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는 조선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회자되고 있던 고수들 가운데 지난 수년간
조선 땅에서 상대해보았던 몇 명의 검객들을 떠올렸다. 모두 이름만큼이나 무서운 실력을
갖추었지만 그는 그들의 검을 차례로 꺾었다. 그렇지만 미시마가 상대하기 전 미우라가
보낸 일진회의 다른 검수들이 상대의 힘을 많이 빼놓은 상태여서 내심 정당한 결투는
아니었다는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미우라에게 이를 불평할까도 생각했지만 조선에 건너올 때 이토 통감과 약속한 바가 있어
내색하지는 않았었다. 이토는 그에게 진짜 조선제일검객은 반드시 미시마에게 맡기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이제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미시마는 미우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그가 내민 책자를
집었다. 책자 겉장에는 <초비(超秘)>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히 적혀 있었고 왼편 귀퉁이에
검은 방점(傍點)이 세 개가 찍혀 있었다. 이것은 자료가 세 사람 즉, 이토 통감과 미우라,
그리고 미시마만이 볼 수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미우라가 ‘처리해주어야겠네’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로 윤석생은 분명 비중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미시마는 생각했다.
처리(處理)와 상대(相對)는 얼마나 그 어감이 다른가.
미시마는 무인(武人)으로써의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그렇다, 이번 일을 끝내면 이토 통감과
의 약속이 끝나는 것이다. 나는 자유롭게 조선과 중국을 둘러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윤석생이라. 과연 그가 조선의 최고라면….
미시마는 한번도 만나지도 못한 그에 대해 왠지 깊은 친근감이 느껴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또한 일본 내 최고수로 자부하기 때문이었다.
책자를 넘기자 윤석생의 나이 · 행적 등이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탐문된 듯 상세히 기록
되어 있었다. 미시마는 한 구절도 빼놓지 않고 차근차근 보고서를 읽었다. 미시마는
두 페이지에 걸쳐 정리된 윤석생의 수법에 이르자 아예 곁에 있는 미우라를 무시하고
책자를 가슴 높이로 들어올려 살펴보기 시작했다.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돋보기로
책자에 묻은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한 그의 태도를 지켜보며 미우라는 조용히 일어나서
그 자리를 비켜주었다. 미시마는 이미 미우라가 고함을 치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책자에 빠져 있었다. 기록은 이렇게 윤석생의 수법을 정리했다.
<윤석생의 수법은 무거움(重)을 위주로 함. 그와 비무 하였던 자를 탐문했으나 쉽게 찾을
수가 없었음. 지난 이십여 년 간 그는 다른 자들과 거의 비무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
됨. 당시 윤석생의 검은 석검(石劍)이라 불리었는바 참고를 바람. 그는 상대를 검기로
제압한 흔적이 있음. 몇 년 전 무쥬에서 제거한 김창희도 윤석생과 결투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십여 합에 패퇴된 바 있음. 당시 윤석생의 검은 내리치는 기세만으로
도 김창희의 쇄골 뼈를 으스러뜨렸다고 함.>
미시마는 잠시 눈을 감고 윤석생의 그 동작을 재현시켜 보았다. 내려치는 동작과 가로 막는
자세, 오른손을 타고 흐는 검기(劍氣), 부숴지는 쇄골…. 결코 빠르지 않게 연결되는 이
수법이 얼마나 무겁게 빠른 것인지 미시마는 자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이것은 검을 통한 발경(發勁)이다. 벌써 이십여 년 전에 윤석생은 이미
검기를 연결시키는 기법까지 갖추었다. 생각이 그에 까지 미치자 미시마는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책자를 내려놓고 조심스레 칼을 집어 들었다. 그에게 일본 제일검의 칭호를 얻게 해준
만쿠모(萬雲)라는 이름을 가진 애도(愛刀)였다.
미시마 겐고(三島玄悟).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준비된 이 이름을 나에게 붙여
주셨다. 깊은 깨달음이 늘 함께한다는 나의 이름은 나를 검의 세계로 이끌었다.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사람들은 나의 검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십년.
나는 변변한 적수 없이 나 자신과 싸워왔다. 나의 유산검(流散劍)은 검의 흐름에 있어
괄목할 만한 빠르기를 가졌다. 물방울이 흩어지듯 검기(劍氣)를 목표점에 방사(放射)하는
기법은 마치 밀막(密幕)을 만드는 것과 같다. 나의 검은 이제 정밀함과 기세에서 완성에
가깝다고 자부한다.
윤석생을 생각하며 미시마는 호승심(好勝心)을 숨기지 않고 발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칼은 그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기품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게다가 유산검의 특징은 상대를 철저히 제압하는 것이어서 호쾌한 맛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검의 무게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미시마는 이 점 때문에 머릿속으로 떠올린
석생의 검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삼일동안 미시마는 참수에 들어갔다.
