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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병정신선양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
鳴梁海戰(명량해전)
1. 머리말
요즘, 영화 명량(鳴梁)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개봉 불과 일주일 만에 육백만을 넘어 천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가히 <이순신신드롬>이라 할 만큼 온 국민이 이순신에 푹 빠져있다. 그러나 백전백승의 성웅, 백절불굴의 인간 이순신을 알기엔 명량(鳴梁)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많은 분들이 이순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더구나 영화라는 장르는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문화예술의 역사이다, 영화 그 자체를 역사로 규정하는 우를 범할까 염려된다. 예컨대 포스터에 대문짝만하게 등장하는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 거북선이 불타는 장면, 경상우수사 배설이 화살에 맞아 죽는 장면, 백병전을 펼치는 장면, 한성을 한양이라 칭하는 내용 등등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명량해전의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하는 이유다.
2. 해전개요
1)해전일자: 정유년(1597) 9월16일(음)
2)지휘장수
조선수군: 삼도수군통제사 李舜臣(이순신), 전라우수사 金億秋(김억추), 미조항첨사 金應諴(김응함), 녹도만호 宋汝悰(송여종), 영등포만호 趙繼宗(조계종), 강진현감 李克新(이극신), 거제현령 安衛(안위), 평산포대장 丁應斗(정응두), 순천감목관 金卓(김탁).
일본수군: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쿠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 관달장(菅達長), 마다시(馬多時 or 波多新時), 軍監(군감) 毛利高政
3)참전함선
조선수군: 전투선 판옥선 13척, 비전투선 초탐선 32척.
일본수군: 전투선 중선(中船), 세끼부네(關船) 130여척 명량진입, 70여척 해협입구 대기.
*다만 전서수록본, 행록, 일본 참모본부의 ‘日本戰史 朝鮮役’ 등에 330여척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어란진 까지는 300여척이 진입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전투결과
조선수군: 13척 중 단 한척도 분멸(焚滅) 없음, 약 1천여 명 참전중 수군 및 의병 다소 사상(死傷), 사망 2명: 순천감목관 金卓(김탁), 우수영노비 戒生(계생), 부상자 3명: 강진현감 李克新(이극신), 朴永男(박영남), 奉鶴(봉학)
일본수군: 133척 중 31척 분멸, 100여척 파괴, 약 1만4천여 명 참전 중 쿠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 전사, 마다시(馬多時 or 波多新時) 전사,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 중상, 총 8천여 명 사상 추산(최소 3천5백 명 사망 추산)
3. 명량해전 직전 상황
李舜臣(이순신)은 8월3일에 선전관 梁護(양호)로부터 임금이 보내는 기복수삼도통제사(起復授三道統制使) 재임명교서를 받음으로써 120일 간의 백의종군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순신은 당일로 머무르고 있던 진주 孫景禮(손경례)의 집을 출발하여 전라도 쪽으로 서진하며 순천, 보성에 이르러 군사 120명을 확보하고 경상우수사 裵楔(배설)이 가지고 도망쳤던 판옥선 12척을 찾아내며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한다. 8월15일 이순신이 보성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보낸 선전관 朴天鳳(박천봉)에 의해 수전을 포기하고 도원수 權慄(권율)을 도와 육전에서 싸우라는 유지를 받는다.
이순신은 즉시 장계를 올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今臣戰船尙有十二), 죽기로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하면서 일본군과의 일전을 대비한다. 8월26일 전라우수사 李億祺(이억기)의 후임으로 金億秋(김억추)가 부임해오면서 격군도 기구도 없는 판옥선 한 척을 끌고 옴으로써(全羅右水使來. 船格機械, 不成模樣, 可愕.) 이순신의 전선은 13척이 되었다.
