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는 그냥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꾀꼬리 오락가락 암수 서로 노니는데(翩翩黃鳥 雌雄相依)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랴(念我之獨 誰其與歸)”
한국 최초의 서정시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이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자, 화희와 치희를 아내로 맞았다. 두 여인이 유리왕의 총애를 다투던 중 왕이 기산에 사냥 가느라 궁궐을 비운 틈에 화희가 치희를 모욕하여 한나라로 쫓아 보냈다. 사냥에서 돌아와 이 말을 들은 유리왕은 바로 말을 달려 뒤를 쫓았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낙심한 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짝을 지어 날아가는 황조(꾀꼬리)를 보고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원래 부인이 많으면 가장은 가정을 거느리기(齊家)에 골치가 아픈 법인데, 왕의 신분이라도 별수가 없는 모양이다.
여기서 꾀꼬리의 노니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유리왕이 깊은 산속에서 사냥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새는, 보기에 아름다워 사람이 접근하는 곳이면 잡힐 위험이 있어,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한 곳에 살기 때문이다.
새처럼 자유롭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매우 감상적인 수사일 뿐이다. 가을날 저녁놀에 떼 지어 나르는 철새들의 아름다운 비상을 보면 그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새들은 사는 곳이 정해져 있어 그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러시아 작가 일리인은 그의 저서에서, “숲과 초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가로막힌 듯하다. 어떤 짐승, 어떤 새도 이 벽을 넘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뇌조(雷鳥)나 솔새나 다람쥐 따위의 숲의 토박이 동물을 초원에서 만나는 일은 없다. 또 초원에서 사는 들오리나 날 쥐 따위는 숲에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모든 숲과 초원은 그 내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수많은 작은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라고 그 경계를 분명히 밝혔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란 가사에서 ‘콘도르’라는 말은,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인 잉카인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의미로 신성시 되어온 큰 독수리를 의미하나, 바위산에 서식하는 지구상에 가장 큰 맹금류의 텃새(permanent resident)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만이 그 벽의 한계를 허물어 자유롭게 이동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오랜 옛날 동아프리카초원을 떠나 지구상의 모든 곳으로 흩어져 자유인으로, 정복자로 살고 있다.
인간에게도 삼가고 그쳐야 할 곳이 있다. 그것이 공간적인 금지구역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행위에서 그리고 관계에서 서로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분명히 있다.
시경(詩經)에서 “꾀꼬리는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한 곳에 멈춰서 살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이를 해석하기를 꾀꼬리도 “그침(머무름)에 있어 그 그칠 곳(머물 곳)을 알고 있는데, 어찌 사람으로서 새만 못해서 되겠는가?”라고 사람이 마땅히 그쳐야(지켜야) 할 곳(禁忌)을 알아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시경은 이를, “인군(人君)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시고, 인신(人臣)이 되어서는 경(敬)에 그치시고, 인자(人子)가 되어서는 효(孝)에 그치시고, 인부(人父)가 되어서는 자(慈)에 그치시고, 국인(國人)과 더불어 사귐엔 신(信)에 그치셨다”라고 더 자세히 밝히고 있다. 즉 임금은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맡겨진 일을 잘해야 하며, 자식은 효도를, 부모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이웃과 사귐에서는 믿음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손자병법에는 “한 나라가 잘 다스려지려면 장수와 군주가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군주와 장수는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그런 이상적인 관계를 만들려면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즉 군주는 군주의 일에 전념하고, 장수는 장수로서 맡은 바 일에 충실하면 된다.”라는 시경(詩經)과 같은 동어를 반복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그쳐야(止) 할 것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무소불위로 행해지는 해방구처럼 보인다. 거짓이 산을 이루고, 선동은 나라를 혼란 시키고 있다. 왜 이 사회는 거짓이 왕 노릇 하는가.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정직하지 않은가. 정직하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짓이 미덕이 되는 사회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곳에서 진실이란 아무 상관이 없다. 내 것이면 진실이 되고 남의 것이면 거짓이 되어, 진실 존중과 개인의 존엄성은 아예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폭도가 등장해 스스로 진실의 이름으로 재판관이 된다.
거짓의 역사는 ‘선악과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짓 유혹에 인류 조상은 금지선(禁止線)을 넘었고, 그 자손인 아브라함과 이삭은 절대권력자 앞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서양 격언을 상기시켜 주시듯,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셨다.
정직에 관한 서양의 명언은 많다. 그중의 압권은 Mark Twain의 잠언으로, 그가 잘못 투자하여 파산신청을 한 후에도 채권자들에게 모든 빚을 갚아 주며, “돈 문제가 걸려있을 때, 정직은 최상의 방책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항상 진실을 말하라. 그렇게 하면 네가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불러오기 때문에, 먼저 한 거짓말을 번거롭게 기억해야 하는 이 나라 유명 인사들의 위선을 보는 듯하다.
정직이란 무엇인가? 주서 홍범(周書 洪範)에는 “바름은 삿됨이 없고(正者無邪), 곧음은 왜곡됨이 없다”(直者無曲)라는 ‘正과 直’에서 나온 말인데, 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는 속임이 없어야 하며, 자신에 관하여는 굽힘이 없는, ‘바르고 곧은 상태’를 뜻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정의란 자기 자신에게 하지 않았을 것을, 타인들에게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어느 현자는 말했다. 이는 황금률로서 마치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는 명령이고, 논어에서 공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고 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 이 나라는 이러한 황금률이 전혀 작동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세상 모두가 신념과 선의로 위장된 거짓으로 넘친다. 그러고 보니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무장되었다”라는 하이에크의 말과 같이, 우리 모두 그런 길로 빠져가는 느낌이다.
“양심과 악은 주관적 자기 확신으로 충만하다. 세상엔 양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 너무 많다. 양심의 타당성이 공론 영역에서 토론되고 검증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행위의 결과보다 동기의 순수성이 더 중시되는 정치인은 자격 미달이다”라는 헤겔의 경고가 이 나라 집권자들에게 조그만 울림이 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이 나라가 가는 길에 소망이 없어 보인다. 젊은이들은 원하지 않는 일들에 힘들어할 것이다. 마치 어느 시인이 쓴 시처럼 이제 우리는 혹독한 겨울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