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수) 이사야 15:1-9 찬송 445장
1.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활 것이라
2.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3.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4.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
5.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6.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7.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8. 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비치며
9.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개역 개정)
- 모압의 멸망에 대한 예언 -
오늘 말씀은 앞서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에 이어 네 번째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모압 족속(창19:37)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두 장(제15, 16장) 중 그 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 내용을 보면, 모압의 멸망이 하룻밤에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며(1-4절),
모압의 위인들이 피난을 가지만 그곳에서도 재앙이 덮쳐
멸망하게 될 것(5-9절)을 예언하고 있다.
모압은 이미 B.C.13C부터 그들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고 살았다.
한때는 르우벤 지파가 차지한 땅 곧 사해 북쪽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다윗 이후로 부터는 주로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침으로 서로 화친했다.(왕하3:4-27)
하지만 그들은 광야 시대에 이스라엘을 범죄에 빠트렸던
일(민25:1-5)로부터 시작하여 B.C.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게 갖은 악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모압 족속을 향해 이사야는 혹독한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또한 이사야 당시 모압은 아람과 반앗수르 동맹을 맺은 북이스라엘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으므로 반대로 앗수르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다가 B.C.712년경 히스기야 통치 당시 남유다와 블레셋과 함께
반앗수르 동맹을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앗수르에 철저한 보복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모압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B.C.107년경 로마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모압의 멸망에 대해, 그리고 모압이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16장과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
보다 더욱 자세하게 예언되고 있다.(렘48장)
이러한 모압 멸망 예언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재물과 군사력에 의지하여 사는 모든 세상 나라는 필연코 멸망케 됨을 교훈한다.
5절)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이사야는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라고 토로한다.
이것은 모압의 멸망의 참상을 내다보며 예언하는
이사야의 마음에 찢어지는 고통이 있다는 말이다.
모압이 어떤 나라인가?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원수의 나라이다.
유다와는 적대국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입장에서는
모압의 멸망의 참상을 볼 때 오히려 기뻐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사야는 반대로 그들로 인하여 마음이 아파 울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었다. 어째서인가?
이는 모압이 비록 유다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두 나라는 본래 형제국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사야가 모압으로 인하여 마음의 고통을 당한 것은
비단 그들이 유다의 형제국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생명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이사야는 모압의 수많은 생명들이 허무하게 죽어가게 될 것을 보면서
그들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사야가 모압 사람들에게 가졌던 연민의 마음은
오늘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기도 하다.
불신자의 생명이라고 해서 우리의 생명과 다른 생명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고
불신자들은 영원히 망하여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인가?
그들이 비록 우리의 원수이고 우리를 괴롭게 한 자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허망하게 망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사야가 모압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처럼
우리도 불신자들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함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지시하셨다.
요나는 앗수르가 이방 민족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는 적대 국가였으므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도망하려다가
하나님께 붙잡혀 할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전하였다.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듣고 회개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내리기로 하셨던 재앙을 내리시지 않게 되자
하나님을 향하여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불평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욥4:11)라고
하심으로 요나를 책망하셨다.
이 책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축의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딤전2:4)
베드로 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들 중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벧후3:9)
이사야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모압의 멸망의 참상을 내다보며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것이다.
그들의 멸망이 기뻐서가 아니라 그들이 돌이켜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심판을 경고한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이사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멸망하게 될 불신자들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갖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권하고 설득하여도
그들이 거부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전까지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야 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롬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