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혜정광경성목, 현덕정문순선헌 숙예인의명신희,강고원충선숙혜, 목정공우창공 (34왕)
제10대 정종(靖宗)실록
1.정종의 실리책과 고려의 안정.
(1018년-1046년, 재위기간 : 1034년 9월-1046년 5월, 11년 8개월)
정종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사회는 거란 침입으로 야기된 혼란을 극복했고 사회 전반에 팽배해진 위기의식을 불식시
키는 한편, 사회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일련의 안정책을 단행하게 되는 것이다.
정종은 현종의 차남이자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101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享), 자는 신조(申照)다. 5세 때 내
사령과 평양군으로 책봉되었고, 1034년 9월 19세의 어린 나이로 임종에 직면한 친형 대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0
대 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서경과 개경에 팔관회를 열고 대사면령을 내려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
최제안, 최충, 유지성 등을 각각 예부, 이부, 형부, 공부상서로 기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또한 온건파인 황보유의를
내사문하평장사로 임명하여 거란과의 화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북 창성에 성을 쌓아 주민을 이주시키고 덕종대에 시작된 천리장성 축조작업을 지속시켜 국방
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거란에서는 통첩(通牒 문서로서 상대방 나라에 보내는 의사표시)을 보내 장성 축조를 중
지할 것과 동시에 국교를 정상화시킬 것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고려는 자국의 국방을 위해 성을 쌓는 것은 당연하며,
거란에 억류된 고려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거란이 무력으로 차지한 압록강 지역을 돌려주면 자연스럽게 국교는 정상화
될 것이라고 논박한다.
이처럼 고려가 타협책과 강경책으로 양면전략을 구사하자 거란은 일단 압록강에 해군을 보내 고려에 대해 무력시위
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결국 화의책으로 억류중인 사신들을 돌려보냄으로써 1038년 4월 양국의
외교관계는 정상화된다. 이에 따라 고려는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파견하고 그 해 8월부터 다시금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대외관계는 일단락되고, 이후부터 거란이 멸망하는 12세기(1125년)까지 양국간의
평화가 지속된다.
평화기가 시작되었지만 고려는 장성 축조작업을 중단하지 않았고, 1044년 마침내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
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한다. 천리장성의 완성으로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북방족의 내침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전초기지를 마련했고, 또한 북방문화에 의한 고려 풍속 침해를 막아낼 수 있는 문화방비벽을 얻게 된 셈이었다.
이 같은 국방력의 증대는 고려사회를 외침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내부 기강 확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1039년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하고, 1045년에는 악공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진출하는 것을 금
지시켰으며,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는 등 정종은 변방의 안정을 바탕으로 일련의 사회안정책을 실시한다.
하지만 정종의 치세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올라 기력을 쇠진한 탓에 몸이 병약해졌고, 나약
한 몸으로 정사에 몰두하다가 1046년 초에 중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 5월 이복동생 낙랑군 휘에게 선위
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재위 11년 8개월 만이었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정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거란은 탐욕스럽고 사나워서 신의를 맺을 상대가 아니므로 태조가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란은
발해을 배신했다는 이유 때문에 국교를 단절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현종은 국사를 바로잡기에 급급하여 외교에
신겨을 쓸 수 없었고, 덕종은 나이가 어렸으니 전쟁을 조심해야 했을 것이다..그런데 왕가도(이자림)가 거란과의 화친을
끊자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백성을 안심시키자는 황보유의의 의견보다 못하였다.
정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우리측 대부 최연가를 거란에 파견하였고, 4년에 거란측 사신 마보업이 우리나라에
왔다. 이때부터 옛날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여 그들을 감동시켰으니,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책략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정종이 선대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국가를 보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종의 능은 개경 북쪽 교외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주릉이다.
2,정종의 가족들
정종은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4남 1녀의 자녀를 얻었다. 선대 왕들과 달리 5명의 부인이 모두 전혀 혈연관계가 없
는 족외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정종의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입김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작용했다는 의미다.
5명의 부인 중 제1비는 용신왕후 한씨가 1남 형을 낳았으며, 제2비 용의왕후 한씨가 애상군 방, 낙랑후 경, 개성후
개 등 세 아들을 낳았고,제3비 용목왕후 이씨가 도애공주를 낳았다. 이들 외에 제4비 용절덕비와 연창궁주 노씨는 소
생이 없었다.
정종의 가족중 다섯 왕비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정종의 네 아들 중 장남 왕형과 왕방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나머지 두 아들은 문종대에 모두 봉작과 식읍을 받은 것만 기록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용신왕후 한씨(?-1036)
용신왕후 한씨는 단주(경기 장단)사람으로 한조의 딸이다. 그녀는 정종이 평양공으로 있을 때 혼인하였으며,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연흥궁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1035년 아들 형을 낳았다. 하지만 이때 낳은 왕형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고려사> <열전>에서도 정종의 아들이 세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어릴
때 죽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들을 낳은 그녀는 곧 정식으로 정비에 책봉되어 혜비로 불렸다. 그리고 다시 정신왕후로 봉해졌으나 1036년 7월에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문종 2년에 용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능호는 현릉이다.