8월28일 어란포에 이르렀을 때 왜선 8척이 침입해 온 것을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두에서서 적들을 물리쳤다. 8월29일 진(陣)을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기 좋은 진도 벽파진으로 옮겼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8월30일 아프다는 핑계(稱病)로 전라우수영에 상륙한 후 9월2일 도주했다. 배설은 결국 종전 후 고향인 선산에서 체포되어 도원수 권율에 의해 참형 당했다.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이후 9월7일 적선 13척이 침입해 왔으나 역시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두에서 적을 무찔렀다. 9월14일 탐망군관 任俊英(임준영)이 왜적선 2백여 척이 어란포까지 추격해오고 있으며 이중 55척이 이미 당도했다는 정보와 함께,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온 金仲傑(김중걸)로부터 9월7일 접전에서 피해를 본 일본군들이 복수를 위해 조선수군을 섬멸한 뒤 한강(京江)으로 쳐들어갈 것이라는 보고를 받는다. 9월15일 이순신은 벽파진을 떠나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명량의 좁은 물목을 등지고 싸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명량(鳴梁, 울돌목)이라는 천험의 요새를 활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며, 그래야 일본군이 서해를 통과해서 한성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날 밤 이순신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면서 사기를 북돋았다.
4. 명량해전 전투 상황
9월16일 새벽, 왜선 133척(정유1)이 어란포를 떠나 북서류를 타고 벽파진을 통과 오전 7시쯤 울돌목 명량수로를 넘어와 조선수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이미 적선의 규모가 130여척(정유2)으로 조선 수군의 10배 이상 되는 중과부족 상황을 파악하고 피난선 1백여 척을 후방에 포진시키고 있었다. 아울러 휘하 13척의 전선 중 12척을 명량해협을 가로질러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한 후 닻을 내리도록 하였다. 오전 8시 전후하여 접전이 벌어졌으나 적의 막강한 세력에 질린 휘하장수들이 조수(潮水)를 따라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오직 대장선의 이순신만이 선봉에서 홀로 버티며 화포를 쏘면서 교전할 뿐 전라우수사 金億秋(김억추)는 두 마장(약 800m)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른 여러 장수들도 먼 바다로 물러가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급히 호각을 불고 영하기(令下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첨사 金應諴(김응함)의 배가 가까이 왔는데 거제현령 安衛(안위)의 배가 먼저 이르렀다.
이순신은 배위에서 직접 안위를 불러 이르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호령하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진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 불호령을 내렸다. 급기야 이들의 두 배가 먼저 적진 속으로 돌입하여 교전할 때 적장이 탄 배가 휘하 2척과 함께 안위의 배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었다.
안위의 군사들이 등선하려는 왜적들을 몽둥이 긴창, 수마석(水磨石) 등으로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이들이 중과부적으로 기운을 다할 무렵 이순신이 배를 돌려 바로 안위의 배에 접근한 적선 3척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에 적선들이 거의 뒤집히게 되었을 때 녹도만호 宋汝悰(송여종), 평산포대장 丁應斗(정응두)의 전선이 잇달아 협력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이때에 바다에 빠진 일본군 장수 마다시(馬多時)를 건져 올려 효수하여 적에게 보였다. 이에 일본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후 오후 1시경 조류가 남동류로 바뀜으로 조선수군에게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사기가 충천한 조선수군은 계속 대포를 쏘아 적선들을 격침시켰다. 오후 3시가 넘어서자 조류가 최강류(약 9knots 초속 5m)로 흐르고 마침 북풍도 강하게 불어와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전(火攻戰)을 전개했다. 이후 일본 군선들은 조류를 따라 수로 입구로 완전히 물러나면서 해전은 종료되었다. 해전 결과 왜적선 31척이 완전히 분멸되었으며 다수의 전선이 파괴된 채 일본군은 남해상으로 후퇴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단 한 척도 분멸되지 않았다. 다만 근접전으로 수군과 의병 등 다소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아울러 일본군 장수 중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 마다시(馬多時 or 波多新時) 등이 전사했고,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 여러 장수들이 부상했다.
이순신 자신도 이 불가사의한 승리를 천행천행(天幸天幸, 정유1), 차실천행(此實天幸, 정유2) 이라며 하늘에 그 공을 돌렸다.
