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의 군정경찰을 대통령령 제18호에 따라 내무부 산하 치안국으로 개편함.
그리고 이후 1949년 대통령령 제75호로 치안국 보안과 산하에 철도경찰청 본대가 설치됨. 이전엔 교통부 교통경찰청이 이를 독자적으로 담당했지만 행정일원화를 위해서 치안국에 흡수통합된거임.
철도경찰대 본대는 17개의 철도경찰서를 운용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철도 공안업무와 전투경찰로서 업무를 수행함.
본문에 설명할 개성철도경찰대 역시 철도경찰대 본대 산하의 지방철도경찰대 중 하나였음.
1950년 6월 24일 기준, 개성철도경찰대의 총원은 220명이었으며, 경감 1명, 경위 14명, 경사 22명, 순경 184명(형사 13명, 여경 3명)으로 이루어졌었음.
개성철도경찰대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전공을 여럿 세웠는데, 1950년 3월 30일 관하 동두천지대에서 급습한 북한근 30여 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 다음날인 21일엔 관하 청단지대에서 기관차 월북사건을 막기도 했음.
한편 개성철도경찰대는 개성에 주둔한 제1보병사단 12연대와 이러한 북한과의 충돌에 협조하면서 대비하고 있었음.
1950년 6월 10일, 내무부 치안국은 경찰비상사령부가 "북한의 대거남침 징후를 포착함"에 따라 경기, 강원의 경찰에 갑호 비상근무령을 내림.
그리고 대망의 6월 25일, 사리원에 주둔했던 북한군 제1군단 제6보병사단이 개성을 침공함.
제6보병사단 예하 제15연대와 제13연대가 바로 국군 제12연대의 정면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방어할 12연대의 상태가 좋지가 못했음.
6월 24일 12연대 총병력의 1/3인 754명이 휴가와 정기외박을 하러 떠났던 거임. 북한군 2개 연대가 쳐들어오는데 이를 막을 병력의 3분의 1이 사라진 것만 해도 거지 같은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더 안 좋은 일까지 터짐.
당시 개성역 광장에 위치한 개성철도경찰대 본부에서 당직근무 중이었던 통신병 현효진 순경의 증언임.
"...... 그땐 괴뢰군이 내려오니까, 상황이 급박하니까 본대에는 유선으로 보고했지요, ...... 그땐 전투가 없었어요. 개성엔 국군이 없었으니까. 전투가 있겠어요? 걔들이 그냥 밀고 올라 온 거지, ...... 송악산에서 포탄이 터지만, 본부에서 다 들리죠. 걔들 신호탄이 터지기 전까지 포탄소리는 못 들었어요. ......그때 그 괴뢰군들은 국방색, 국군복을 입고 있었어요. ...... 걔네들은 산에서, 송악산 그 산에서 내려왔어요. ......"
북한군 일부 병력이 후방 교란을 위해 국군 복장을 한 채 송악산과 개성 시내에 침투해 있던 거임. 그 결과 제12연대는 송악산 292고지를 빼앗겼고, 488고지에서 포탄을 두들겨맞다가 후방에서 들어온 공격으로 털려버림.
국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T-34 탱크를 끌고 초소의 헌병을 속인 다음 개성 명륜동 삼거리의 헌병검문소로 돌진해 헌병들을 압사시켰다는 기록도 있으니 말 다한거지.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인데 일선 진지까지 박살난 12연대는 남은 병력을 가지고 어떻게든 응전했지만, 결국 문산 방향으로 철수하게됨.
그러나 개성철도경찰대는 후퇴하지 않음.
25일 05시 30분,
대장 감봉룡 경감을 필두로, 개성철도경찰대 50명이 긴급 소집됨. 이들은 국군 제12연대가 패퇴한 걸 알면서도, 북한군 2개 연대를 50명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알면서도 개성역을 지키기로 결의함.
06시, 북한군이 개성시로 돌입함. 감봉룡 경감은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전면 방어를 위해 3개의 제1보초선을 배치했는데, 제일 왼쪽의 제1보초선의 경우 배치된 병력이 순식간에 전멸한 것으로 추정됨.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차이 때문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두 제1보초선 역시 비슷한 이유로 제1, 2 방어선으로 철수함.
07시 30분, 통신이 두절되고, 개성역 전방도로의 방어가 무너짐. 경찰대원들은 완전히 고립되어, 사면으로 북한군에게 포위당하게됨. 그러나 대장 이하 살아있는 모든 대원은 포기하지 않고 캘빈 M1 소총과 99식 소총으로 저항을 계속함.
08시, 개성시내 동쪽 방향에서 T-34 탱크 5대가 개성역으로 진격해 엄페물이었던 본부 건물마저 파괴함. 결국 감봉룔 경감이 지휘하던 제1방어선이 무너졌고, 대원들은 제1, 2 방공호로 산개함.
북한군은 제1, 2 방공호에 고립된 경찰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던지며 집중사격했고, 절대적인 숫적 열세와 탱크를 잡을 수단이 전무했음에도 대원들은 방공호를 뛰쳐나와 방어전을 이어감. 이때 절반 이상의 경찰대원들이 전사함.
08시 30분, 최후가 가까워지자, 마지막 수단으로 남은 경찰대원들은 북한군을 향해 옥쇄를 감행함. 결국 대장 감봉룔 경감을 포함, 제1 방공호의 대원들은 전원 전사하고, 제2방공호의 대원 중 단 3명만이 탈출에 성공함.
이것이 한국 철도경찰이 개전 당일 북한군에 맞서 치룬 개성역 전투임. 개성철도경찰대는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요충지였던 개성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최후까지 그 임무를 다함. 또한 이들의 희생으로 제12연대의 잔존 병력이 임진강으로 재집결하는 시간까지 벌 수 있었음.
혹자는 이 전투가 어차피 질 전투에 무의미하게 희생했다고 하거나, 개전 초기 영웅적인 전과로 국군이 북한군의 작전을 상당히 지연, 방해한 다른 전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평가할지도 모름.
그러나 위의 개성역 전투는 개전 당시 국군의 필사적인 응전과 더불어,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개전 당시 목숨 바쳐 산화한 또다른 사례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윗세대 분들로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함.
한국전쟁 동안 17682명의 경찰이 죽거나 다침. 시작은 분명 좋지 못했고, 온갖 찐빠와 병신 같은 일이 70년이 넘게 이어진 문제점이 넘치는 집단이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속하는데는, 그리고 오늘도 대한민국의 치안이 유지되는데는, 이분들의 희생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음.
한국전쟁 개전 당일 철도경찰의 눈물어린 분투 - 군사 마이너 갤러리 (dcinside.com)
첫댓글 당시 여경이 있다는것도 신기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