고있고 또 간자 문법도 달라졌음으로 이는 이미 중국에서 오래 학문을 연구한 분에게 간자 번역을 부탁해 이미 승낙을 받았고 영문 번역에 있어서 필자는 초보이니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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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에 대한 한 중 사서 기록을 번역하기 전에
한민족의 기록은 규원사화( 閨怨),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하편(三聖記下篇)과 태백일사신시본기(太白逸史神市本記) 대변경(大辯經)의 글이 있으나 대동소이 하므로 삼성기 하편과 규원사화 내용을 인용하며 중국기록은 산해경(山海經), 또는 사마천의 사서(史書)를 주로 인용하여 올린다.
아래 韓, 中 史書는 필자가 직접 번역한다. 왜냐하면 옛 글자는 지금 옥편에 나오지 않는 글자도 많고 또 옛 글자의 해석을 지금 우리 상식으로 하면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書經에서 女 를 계집으로 번역하면 않되듯 이 史書 들에서도 女 자가 땅으로 나온데가 많고 특히 梁父 는 어떤 애비가 아니라 만물을 낳게 하는 교량인데 이는 신단수(神壇樹)가 환숫(환웅)의 상징이며 그 나무는 태양의 정기를 받아 땅(여음)에 전하는 것으로 남근, 즉 아비를 뜻하며 이는 솟터(蘇塗)의 웅상이 되는가 하면 지금 바이칼호 부근 환민족의 후손인 부라이트, 나나이, 울치 족의 성소 오보(오보=아보>압=아비)가 되고 몽골인 들도 그 오보를 세우고 경배하며 우리에게는 서낭나무로 전래 됬다는것을 볼 때 중원에서 무당들이 세웠고 부르던 양부(梁父) 역시 하늘의 정기를 땅에 전하는 것을 의미 한다.
다음 중국인들은 큰 뱀을 죽여 놓고도 이것이 白帝의 아들 이라고 벌벌 떤다.여기서 白帝란 白衣民族의 天帝 이며 그가 치우 임도 소홀히 넘길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즉접 번역해 본다는 것이나 혹 오역이 있으면 독자님의 지적을 바란다.
*** 치우능원 사당 비문 (안내판문) 초안
서언 치우천황은 각기 다른 민족사에서 아전인수 격으로 기록됬으나 그 핵심은, 치우는 병기의 원조이고 군신 이라는 점은 같다. 이에 각 한,중 사서의 핵심만 뽑아 이 이문에 그대로 인용한다. 한민족 사서 환단고기에 이르되 치우는 14 세 황웅 자오지 천왕이라 했고 그 활동무대는 탁록을 포함한 상동성 일대라고 했다. 또 고조선 이전 한민족 이름은 배달또는 사람이라는 뜻의 구리이고 중국 사서에는 동이(東夷)라고도 나오는데 동이란 중화를 중심으로 한 사방의 오랑캐 이니 한민족은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중국사서 이십오사에 이르되 삼묘족을 구려라 하고 구려는 옛 천자의 이름이라 하였으며 또 구려의 왕을 치우라 했고 위서에 이르되 고리 에서 온 동명이 흘승골에서 세 사람을 만났다 했으니 구려, 고리는 한민족어 '구리'의 한자를 빌린 이름이며 고구려, 고려의 원 이름이다.
