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한 눈* / 여국현
우기가 끝나가는 아프리카 초원의 풍성한 대지 위
커다한 아프리카 물소 한 마리 앞다리 꺾인 채 엎드려 있다
그 곁에 사자 네 마리
한 놈은 불룩한 옆구리에 머리를 박고 갈빗살을 물어뜯고
또 한 놈은 뒤틀린 오른쪽 넓적다리에 이빨을 박고 흔들고
한 놈은 피 묻은 주둥이를 하늘로 쳐들며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고
덩치 큰 암사자는 땅에 드러누워 양발로 물소의 뿔을 잡아 목을 꺾고
날카로운 이빨을 목 아래에 박아 마지막 숨통을 조이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 떼는 다른 세상처럼 한가롭게 풀을 뜯고
구름 한 점 없는 아프리카의 하늘은 눈 시리게 푸른데
목이 꺾인 채 부러진 앞다리로 소용도 없는 용을 쓰다 체념한 듯
생의 마지막 순간을 응시하며 서서히 눈을 감는 아프리카 물소 한 마리
화면 속 물소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을 때 겹쳐온 한 모습
덩치 크고 기운 센 아프리카 물소 같던 아버지
날카로운 삶의 이빨에 물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의
공손한 눈
*고영민 시인의 시, 「공손한 손」에서 제목 착상
ㅡ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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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국현 시인
1965년 강원도 영월 출생, 중앙대 영문학 박사
2018년 《푸른사상》 등단.
시집 『새벽에 깨어』 『들리나요』
전자시집 『우리 생의 어느 때가 되면』
저서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2,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미소설』 등
영역시집 The Collected Poems of Park In Hwan 등
번역서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 『그녀의 편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