5. 명량해전 직후 상황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9월16일 전투를 끝낸 후 야음을 이용 당사도(전남 신안군 암태면)로 옮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부터 어외도(전남 신안군 지도읍 지도), 칠산도(전남 영광군 낙월면 칠산도), 법성포(전남 영광군 법성면), 홍능(전남 영광군 홍능읍), 고참도(전북 부안군 위도면 위도)를 거쳐 5일 만인 9월21일 고군산도(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에 도착하여 12일간 머물렀다. 이후 10월3일 고군산도를 출발하여 변산을 거쳐 법성포에 도착하여 5일간 머문 후 10월8일 어외도에 도착하여 밤을 보냈다. 10월9일 우수영에 도착한 이순신은 인근 지역이 일본군에 의해 황폐화된 사실을 확인하고 머물기가 여의치 않자 10월11일 안편도에 도착하여 18일간 머물면서 현안해결과 향후대책을 강구한 후 10월29일 고하도(高下島)(전남 목포시 고하동)에 정착했다.
이순신은 9월16일 명량해전 이후 무려 42일간 정처 없이 서해바다를 떠돌았다. 주로 일본군의 동향파악과 조선수군 재건을 위한 병력규합과 활동지역 확보를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본수군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이때 참전한 130여척은 일본군의 선발대에 불과했으니 주력군 수백 척과 다시 맞붙게 될 경우 겨우 13척의 전선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철환, 궁시 등 물자조차 고갈되었고 사력을 다한 장졸들의 전투력마저 승산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고군산도까지 북상한 후 다시 육해상의 일본군 전황을 살피면서 남하하며 조선수군의 재건을 계획하고 있었던 이유였다.
6. 조선수군의 명량해전 승리 요인
1)물목과 조류를 이용한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이다.
이순신은 자신이 탄 대장선을 맨 앞에 포진시키고, 그 뒤에 부하들의 전선 12척을 일자진(一字)으로 포진시켜 적을 막았다.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부하들의 독려하고 후퇴를 막았던 것이다. 명량(鳴梁, 울돌목)이라는 좁은 물목(最峽 280m), 물때를 이용한 조류(最强 약 9knots 5m/s), 바람을 이용한 화공전(火攻戰)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13척의 수적 열세에도 우세한 상태의 교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또한 적의 대장선과 선봉선을 집중 공격하고, 적장 중의 한 명인 마다시를 토막 내어 효시함으로써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아군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2)전선과 무기의 위력이 월등했다,
판옥선(板屋船)은 당시 명량수로에 침입한 일본의 세키부네(關船)보다 훨씬 많은 장점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상갑판의 전투원과 판옥안의 비전투원을 갈라놓아 노군(櫓軍)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고, 선체의 판옥구조가 높아 전투원들이 높은 위치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할 수 있으므로 적들이 쉽게 기어오를 수 없어 일본군의 장기인 등선백병전이 불가능했다. 또 대형화포를 장착할 수 있는 튼튼한 참나무 구조의 전선이었다.
화포들은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 최대 사정거리 1km 이상으로 근접해서 발사할수록 명중률은 매우 높았다. 1백 내지 2백발을 동시에 발사하는 조란환(鳥卵丸)의 살상효과 또한 매우 컸다. 반면 일본의 전선은 V자형 첨저선으로 속도는 빨랐지만 삼나무 재질로 두께가 약해서 대구경의 화포를 장착하지 못했고, 등선육박전을 펼칠 수 없는 상태에서 주력무기였던 조총의 사정거리는 불과 2백m, 유효사거리 5십m 내외의 위력에 불과했다는 단점이 있었다.
3)의병들의 참전과 활약이 눈부셨다.
조선수군의 승리요인에서 의병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馬河秀(마하수), 吳益昌(오익창), 金安邦(김안방), 白松湖(백송호), 丁運熙(정운희) 등 많은 해상의병들이 명량수로 북서단에 1백여 척의 향선(鄕船)을 동원하여 후방지원을 펼쳤다. 젖은 솜이불로 탄환을 방어하고 동과(冬瓜)로 수군의 갈증을 풀어주는 등 군수물자 지원으로 조선수군 승리에 기여했다.