** 중화측 사서
* 史記에 의하면 헌원때 신농씨가 쇠진해 졌다, 제후는 서로 싸웠고 백성은 포학했으나 신농씨는 능히 정벌하지 못했고 이에 헌원이 방패와 창을 만들어 정벌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제후가 다 따랐어도 치우는 사나워 능히 정벌하지 못했다.* 集解應劭가 마하길 蚩尤는 옛 天子라 했다. * 孔子三朝紀에 가로되 치우는 보통이며 탐욕한자이다. * 索隱案此紀에 이르되 제후가 서로 침범할때 치우가 가장 포악했으니 천자가 아니다. * 管子가 말하되 치우는 노산의 金을 받아 다섯 병기를 만들었으니 분명 보통사람은 아니다. 모든 제후의 호이다.* 正義龍魚河 圖에 이르되 치우는 황제의 정사 때 형제가 81인이었으며 아울러 짐슴몸에 사람의 말을 하고 모래와 돌을 먹고는 병장기와 칼과 창과 큰 노쇠를 만들어 천하를 위협하고 진동하케하였으니 무도하고 어질지 못한자라 죽여야 한다고 만민이 황제의 명령만 바랬다. 황제는 인의로써는 가능하지 못함을 알고 이에 하늘에 우러러 탄식하기를 하늘에 天女가 있어 나에게 병기와 믿을만한 神符를주어 치우를 제압케 하소서 하니 황제는 이로 인하여 병기의 主가 되고 사방을 제압했다. 그러나 치우가 죽었다 해도 역시 천하는 다시 시끄럽게 되자 황제는 치우의 (죽은) 형상을 그려 천하에 위엄을 떨쳤으나 천하는 다 치우는 죽지 않았다. 팔방만방이 다 그의 복장이다 라 했다. *중화의 가장 오래된 사서 山海經에 이르되 황제가 응용에게 명하여 치우를 치게 하니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청하여 큰 비바람을 일으키는지라 황제가 天女에게 하명하니 천녀가 " 가믈귀신아!" 했다. 그래서 비가 그치고 치우를 죽였더라. * 공안국이 말하길 "구려 임금의 호가 치우다"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集 解皇覽에 말하되 " 치우의 무덤은 동편군 수장현 관향성중(東 平 郡 壽 張 縣 闞 鄕 城 中)에 있는데 높이는 7丈 이다. 백성들은 상시 10월이면 제사를 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있었고 백성들은 이를 치우기(蚩尤旗) 라 했다. *치우의 팔과 다리의 무덤은 산양군 거야현(山陽郡 鉅野縣)에 있으며 무거운 것과 크고 작은 것을 가려서 무덤 등을 만들게 했는데 전하는 말로는 황제와 치우가 탁록의 들에서 싸울 때 황제가 죽인 후 신체를 각자 다른 곳에 묻었으므로 이 별장(別葬)이 된 것이다. *索隱案皇 謐에 이르되 " 황제는 응당 뛰어난 인물(龍)인 치우를 죽여 그렇게 하는 것은 흉려(凶黎=九黎 = 구리)의 풍속이라. 注: 황람은 선대 황상의 무덤 일남표가 있는 책이름인고로 이는 위인들의 기록을 역은 것이다 *史記제 27권 천관서 제 5 *치우의 기는 혜성 같으나 꼬리가 휜 상이고 이것을 보면 왕은 사방을 정복할 수 있다. *'집해서광' 이 말하길 " 치우별은 한번 뜨면 열흘이나 간다" *진시황때 15년간 네 차례나 그 혜성을 보았는데 오래 가는 것은 80 일이나 갔고 길게 하늘에 뻗어 있었다. 그 후 진시황이 兵으로 六王을 멸할 수 있었고 아울러 중국 이외의 네 오랑캐를 물리쳤는데 죽은 사람이 난마와 같았다. 그것으로 초나라와 30년간 병사들은 서로 말고삐를 풀었는데 치우이래로 그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한나라가 일어나고 오성취루(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일렬로 서는 것)현상이 동녘 坪城 의 주위에 나타나자 달무리가 일곱 겹으로 싸이니 제여(諸呂)가 난을 일으켰다. 