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G3henS5o
(28)복지국가·신자유주의 ‘극단’ 넘어, 약자 포용 ‘사회적 평등’ 강조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앤서니 기든스 ‘제3의 길’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 정책브레인 역할을 했던 앤서니 기든스는 ‘제3의 길’을 주창하며 ‘사회 투자’와 ‘적극적 복지’를 촉구한 사회학자다.
사상은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지식인은 자기 사회를 어느 정도 바꿀 수 있을까. 흔히 지식인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전문형과 참여형이 그들이다. 전문형이 지식사회 안에서 연구에 주력한다면, 참여형은 그 연구를 바탕으로 현실에의 개입을 모색한다. 한 사회에서 전문형 지식인과 참여형 지식인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갖는다.
이러한 지식인의 유형에서 가장 이채로운 이는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1938~ )이다. 1970년대 초반 서구 지식사회에 등장한 기든스는 구조화 이론을 주조하고 모더니티를 탐구함으로써 대표적인 전문형 지식인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그러했던 그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급진정치의 미래>(1994)와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의 갱신>(The Third Way: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 1998)을 잇달아 발표해 참여형 지식인으로 변신했다.
기든스가 겨냥한 것은 좌파의 혁신이었다. 이 혁신 프로그램은 ‘제3의 길’ 테제에 집약돼 있었다. 기든스의 제3의 길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서유럽 좌파 세력의 집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국 블레어 정부의 노선은 제3의 길이었고, 독일 슈뢰더 정부의 ‘신중도’는 제3의 길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다. 전후 70년 동안 활동한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기든스는 그 누구보다도 먼 길을 걸어갔다.
■제3의 길이란 무엇인가
제3의 길 테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현대사회에 대한 기든스의 이론화를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티는 초기 모더니티와 후기 모더니티로 구분된다.
1) 초기 모더니티는 세계화의 충격, 탈(脫)전통질서의 등장, 사회적 성찰성의 확장으로 인해 후기 모더니티로 변화했다.
2) 이 후기 모더니티의 특징은 신뢰와 위험, 기회와 위협이 공존하는 ‘인위적 불확실성’에서 찾을 수 있다.
제3의 길은 이러한 사회변동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제3의 길이 기든스의 독창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에 앞서 제3의 길을 제시한 담론들이 존재했다. 스웨덴 노선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놓인 제3의 길로 위치 지은 시도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의 혁신 프로그램이다.
그에게
1) ‘제1의 길’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르는 포괄적인 복지국가를 목표로 했던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기획이라면,
2) ‘제2의 길’은 시장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대처리즘의 신자유주의 기획이다.
3) 제3의 길은 제1의 길에 대해선 시장의 효율성을 부각시키고 제2의 길에 대해선 사회적 평등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변증적 종합을 모색한다. ‘급진적 중도, 새로운 민주국가, 활발한 시민사회, 민주적 가족, 신혼합경제, 포용으로서의 평등, 적극적 복지, 사회투자 국가, 세계주의적 민족, 세계적 민주주의’가 그 의제들을 구성한다.
제3의 길의 중심적 가치는 사회적 평등이다. 기든스에 따르면, 후기 모더니티는 빈곤층이 사회 중심에서 강제적으로 배제되는 동시에 부유층은 스스로 배제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 점에 주목해 그는 평등을 포용의 개념으로 다시 정의한다. 국가의 일차적 과제는 분열된 사회를 포용적 공동체로 새롭게 재구조화하는 데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포용으로서의 평등을 성취하기 위해 기든스가 제시한 대표적인 두 정책 아이디어는 ‘사회 투자’와 ‘적극적 복지’다.
1) 사회 투자가 인적 자본·사회 서비스 지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면,
2) 적극적 복지는 교육개혁·직업훈련 등에 주력해 일자리 창출을 복지의 중심으로 삼는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정책들을 추진함으로써 세계화 및 정보사회의 도래에 적극 대응하려는 전략이 바로 제3의 길이다.
