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언제나 자신이 만들어 왔고 앞으로 누구라 해도 자신이 만들어 나갈 것이지만 정작 그 삶들 속에는 기억되지도 못하고 명멸(明滅)해버린 삶들이 흔하다. 그래서 안타깝다.
내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 가운데는 이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시간동안 잊혀진 삶들을 찾아보는 것도 있다. 나는 이것을 ‘비어있는 곳’을 찾는다고 말해왔다. 목숨을 이어가는 수준이 아닌 이 목숨까지 생겨오는 동안의 그 빈 곳을 나는 항상 느끼며 산다.
‘멸실환(滅失環:Missing Link)'은 일종의 발견되지 못한 존재(存在)를 의미한다. 생물이 진화해오면서 분명 이론상 존재해야할 단계가 있음에도 현재에 찾지 못하고 있는 그런 생물 종(種)을 말한다. 나는 이것을 우리 가운데 비어버린 시대의 이야기나 우리가 놓쳐버린 선대(先代)의 삶 중에서 찾아보는 셈이다. 이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과정을 모르고 오늘이라는 결과에만 희희낙락하는 꼴이 된다. 그저 오늘이 내 몸에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장에 보아도 그렇다.
신문의 한 구석을 장식하는 부음(訃音)란에는 그래도 이름 석 자와 그 사람의 연대기를 짐작할 만한 이력들이 담겨있다. 거기에서도 남겨지는 기억들은 차별된다. 잊혀져서 좋은 인생이란 없다. 하물며 이 숱한 삶 속에서 묻혀졌고 잃어버린 우리의 존재고리가 있다면 그 소중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의 시대는 그를 찾는 작업마저 수월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 땅의 근현대사는 기록이 잘 남아있지 않은 간난고초의 시대였기 때문이며 그 상황은 여전히 정리되어있지 않다.
지금부터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볼까 한다.
이십세기 초 대한제국마저 일본제국주의의 기치에 합병되고 난 후 ‘우리 민족을 지켜주던 자존심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지극히 간단한 의문에서 이 기행(紀行)은 시작된다.
지난 세기 우리 역사 속 잊혀진 현장의 여러 고리(環)가운데 분명 존재했던 <그>를 찾아보는 길은 그리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네의 관심이 그쪽과는 관계없이 너무도 소홀했고 게다가 분단의 역사는 서로가 함부로 자신들 나름의 역사관을 만들어내면서 공통점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했다. 좀 더 깊숙이 살펴보면 <그>의 행적이 이십세기 초반부터 중반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국체상실의 격변기에 직접 걸쳐져 있는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 이었다’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북아시아를 한 분야에서 주름잡고 호령한 사람이며, 그를 계승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 시대의 탓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의 행적을 쫓으면 쫓을수록 우리 시대가 잃어버리고 있는 지난 시간의 빈 계단을 느낀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막을 수 없이 거침없이 흐르는 시간과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내밀한 민초(民草)의 역사가 우리에게서 <그>를 빼앗아 간다.
21세기 초다. 이 시대는 그나마 기록의 시간과 도구가 많다. 그렇다고 잊혀질 삶이 적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을 보는 것은 이 땅에서 태어나는 자의 기본적인 의무다. <그>를 위해 오늘 술 한 잔을 꺾는다. 나의 시대에도 잊혀짐이 적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처서(處暑)가 지나고 백로(白露)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완연한 가을 햇살의 기운이 진소산(鎭蘇山)자락에 있는 석생(石生)의 초가집 한거(閑居)에도 비쳐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한자로 읽기보다는 언문으로 진솔산이라 편하게 부르는 그 산에는 예부터 바람의 떨침이 유명하여 충주(忠州)인근에서는 묏바람 골로 익히 알려져 있다. 예년 같지 않게 금년의 이 계절에는 어쩐 일인지 바람이 잔잔하기만 했다. 잠시 바람을 쉬게 만들고는 바로 겨울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가을이 없는 겨울나기는 준비 없이 추위를 맞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나라꼴이 엉망이라는 건 시골구석인 이곳까지도 이미 소문이 날 만큼 나 있는 상태였다. 수년전(1905) 일본이 아국(俄國, 러시아)과 싸운 끝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은 이미 주권을 박탈당한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다. 