일식이 낯을 밤 같이 하니 오나라와 초나라 등 7 국이 반역했는데 혜성이 두어 길 이나 되었으며 하늘 아래 개 가 들판을 가로질러 날뛰었고 시체의 피를 먹다. *페하가 원광년 처음으로 수렵을 나가자 치우의 기를 다시 발견하였는데 길이가 하늘 반을 가렸으며 동쪽오랑캐(東夷), 북쪽오랑캐(北狄)베기를 수십 년간, 더욱더 심하게 베었다. 월나라가 망하자 의심나는데를 살피고 계량형을 지켰다. *별을 보고 풀 우거진 조선의 국경을 크게 치니 그들은 혜성 꼬리처럼 굽히며 풀 더미같이 소요했다. * ...漢나라 고조때 큰 뱀을 죽였는데 有物 에 말하길 " 뱀은 白帝(필자주: 우리민족은 해를 숭상하던 백의민족이니 白帝는 치우천황을 말하것이다)의 아들 이고 죽인 자는 赤帝(헌원)이다" *고조는(유방)처음 일어나 분유(枌楡)의 사직에 풍년을 빌었었다. 沛水에서 군령을 호령하여 패공(沛公)이 된 것이다. 곁에 치우의 사당 을 두었는데 피바른 북과 기 (釁鼓旗, 旗는 곰과 범을 그린기)가있었다. 드디어 10월에 이르러 파(灞)에서 왕은 함양의 제후를 평정하고 漢왕이 되었다. 따라서 10월은 (한나라) 년도의 머리가 되며 색상은 붉은 색이다. * 史記8 권 고조 본기 제 8 *집해응소에 말하길, " 좌전에 황제는 판천에서 싸워서 천하를 평정했다. 치우는 다섯 가지 병장기를 썼으므로 복과 상서로움을 구하는곳에 사당을 짓고 제사 지냈다. *찬이 관중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길 " 노산을 파면 水金(물에 섞인 쇠)가 나오는데 치우가 받아서 칼과 창을 만들었다. * 삭은안관자기 이르되 " 갈로산 을 개발해 보면 쇠가 나온다." * ...뒤에 4 대가 흘러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으니 왕은 사관을 불러 분유(枌楡)에 풍요롭고 근엄하게 사직을 지으라고 명했고 항상 四時의 봄에 양과 돼지로 제사 지내게 했으며 왕명으로 치우의 사당을 세우고 축관을 두었으니 장안에는 장안 축관이 있었는데 여자 무당이었다. 양무(梁巫-생명의 교량인 무당)라는 사당이다. 天地는 天社에서지내고 天水는 房中 이나 마루 위에서 지냈다. (주: 그들이 특별히 무당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무당은 그들 (우리 한민족)의 풍습이기 때문이다) * 《 漢 書 》26권 천문지 제 6 치우기는 혜성류 인데 뒤가 꼬부려 져있다. 그 기를 보고 왕은 곧 사방을 정벌하러 간다 *《 漢 書 》27권 下의 下 오행 제 7 下의 下 ...8월 동방에서 긴 별이 출현했는데 길기가 하늘을 가로 질렀고 30 일이나 갔다 점쟁이가 말하길 " 이것이 치우의 기 인데 보면 왕이 사방을 정벌할수있다" 그 뒤 수십년 동안 네 오랑캐를 베었다.* 《 漢 書 》 卷一上 高帝紀第一上 고조가 양위하니 모든 부로가 가로되 " 평생 소문대로라면 劉씨(유방)가 기괴하다 했는데 당하고 보니 귀인이라. 이는 점괘와 같다. 劉씨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 고조가 비록 양위했으나 대중은 그 지위를 인정했다.고조는 이에 패공에서 제위에 오른 것을 생각하여 黃帝의 사당을 지었고 치우의 제사를 패정(沛 廷)에서 지냈는데 거기에는 피바른 북과 기가 있었으며 기치는 다 붉은색 이었다. 그로부터 죽은 뱀은 白帝의 아들이고 죽인 자는 赤帝의 아들이다 했다. 그때 소년 호걸이 쑥대같이 일어났고 曹씨등은 울타리 등을 모두 걷었는데 沛는 子弟 삼천을 얻었다.
** 한민족 사서
* 三聖記 下篇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 환웅이 나셨는데 동두철액으로써 신과 같은 용맹이 있었고 능히 안개를 크게 일으켰다. 광석을 캐어 병장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놀라게 되었는데 호를 치우천왕 이라 했고 이 치우란 속어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하를 모두 바꾼다는 뜻이다.
