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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가톨릭교수회보 대림 제1주일 제256호 2011. 11 .27. (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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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대림절은 글자 그대로 임할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축일이 가까워옵니다. 또한 멀리는 우리 삶의 종말도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산과 들에 푸르던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 생명의 종말도 생각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하실 은혜로운 일을 희망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에 우리가 하느님을 대면할 것이라 말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세상 종말에 대한 언급들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유행한 유대인들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가까운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상상들은 신약성서에도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습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 ‘죽은 이들을 부활시켜서 심판하신다.’ 신약성서의 여기저기 나타나는 이런 표현들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이 상상하여 만든 표현들이 신약성서 안으로 흘러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마태 24,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그 시대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민족(異民族)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 민족입니다.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은 그들이 처절하게 체험한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미래를 대망(待望)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역사의 미래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 그리스도인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신앙언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모셔 들여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언어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재산을 많이 가지거나 출세하여 남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인생에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시오...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마태 6,31.3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먹고 마셔서 행복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은 우리가 자비하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영접하여, 그분이 하시는 일, 곧 인간 생명을 보살피고 살리는 일을 실천할 때, 우리 안에 실현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고, 이 세상입니다. 그분이 베푸셨듯이, 우리도 우리 주변의 생명들에게 베풀고 보살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우리 안에 실현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비롯한 고마우신 어른들이 자비를 실천하여, 우리의 생명이 살고 자랐습니다. 자비는 인간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힘으로 인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비를 우리 실천의 동기로 좀처럼 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해타산에 얽매여 있습니다. 자비는 우리 중심의 이해 타산적 손익계산서에는 적자만 늘어나게 하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타산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자비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줍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우리도 미워하면, 우리는 그 미움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악순환에 한 번 빠지면, 우리는 이성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 미움만을 배설합니다. 그 악순환은 주변 생명들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도 위축시키고 결국은 병들게 합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행위는 그 미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늘의 복음이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악순환에 빠져 살지 말고, 자비와 배려를 찾아 자유롭게 실천하는 일에 깨어 있으리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위해 힘을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중요시하는 질서 안에 삽니다. ‘콩 심은 데에 콩 나고, 팥 심은 데에 팥 난다.’고도 말합니다. 이 질서에는 죄가 있는 곳에 당연히 비난과 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질서 안에 계시지 않고 자비의 징서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사시는 질서 안에 우리도 살겠다는 결의가 담긴 고백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그 질서를 요약하여 말합니다. “죄가 많아진 거기에 은총이 더욱 넘쳐흘렀습니다.”(로마 5,20)
이 세상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당연한 질서로 보입니다. 큰 나무 아래 있는 작은 나무는 햇볕과 영양을 빼앗기고, 결국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맹수 가까이에 있는 초식 동물들은 맹수의 먹거리로 자기 생명을 빼앗깁니다. 원시인들의 추장이나 미개한 나라의 통치자는 약자를 착취하여, 자기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약육강식의 질서는 인간 상호간, 기업체간, 또한 국가 간에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빼앗기고, 그 생존을 위협 당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찾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질서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그 의로움은 우리의 섬김으로 실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이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과응보의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병과 불행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깨어 있으면서, 그분의 질서를 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흘러갑니다. 우리도 세월 따라 흐르면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말에 대면할 하느님은 자비와 용서와 섬김의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질서 안에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비와 용서와 섬김을 실천하는 질서입니다.(서공석 신부, 가톨릭뉴스지금).
묵상해봅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 강생의 사건은 하느님의 얼굴을 이 땅에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 얼굴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그리움은 ‘하느님을 닮은 나’,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순결하고 맑은 나’, ‘온전하고 충만한 나’를 향한 그리움입니다. 해마다 대림 시기를 보내는 까닭은 우리의 진정한 기다림의 목적지를 깨닫고 그 본래의 순수한 나, 완전한 나를 찾아 길을 떠나는 데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성경말씀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5)
알아봅시다 1. 대림시기 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 4주간을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을 준비하고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이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 첫 주일을 처음으로 한 해의 전례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 교회 달력(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림 시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 성탄을 앞두고 참회의 기간을 가졌던 관습이 생겨났던 4세기 말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대림 시기는 6세기 이후부터 로마에서 전례에 도입되어 거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대림’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 말 ‘아벤투스’(Aventus)에서 온 것으로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곧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지상을 순례하는 교회는 해마다 대림 시기에 구세주를 기다리며 신앙의 자세를 새롭게 한다. 대림 시기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사철나무 위에 4개의 초를 마련하는데 사철나무는 인간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을, 네 개의 초는 구약의 4천 년을 뜻한다.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 밝힘으로써 구세주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알려 주고 마음의 준비를 갖도록 해 준다. 대림 시기 동안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자색 제의를 입는다.(매일미사)
2. 대림시기 의미 신학적 의미와 영성
대림시기가 지닌 기다림의 영성은 종말에 있을 구원의 신비와 희망, 회개로 압축된다. 첫째, 대림시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는 때다. 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예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다. 둘째, 대림시기는 희망에 찬 기다림이다. 구세주가 다시 세상에 오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구원 소식은 신앙인들에게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반가운 기다림이 또 있을까. 교회가 대림시기에 드리는 기도문 "오소서 주 예수여"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교회 모습을 보여준다. 셋째, 대림시기는 참회와 회개, 속죄의 시간이다. 깨어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기다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예수 탄생의 기쁨을 더 온전하게 누리기 위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음을 되새기며 보낸다.
전례적 의미
4주간 지내는 대림시기는 전례적 의미에 따라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대림 제1주~12월 16일)와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12월 17~24일)로 나뉜다. 매주 전례에서 강조하는 기다림의 자세도 조금씩 다르다. 대림 제1주일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실 구세주를 깨어서 기다릴 것을 이야기한다. 복음말씀도 기다림의 끝날에 깨어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3-37). 대림 제2주일은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면서 신자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구세주를 마중할 길을 준비하라고 가르친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대림 제3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알려준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알릴 사람으로 요한 세례자를 보내셨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28). 대림 제4주일은 우리가 기다려온 분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그 탄생을 예고한다. 기쁨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1-32).
전례적 특징
시작과 끝이 없는 둥근 모양의 대림환은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한 하느님을 상징한다. 또 대림환은 전나무ㆍ소나무와 같은 상록수 가지로 만든다. 늘 푸른 나뭇가지는 살아있는 생명과 희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 대림환에 꽂는 대림초는 대림시기 4주에 맞춰 4개를 준비한다. 매주 1개씩 새 초를 켜는데 보라색, 분홍색, 흰색 순서로 짙은 색부터 불을 붙인다.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는 말씀처럼 4주 동안 참회하고 회개하면서 순백의 마음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제들은 이 시기에 속죄와 참회를 상징하는 보라(자주)색 제의를 입는다. 그러나 기쁨의 시간인 대림 3주일에는 분홍색 제의를 입는다. 또 전례 중에는 대영광송을 하지 않으며 오르간이나 다른 악기의 단독 연주는 피한다.(평화신문)
손석준엘리야 전남대학교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http://love.chonnam.ac.kr/~sohns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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