일제의 발걸음은 성큼성큼 조선 땅으로 디뎌 와서 한성에 통감부(統監府)를 두어 이른바 보호정치를 실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뒤이어 고종(高宗)황제께서 퇴위하고 순종(純宗)께서 즉위한 융희(隆熙)원년이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빌려온 1천3백만원(圓)의 국채(國債)를 갚겠다는 민족경제의 자립부흥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민중들의 열렬한 지원을 받으면서 일어났지만 통감부의 압력과 통감부 산하의 전위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개입하여 조직적으로 탄압을 가하자 이면에서 분열이 벌어져 길게 끌지도 못한 채 유야무야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은 이미 조직을 가동한 조선침탈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선대(先代)부터 훈장을 해온 집안에서 자란 석생(石生)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지는 않아 이런 격변의 세상이 쉽게 맑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성에 있는 친구들로부터도 일년에 두어 차례 상세히 작금(昨今)돌아가는 일제의 침략상황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최근 수년간 일진회가 일본의 무력전위(武力前衛)로 일본 내의 고수(高手)들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에는 깊은 우려를 느꼈다. 이미 몇몇 알만한 조선의 검객명가들이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실도 공공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일제는 조선 내 산재한 무술명가들의 뿌리를 자르려 덤비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석생은 했다. 고희(古稀)가 넘은 석생으로써는 칼을 쥐고 그들과 정면으로 승부하기에는 기력의 문제가 분명 있었다. 아무리 조선 땅 제일의 검객 자리라는 칭호를 지난 이십여 년 간 검호(劍豪)들 사이에 듣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이십여 년 전의 일이었고 또한 일대일의 정상적이고 정당한 비무일 경우였다.
사랑방으로 돌아온 석생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 방 옆 족자 뒤편에 조그마하게 딸려있는 밀문(密門)을 열었다. 그곳은 그가 아끼는 예도 두 자루가 항상 조용히 숨죽이며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유가(儒家)의 적장손인 그로써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검사(劍士)로써의 다른 얼굴을 모르길 원했다. 그래서 방 한 구석에 이 밀문(密門)을 만들 때도 꼭 비밀창고를 만들 듯 조심스럽게 혼자서 공사를 했다. 공사라야 황토벽을 이중으로 겹쳐 놓는 것뿐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챌까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검(劍)은 벼리가 잘 서 있는 상태였다. 광목으로 감싼 검신(檢身)을 벗겨 보는 순간부터 석생은 이미 검사가 되어 있었다.
스승은 그에게 우리 검(劍)의 여덟본세(本勢)를 가르쳤고 그는 그 중 사(四)본세를 평생 갈고 다듬었다. 스승이 가르쳐준 투로(套路) 익히기는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단지 유학자 집안의 자손이 밤마다 몰래 산(山)에 올라 벌거벗은 채 칼을 휘둘러야 했던 일이 못마땅했던 적도 있었지만 어느 틈에 그 공활함을 매일 즐기게 되고 말았다.
석생이 검병(劍柄)을 움켜잡고 격중(擊重)의 자세를 취했다. 팔본세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 수법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인간의 몸새로 표현하는 것으로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웠다. 천천히 하늘의 넓은 자락으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칼에 몸의 모든 무게를 싣는다. 말은 쉬우나 수십 년의 수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쉽게 천착하지 못하는 수법이기도 했다.
스승은 격중지중(擊重之中)을 강조하셨다. 단순히 무거운 것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커다란 중심(中心)이 들어차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문뜩 애제자이자 하나뿐인 아들인 윤겸호가 떠올랐다. 그에게 맨 처음 이 수법을 가르쳤을 때 그 애는 이렇게 물었다.
“중(重)이 깊으면 무엇이 생깁니까?”
석생은 자식의 총명함에 화들짝 놀랐지만 내색을 않고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중(中)이 옅으면 중(重)은 생길 것 같으냐?”
그런 석생이 애지중지한 윤겸호도 벌써 불혹(不惑)이다. 그는 격중의 수법에서 바로 은검(隱劍)을 배우기 시작한 셈인데 이는 석생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다. 검행(劍行)에 나섰다가 경상도 땅 어딘가에 머문다는 전갈만 받았지 그 이후는 모르고 있다. 윤겸호만큼이나 석생도 서로를 믿는 터이지만 나이가 자꾸 먹어가면서 그저 죽기 전에 한 번 보았으면 할 뿐이었다. 이미 검의 수법은 자식이 그 나이의 자신을 훨씬 앞서 있다는 생각을 하면 못내 뿌듯하기까지 했다. 남겨둔 것이 있음은 항상 즐거운 일임에 분명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석생은 검을 정갈히 면포로 감싸서 다시 밀문 안으로 들여 놓았다. 오늘따라 외자식에 하나뿐인 제자이기도 한 겸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런 날은 집 뒷담 아래 묻어둔 작년 햇추국(秋菊)으로 담근 술을 꺼내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의 작태가 떠올라 이내 생각을 바꿔 먹었다.