* 揆園史話 太始紀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또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고 바람은 화창하여 우리 종족은 널리 퍼졌다. 우리 종족은서남쪽으로 옮겨갔고 중토에 더욱 모여들었다. 이에 자기편끼리는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적으로 알아 창과 방패로 충돌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의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과 삼베와 약과 돌의 기술을 익이고 또한 점차 정비되어 갔다.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는 단속하기에만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의 치우씨는 그 백성들과 황하 북쪽 땅에 호랑이 같이 웅거하며 안으로는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살피다가 급기야 楡罔이 쇠약해짐을 보고 출병할 때 형제 종실에서 81인을 선발하여 모든 군사의 두령을 삼고 葛盧산의 쇠를 캐서 갑옷과 긴 창과 가지달린 창과 큰 활을 만들고 정비하여 탁록(涿鹿) 에 나가서 아홉번이나 연전연승 하니 그 위세가 비 바람같아 천하에 떨쳤고 한해만에 무려 아홉제후를 빼앗더라. 다시 옹호산(雍狐山)에가 수금(水金)을 캐 예리한 창과 여러 가지 모형의 창을 만들고 군사를 재정비 한 다음 洋水를 떠나 空桑에 이르렀는데 공상은 지금의 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치니, 죽어 자빠진 시체는 들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였다. 이때 유망이 소호(少顥)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큰 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울 때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이 혼비백산하고 소호는 크게 패하여 황급히 물러가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가서 되돌아 탁록(涿鹿)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천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 이를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 라고 한 것이다.이때에 헌원(軒轅)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천제의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이에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참살하니 그 죽은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흔들리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연)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몰랐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 강한 것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참패하였다.雲급軒轅記에 "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銅頭鐵額)" 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놀라움이 매우 심하였음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 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도 헌원이 여러 번 패하더니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거(指南車? 나침판을 장칙한 수레?)라는 수레를 만들어 놓고 싸울 날을 기다렸다.이때 치우씨가 하늘의 형상을 관찰하고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알게 되고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 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웅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 에 의하면, 치우씨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감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하는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다르기에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치우씨가 물러나 돌아오자 중토는 숙연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史記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尙書의 呂刑編에 또한 "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 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 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 이하 생략-
** 맺는말 . 원시 부족사회에서 각 부족이 패권을 다투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치우 이전 싸움은 단지 돌팔매와 활뿐이었으나 치우가 노산에서 구리와 쇠를 개발해 병장기를 만들었으므로 치우는 병기의 원조이며 또 구리 투구에 쇠 가면을 했은즉 이것은 도때비상 같은데 이 도깨비상은 그후 5 천여년이 지나 그의 후손들로부터 붉은 악마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 악마상의 본 뜻은 신라 기와장에도 있드시 한민족 말로 도깨비라 하는데 이는 쇠 녹이는 접시가 도가니 이고 쇠 녹이는 사내가 도가니아비 > 독깨비가 된 것이며 바로 치우의 동두철액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치우는 軍神이다. 한, 중 역대 왕들이 출전시 반드시 치우능에 제를 올린 것도 한, 중이 모두 같다. 그러나 진정한 武 란 싸움을 그치는 것이다. 창힐(倉頡)이 글을 만들 때 止+ 戈 을 한것이 바로 '武' 자 이다. 이제 지구는 일일 생활권에 속하고 만약 지금도 병기를 사용한면 이 지구를 수십 차례나 파괴하고도 남을 핵이 있다. 우리 한민족의 시원인 환인의 천부경에 이르되 종족의 울타리를 열고 한 덩이 가족이 되어 공생번영 하는 것이 홍익인간이니 이에 결론을 말한다.여기오시는 세계 모든 관람객은 더이상 혈전을 그치고 서로 사랑하고 상부상조하여 세계인들이 88 서울 올림픽에서 외치던 우리는 하나, 즉 위아더월드가 되게 할 것을 치우 군신께 빌어야 할 것이다.
2007. 1월 치우능 비문(안내판문) 초안 우리: 구 길 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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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蚩尤陵園 飼堂 碑文 (案內文) 初案
序言. 蚩尤天皇史記 各異民族史 我田引水格, 然 核心卽 蚩尤 丙機元祖 乃至軍神同 乃 拔取核心 各其史書 引用此書碑文
韓民族史書 桓檀古記云 蚩尤卽 14世 桓雄 慈烏支天王也. 其活動舞臺卽 涿鹿包含 今山東省 一代. 朝鮮以前 韓民族 族名曰 培達 又 人之意 구리(kuri). 此 구리(kuri). 中華史書曰 東夷然 東夷卽 中華坐中 四方族名曰夷卽 韓民族非好用語也. 二十五史云 三苗族曰 九黎, 九黎曰 古天子之名, 又曰 九黎之國王曰 蚩尤, 魏書云 來藁離 東明 相逢三人於 訖昇骨 故 九黎, 藁離卽 韓民族語 구리(kuri)之 音借 漢字故 九黎, 藁離卽 高句麗, 高麗之 原語也.