이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때 白振南(백진남), 金聲遠(김성원), 文英凱(문영개), 卞弘源(변홍원), 白善鳴(백선명), 任永凱(임영개), 金澤南김택(남) 등 십여 명이 각각 피난선을 가지고 와서, “듣자하니 공이 방금 피난선으로 하여금 먼 바다에 열을 지어 군대같이 가장하라 하시니 이 기회에 같이 나아간다면 파죽의 승세가 오직 이 한 번에 있을 것이오.” 하였다. 전라도 해안지방 의 많은 의병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의곡, 의복 등 병참지원을 하는 등 이순신의 요청에 자발적으로 부응했던 것이다.
7. 맺음말
즐기자, 마음껏 즐기자. 영화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등장한 이순신이다. 다만 영화로서 즐기라는 것이다. 본디 영화란 최대의 관객동원이 목표다. 재미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오리치는 명량의 바다, 침몰해가는 왜선의 격침, 정신없이 몰아치는 백병전 등등 가히 스펙타클이 넘친다. 영상, 촬영, CG, 기술은 가히 수준급이다. 개봉첫날 함께 영화를 보았던 옆자리 관객은 내내 긴장감이 넘쳤다고 했다. 내가 아는 젊은 지인은 마치 아이언맨, 어벤져스 같은 액션영화를 본 기분이라고 했다. 맞다. 이 영화는 장르가 액션, 드라마다. 어떻게 중과부적의 전투를 이겼다는 것인지, 물때가 왜 바뀌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도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지는 말라.
다만 우리는 온 나라가 아니 이 시대가 강력한 리더십을 부르고 있는 이 때에 이순신이 살아 돌아왔다는 데 큰 의미를 둔다. 백의종군 이후 맨손으로 군사, 군량, 군선, 군기를 긁어모으는 홀로서기 자립정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도전정신, 단 한 사람이라도 천명의 군사가 두렵지 않다는 긍정정신, 쫒기는 가운데도 전투를 대비하는 준비정신 등등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순신에게 배워야할 것이 너무나 많다. 부디 천만을 넘어 이천만 관객을 동원하라. 그래서 온 국민이 이순신의 리더십으로 무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
글쓴이-방성석(사)이순신리더십연구회 상임이사,이글코리아 CEO
참고문헌: 임진전란사(이형석), 이충무공전서(이은상 역), 교감완역 난중일기(노승석 역), 이순신백의종군(제장명=해사 이순신연구소 ),
임진왜란해전사(이민웅=해사 이순신 연구회),“정유재란 시기 해전과 조선 수군 운용”(제장명=해사)
방성석,노승석,제장명,이민웅 선생은 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카페 회원이다.옮긴 '범털과개털'도 이배사 회원이다.
이글을 쓰신 방성석 선생은 '위기의 시대, 이순신이 답하다' (난중일기에서 배우는 시대를 초월한 경영전략) 저자이시다.
제장명 교수는 '이순신을 만든 인물 33인'외 몇권의 책을 내었다.
노승석 선생은 여해고전연구소장인데...'난중일기 교감 완역본'을 쓰신분이다.
참고--이순신 장군 전적지 답사를 혼자 200회를 하시고 책을 내신 분이 '이봉수'라는 분인데...'이순신이 싸운 바다'라는 책을 내었고...네이버에 카페가 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자들은 이순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인줄 아는데요...이순신을 발탁해서 7계급 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신분(아버지)은 하회마을 출신 '서애 류성룡'이며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을 때에 두 번째 국문을 앞두고 상소문 (신구차사)을 올려서 목숨을 구해서 '백의종군'케 하신분이...예천 출신 '약포 정탁'대감입니다..다음에 문경-예천-안동 갈때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네이버에서--'개털기사,류성룡'검색....'김구,제승당'--검색
이순신의 아버지는 '류성룡'...어머니는 '약포 정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