한동안 수련하지 못한 나검(裸劍)을 연마하기로 작정했다. 오늘 밤에는 진솔산의 짐승들은 모두 제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다. 석생이 칠순 나이에도 벌거벗고 춤을 출테니 말이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산을 그렸다. 이내 숲 한 구석이 눈에 선했다.
백로(白露)날 아침 석생의 집 울타리에 이슬이 진하게 맺혔다.
지난 밤 뚝 떨어진 기온 때문에 늦가을처럼 주변 초목(草木)에는 찬 이슬까지 내렸다. 석생은 수십 년의 습관대로 뒷마당에서 겹보(步)걸음을 걷고 있었다. 겹보란 글자 그대로 한 발을 디딘 상태에서 다른 발로 디딘 발의 사방을 밟는 것으로 몸의 중심을 곧게 만드는데 훌륭한 기법이었다. 보통 두 시진에 걸쳐 겹보를 걷고 나면 마당에는 둥근 발 그림자원이 그려진다. 일흔 나이와는 관계없이 매일 거르지 않은 이 수련은 일종의 끼니 챙기기에 다름 아니었으므로 끝난 후 석생은 늘 깊은 포만감을 느끼곤 했다.
스승은 석생의 둔(鈍)함을 사랑했었다. 한번은 스승이 겹보 수련을 하루 종일 시킨 적이 있는데 그 때 석생은 한번 지나간 투로(套路)를 그대로 따라하기위해 아예 그 자리자리 마다 작은 표싯돌을 박아 넣어 두었다. 그 모습을 스승이 보시고 ‘돌처럼 살아라’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석생(石生)이란 아호(雅號)가 되었다.
새벽 수련이 끝나면 사랑방에서 면포(綿布)로 애장검을 닦는다. 벌써 수십 년째 매일 손질하는 칼 중 하나는 바로 스승이 물려주신 것으로 서명(瑞名)이란 검 이름이 붙어있다. 스승은 이 검을 석생에게 주시고 ‘나 이젠 가도 되겠구나’ 하시면서 홀연히 떠나셨다. 간 곳이 어디인지, 생사(生死)조차도 확인하지 못한지 삼십 여년이 넘었다. 석생은 스승이 떠난 그 날을 스승의 생신(生辰)으로 알고 지내고 있다. 그에게 스승은 돌아가신 것이 아닌 셈이었다.
스승이 석생에게 가르친 검의 요체는 여덟본세에 모두 녹아 있었다. 석생은 격중(擊重), 은검(隱劍), 천격(天擊), 지격(地擊)의 네 수법만으로도 조선제일검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자식인 겸호에게는 나머지 사본세(四本勢)를 오히려 더 깊이 가르쳤다. 사람마다 몸세가 달라 이 여덟본세를 모두 담을 수 있는 기재(奇才)는 기대하기 어렵고, 범인이라면 겨우 한 두 수법에 만족해야 할 정도로 체득(體得)은 쉬운 경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석생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지난 오십 년여 검로(劍路)를 걸으면서 자신이 재주가 뛰어난 인물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검은 끝이 없었고 석생 자신도 때로 깊은 좌절에 절망도 하였다. 특히 스승이 가르쳐 준 기본이자 전부인 여덟본세를 떠올릴 때마다 무능(無能)이란 자책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것은 적수(敵手)가 없었던 지난 이십여 년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지 타인과의 대결이 수련의 목적은 아니었다.
검을 마무리 닦음질하고 나서 창문을 열어 이슬 기운이 아침 햇빛으로 엷은 수증기가 되어 피어오르는 진솔산을 보았다. 오늘따라 석생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왠지 모를 호승심이 끌어 올랐다. 근래(近來) 보기 드문 징조여서 석생마저도 적이 놀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럴 때는 조용히 밤 수련을 하는 게 좋지, 석생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오늘 밤 산 춤을 한바탕 춰볼 생각에 절로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