** 中華側 史書
* 史記云軒轅之時 神農氏世衰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弗能征 於是 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享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莫能伐...* 正義龍魚河 圖云「黃帝 政 有蚩尤兄弟 八十一人 並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弩 威振天下 誅無道 不仁萬民欲令黃帝 行天子事 黃帝以仁義不能 禁止蚩尤 乃 仰天而歎 天遣玄女 下授黃帝兵信 神符 制伏蚩尤 帝因使之主兵 以制八方 蚩尤沒後 天下復擾亂 黃帝遂畫蚩尤形 以威天下天下咸 謂 蚩尤 不死八方萬邦皆爲弭服 *集解皇覽曰「蚩尤冢在 東平郡 壽張縣 闞 鄕 城 中 高七丈 民常十月祀之 有赤氣出 如匹絳帛 民 名 爲 蚩 尤 旗 肩髀冢在山陽郡鉅野縣重聚 大小與 闞 冢 等. 傳言黃帝與 蚩尤戰 於 涿鹿之野 黃帝殺之 身體異處 故別 葬之」索隱案皇甫謐云 「黃帝使應龍殺蚩尤 凶 黎 之谷」 或曰 黃帝 斬蚩尤于 中冀 因名其地曰 「絶轡之野」注 「皇覽」書名也 記 先代 冢墓之處 宜皇王之省覽 故日皇覽 是 魏人王象 繆襲等所撰也. * 《史 記》 卷二十七 天官書第五 ....蚩尤之旗 類彗而後曲象 旗見則 王者 征伐 四方....集解徐廣曰 蚩尤也 旬 一 作營 ....秦始皇之時 十五年 彗星 四見 久者 八十日 長或竟天 其後秦遂 以兵 滅六王 幷中國外 攘四夷 死人如 亂麻 因 以 張 楚 並 起 三十年之閒兵相駘藉 不可勝數 自蚩尤 以來 , 未嘗若斯 也.* ....漢之興五星聚于 東井平城之圍 月暈參 畢七重 諸呂作 亂 日 蝕 晝 晦 吳楚七國叛逆 彗星 數 丈 天狗 過梁野 及兵起 遂伏尸流血 其下 元光 元狩 蚩尤之旗 再 見 長則 半天 其後 京師 師 四出 誅夷狄者 數十年 而伐胡 尤 甚 越之 亡 熒惑守斗 朝 鮮之拔 星茀于河戍 兵 征大宛星茀 招搖 此其 犖犖) * ...漢興 高祖之 微時 嘗殺大蛇 有物曰 「 蛇 白帝子也 而殺者赤帝子 」 高祖初起 , 禱豐枌楡 社 沛 ,爲 沛公 , 則 祠蚩尤 ,釁鼓旗 遂以十月至 灞上 與 諸侯 平咸陽 立爲 漢王 因以十月爲年首 而 色上赤 * 《 史 記 》 卷八 高祖本紀第八 * ...集解應劭曰 左傳曰 黃帝 於 阪泉 以定天下 蚩尤 好五 兵 故祠祭之求 福祥也 * 瓚曰 管仲云 『割盧山 交而出水金 從之出 蚩尤受之 以作劍戟 * 索隱按管子云「葛盧之山發而出金」 今注 引發, 作 ,交 , 及 割 皆 誤 也 * 後四歲 天下已定 詔御史 令豐謹治枌楡社 , 常以四時春以羊彘祠之 令祝官立蚩尤之祠 於長 安 長 安置祠 祝官 女巫 其梁巫 ,祠 天地 天社 、 天水 、 房中 堂 上 * 《 漢 書 》 卷二十六 天文志第六 ...蚩尤之旗 , 類彗而 後曲 , 象旗 見則 王者 征伐 四 方.* 《 漢 書 》 卷二十七下之下 五行志第七下之下 * ...八 月 , 長星出于 東方 , 長終天 , 三十日去 占曰 「 是爲蚩尤旗 , 見 則 王 者 征 伐 四 方」 其 後 兵 誅 四 夷 , 連 數 十 年 * 盡讓高祖 諸父老皆曰 「 平生所聞 劉季 奇 怪 當貴 且 卜筮之 莫如 劉季 最吉 」 高祖數讓 衆莫肯爲 高祖 乃 立爲 沛公 祠 黃帝 祭 蚩尤 於沛 廷 而 釁鼓旗 幟皆赤 由 所殺蛇 白帝子 殺者 赤帝子 故也 於是 少年 豪吏如蕭 、 曹 、 樊噲等 皆爲 收 沛子弟 得 三千人. (以下省略)
** 韓民族 史書
** 三聖記 下篇 ...又數傳而有慈烏智桓雄神勇冠絶以銅頭鐵額能作大露造 九治而 採鑛鑄鐵作兵 天下大畏之世 號爲蚩尤天 王蚩尤俗言 雷雨大作 山河改換之義也.) * 揆園史話 太始紀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同遂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麻.藥.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河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鎧.矛.戟.大弓.고矢, 一幷齊整, 乃發涿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대]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揮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涿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탁鹿之野, 又大破之.