용의왕후 한씨 (생몰년 미상)
용의왕후 한씨 역시 한조의 딸로 용신왕후의 친동생이다. 언니를 따라 궁중에 들어왔던 그녀는 1038년 4월 여비에
책봉(칙서로서 벼슬을 줌)되고 창성궁주라는 택호(거주하는 집을 부르는 말)를 받았다. 후에 다시 현덕궁주로 호를 고쳤
으며, 1040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 소생으로는 왕자 애상군 방, 낙랑후 경, 개성후 개 등이 있다. 사망연
도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용목왕후 이씨(생몰년 미상)
용목왕후 이씨는 부여 사람으로 공부시랑 이품언의 딸이다. 왕비 책봉 과정과 연대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호를 창성궁주라 하였고, 소생으로 도애공주가 있다.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용절덕비 김씨(?-1102)
용절덕비 김씨는 경주 사람으로 문하시중 김원충의 딸이다. 호를 연흥궁주라 하였으며 숙종 7년(1102) 3월에 죽었다.
죽고 난 다음 숙종은 그녀를 덕비에 추증하여 시호를 용절이라고 하였다. 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며 소생을
없었다.
연창궁주 노씨 (?-1048)
연창궁주 노(盧)씨의 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가 원래 궁녀로 입궁했던 것으로 봐서 귀족 출신은 아닌 것으
로 보인다.
궁인으로 입궁한 그녀는 용모가 뛰어나 정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렇지만 별다른 봉작(벼슬을 줌)을 받지 못하
다가 정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연창궁주가 되었다. 이는 정종의 유언을 따른 것인데, 문종이 정종의 유언을
실행에 옮기자 대신들이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문하성(중서문하성)과 어사대(간관)의 대신들은 노씨가 정식으롤 정종
과 혼인한 관계가 아니므로 연창궁을 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문종은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에게 연창궁을 내주었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연창궁주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문종 2년(1048년) 3월에 사망하였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3. ‘정종실록’ 편찬 관련사항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어디에도 정종,문종,순종의 실록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제13대 ‘선종실록’이 만들어
졌던 것으로 봐서 이들 세 왕의 실록도 편찬되었을 것이다.그러나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현
종실록’이 정종대 말기에서 문종대 초기에 수국사로 재직하던 최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덕종실록’과
‘정종실록’ 또한 최충의 주도로 편찬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현종실록’과 덕종실록‘은 정종대에, 그리고 ’정종실
록‘은 문종대에 편찬되었을 것이다.
# 정종시대의 세계약사
중국은 사타족 출신 석경당이 연운16주 내줘버린 후에 그곳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중, 958년 후주 세종은 요나라
원정으로 최남단 막주,영주 2개주를 되찾았으나, 뒤를 이은 송이 남은 14개주를 찾으려고 수차례 전쟁을 벌었으나.서로
의 힘의 균형을 느끼고, 연운14주의 현상으로 전연의 맹약(1004)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송나라는 처음으로 철판
인쇄법이 도입되어 인쇄문화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유럽에서는 영국에서는 데인인들이 그들이 왕 스벤1세로부터 침입해 들어와 그와(1013년) 이어 그의 아들 크누
트가 잉글랜드 왕으로 올라(1016년) 1036년에 사망하였다. 1040년까지 잉글랜드를 지배했던 그의 서자 해럴드와
1035년 덴마크, 1040년 잉글랜드를 이어 받은 적자 하르테카누트 중 그 어느누구도 그의 자질을 물려받지는 못했
다.1042년 잉글랜드는 옛날의 왕통으로 되돌아 갔으며,덴마크는 울프백작과 에스트리드의 아들인 스벤2세로 넘어갔다.
독일의 잘리어 왕조 콘라트에 이어 2대왕인 하인리히 3세는 영국왕 크누크의 딸 군힐다와 결혼했으나,얼마 못가
그녀의 아버지에 이어 그녀가 사망하자(1038년), 정치적으로 어떠한 이득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후 그는 1043년에
프랑스 아키텐과 푸아투를 다스리던 기욤5세의 딸 아그네스와 혼인한다. 이 혼인은 서유럽의 평화를 강화하고 부르고뉴와
이탈리아에 대한 황제의통제권을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독일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높이려는 그의 의도는 교황권의 강화에 맞부딪히게 되어 여의치 않았다.
첫댓글
고려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왕위에 올랐던 왕들을 생각해봅니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외세의 침략과 나라안의 정치까지
다스린다는게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제명대로 사는 왕이 얼마나 됬을까요
수명이 짧아지는 건 당연합니다.
정종이 태어난 해가 1018년도 라니
까마득한 날 들이네요
17세에 왕 에 올라 그나이에 팔관회 며 조정도 개편 했다 하니 실로 놀라지않을수 없네요
우리 애들을 생각하니
그 나이엔 ~~^^
역사적 의미를 지닌 글 실감나게 읽고 있어요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