■제3의 길을 둘러싼 논쟁
<제3의 길>은 출간되자마자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긍정적 시각에선 사회 투자와 적극적 복지가 특히 사회민주주의의 갱신에 적절한 프로그램이라고 평가됐다. 제3의 길 기획은 영국 블레어 정부의 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신중도 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3의 길 테제는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재집권에 일조함으로써 기든스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했다.
부정적 시각에선 제3의 길이 좌파의 정책과 우파의 정책을 절충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됐다. 인간의 얼굴을 한 대처리즘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제3의 길은 세계화의 충격에 적극 대응하려는 온건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보수 세력에 맞서기 위해 경제정책을 포함한 신자유주의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경향을 전통적인 좌파 세력은 격렬하게 비판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제3의 길은 새로운 진화를 모색했다. 기든스와 동료들은 변화된 현실에 대응하는 중도 좌파를 위한 새로운 의제들을 발굴하려고 했다. <진보 선언: 중도 좌파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2004)는 대표적인 연구 결과였다. 이 저작은 ‘배태된 시장, 보장 국가, 시민 경제, 공동생산으로서의 시민권, 통제된 불평등, 사회적 상속 비판, 관리된 다양성, 세계적 사회민주주의, 실제적 다자주의, 예측불가능성의 예측’을 새로운 의제들로 내놓았다.
2005년 독일에서 사민당이, 2010년 영국에서 노동당이 잇달아 실각하면서 제3의 길에 대한 관심은 약화됐다. 우파 대 좌파가 주도하는 양당 정치에 익숙한 서구사회에서 제3의 길이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정치의 본질이 대립과 갈등에 있는 한, 제3의 길은 절충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게 정치에 부여된 과제인 한, 제3의 길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은 앞으로도 계속 추구될 것이다.
■한국어판 저작은
<제3의 길>은 사회학자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정치학자 박찬욱 서울대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박찬욱 교수 등이 번역한 <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을 함께 읽으면 좋다.
■한국에 적용된 ‘제3의 길’ - DJ 정부 ‘생산적 복지’…이론과 정책의 결합 보여줘
‘제3의 길’은 서유럽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었다. 서유럽의 제3의 길이 구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동시 극복을 추구했다면, 비서구사회의 제3의 길은 국가 주도 산업화와 시장 주도 산업화의 동시 극복을 모색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대중 정부의 발전전략은 제3의 길의 한국적 버전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한국적 제3의 길’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정책은 ‘생산적 복지’였다. 생산적 복지는 적극적 복지의 한국적 변형이었다. 구체적으로 생산적 복지는 사회의 가장 불우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초생활을 보장하고, 일과 인간 계발을 통한 자립·자조·자활을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창의성이 발휘되며 국민 전체의 생산성과 복지가 동시에 향상되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생산적 복지는 ‘생산에 기여하는 복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생산적 복지의 추진은 서유럽 제3의 길의 등장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뤄졌다.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4대 부문 구조조정이 가져오는 사회 양극화의 확대를 제어하기 위해선 복지정책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중도개혁 성향의 정부인 만큼 자신의 이념에 걸맞은 복지국가의 한국적 토대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서유럽 제3의 길의 적극적 복지가 일자리 창출에 주력했듯, 한국 제3의 길의 생산적 복지는 ‘생산에의 참여를 통한 복지’를 추구했다.
생산적 복지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놓고 지식사회 안에서 이뤄진 논쟁은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가 편집한 <한국 복지국가 성격 논쟁 1>(2002)에 집약돼 있다. 한편에서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비판됐다면, 다른 한편에선 국가 책임주의를 강화하려는 혼합모형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평가됐다. 또 다른 시각에선 보수주의적 복지체제에서 나타나는 제도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경제적 산업화에서 정치적 민주화로, 그리고 다시 복지국가에로의 변동은 서구 모더니티가 보여준 역사의 대체적인 발전 경향이다. 생산적 복지는 한국적 복지국가의 구축에서 이론과 정책이 결합돼 추진된 주목할 만한 최초의 시도였다. 역사에서 비약은 없다. 생산적 복지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성찰은 우리 사회에서 바람직한 복지국가 모델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