《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伏尸滿野」者, 是也.*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於 涿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 淮岱.冀연之地, 盡爲所據,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급軒轅記》之所謂 蚩尤始作鎧甲.兜무,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時蚩尤氏 * 仰觀(天)[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황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 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영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在東平郡.壽張縣.감鄕城中, 高五丈. 秦.漢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旗,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蚩尤氏, 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 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감,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安枕高臥.《史記》所(云)「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涿鹿之(河)阿遷(徒)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以下 省略 -
* 結言. 原始部族社會 戰於覇權 各部族 當然之事然 蚩尤以前 戰單石戰 及弓 然 蚩尤 開發 銅鐵於 山東省盧山 作各種兵機卽 兵機原祖 又着 銅頭鐵額故 鬼面象 此鬼面象此後 5千餘年 起後孫 赤色惡魔象 然本意鬼面象卽 新羅 瓦紋 鬼面象名 韓民族語曰 도깨비(DOKABI) 卽 冶金盤 도가니(DOKANI), 冶金夫曰 도가니아비(DOKANIABI) > 독깨비(DOK KA BI)卽 此從 蚩尤之 銅頭鐵額. 今 蚩尤卽 軍神也 中, 韓 歷代王 出戰時 必有祭 蚩尤陵故 軍神 同中韓. 眞正武卽 止於戰, 倉頡製字 武意卽 止,戈卽武也 今 地球 一日 生活圈 若今 兵機使用卽 餘於破壞地球數十次 核保有卽 韓民族 始原 桓因天帝 天符經云 種族開鉅爲一環家族 共生繁榮曰 弘益人間 乃言結論 此來蚩尤陵 世界觀覽客 祝於蚩尤軍神 止血戰 相愛相扶相助 諸唱世界人 88 서울 올림픽 We are the world 也
2007.1月 蚩尤陵 案來板 初案 우리 : 具 吉 秀. 書
* 이 비문 초안은 개인이나 개인 카페의 일이 아닙니다. 잘 되면 고구려의 역사를 먹으려는 동북공정을 역동북공정의 초석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 많은 독자님이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비문은 초안입니다. 중국 당국과 협의 하는 과정에서 삭제될 부분도 있을지 몰라서 좀 길게 써졌으나 필자 생각에는 빼고 싶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독자님들께서는 이 글을 여러 카페에 올려서 될 수 있는 한 여러분이 읽으시고 여러 의견을 수렴코자 합니다. 따라서 이 비문을 읽으시고 다른 의견이 있다면 꼭 꼬리 글을 올려 주시고 다른 카페에 게신 분은 아래 주소카페 게시판 '한민족 산하' 의 이 글에 꼬리 글이나 Re로 의견을 말해 주시면 앞으로 수정 문에 참고하겠습니다. 애국, 애족은 말로만 하는것이 아니니 좀 번거로우시겠지만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저자.
고대문자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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