겐고(玄悟)라는 이름은 대각(大覺)과 마찬가지 의미로 깊이 있는 사고력이 있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는 삶을 이름에 담아주셨다고 미시마는 늘 생각했다. 깊은 상념을 속으로 삭이지
않으면 칼은 무뎌지게 되어있다. 미시마는 숱한 결투를 통하여 그것을 체득하였다.
지금의 고통스럽기까지 한 명상은 칼을 든 자의 한 팔과 심지어는 심장과 목까지도 보호해
주는 지름길이었다.
미시마가 마음과 몸을 결투를 위한 상태로 만들고 있는 동안, 미우라도 석생 제거를 위해
이중(二重)의 덫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시마는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서야 방문을 나섰다. 그의 눈에는 예전보다 깊어지고
맑아진 서늘한 망울이 맺혀져 있었다. 석생이 그의 검을 한 단계 더 높여 준 것과 다름
아닌 듯 했다. 그는 윤석생과 진지한 비무를 원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를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미우라는 미시마에게 무라세(村瀨)와 요시다(吉田)를 대동하길 권했다.
미시마가 거절했지만 미우라가 이미 마음을 정한 이상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무라세와 요시다는 검사(劍士)이기 이전 자객(刺客)으로 이름을 떨친 자들이었다.
미시마는 내심 그들과의 동행이 이번 비무를 정당하게 만들지 못하는 원인으로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미우라의 완고한 얼굴을 보자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절대 결투에 개입하지 말 것을 한 번 더 다짐 받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는 곧장 윤석생의 집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중하게 비무첩이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미시마와 석생의 비무는 이토와 미우라가 만났을 때
이미 그 장소와 방법까지 정해진 것이었다.
다시 반 나절동안 미시마는 조심스레 자신의 애도인 만쿠모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칼과 자신만이 있는 모습을 즐겼다. 석생은 나에게는 분명 재미난
한 순간을 선사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가슴에 산중의 바람이 벌써 들어와 있었다.
5.
석생이 왼 허리춤에 칼을 차고선 세 명중의 중간 사내를 유심히 살피는 순간,
그 사내가 성큼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정확히 석생이 앉아 있는 소나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깊은 밤, 산중에서의 사람 목소리는 조용히 멀리, 명료하게 퍼져나갔다.
“미시마 겐고라고 합니다. 윤석생 선생을 뵈러 왔습니다.”
미시마는 간단히 고개를 숙였다가 허리를 폈다. 조선말로 자기소개까지는 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두 문장의 말인데도 글의 아래 받침이 동강이 나서 나왔다.
그는 석생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석생은 미시마의 말을 듣고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미시마라. 저 사람이 누구일까? 분명 비무를 하러온 듯한데, 다른 친구들이 당할 때는
여럿에 의한 파상공격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왜 이들은 가만히 있을까?
겨우 세 사람으로 나와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다른 무기는 없는가?
석생의 생각은 빠른 속도로 상황을 분석해갔지만 별로 얻어지는 성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파악해볼 수밖에 없다라고 석생은 판단했다. 수백 명이 몰려온다 해도
석생이 이 자리를 피할 수 없다는 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정중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고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그건 조선의 예법(禮法)이 아니니 말이다.
석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볍게 한 걸음으로 성큼 내디뎠다.
그들의 앞까지 이르는 데는 서너 걸음이면 족했다.
“석생(石生)이라하네. 멀리서 오신 모양이구만.”
희미하게 웃음까지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뒤편에 있던 일인(日人) 사내 하나가 앞쪽의 미시마란 사내에게 일본말로 뭐라고 속닥였다.
아마도 통역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미시마가 그에게 무어라 하자 뒤쪽 사내가 입을 열었다.
미시마는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석생은 여기는 나의 터라는 마음이 엿보일 정도
로 여유로운 웃음이 얼굴에서 베여 나왔다. 캄캄한 산중(山中)달빛 아래에서 조선과
일본의 최고 검객인 두 남자는 이렇게 만나고 만 것이다.
석생은 다시 큰 걸음으로 미시마에게 다가섰다. 뒤쪽의 무라세가 칼자루에 손을 얹고
한 걸음을 내디뎠고 동시에 미시마는 오른 손을 가볍게 들어 그를 제지했다. 석생의 이런
행동은 그들에게는 거의 공격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서로의 눈을 지켜보는
석생과 미시마간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살기(殺氣)나 비겁(卑怯)한 술수 부림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훈훈하고 따스한 동지애가 넘쳐흘렀던 것이다.
석생을 보는 순간 미우라가 몇 년에 걸쳐 조사했던 석생에 대한 보고서가 모두 잘못된
것임을 미시마는 직감했다. 석생의 이십여 년 전 경지(境地)로 지금의 석생을 표현했다는
자체가 실수였다. 좀 전 석생이 소나무 아래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온 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그렇다. 무음(無音)의 보법(步法)까지 갖춘 검사(劍士), 일흔 노인네라고
생각했던 그가 숨결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상대를 맞이하는 모습은 그가 나이와 관계없는
기력(氣力)까지 갖추고 있음을 말해준다. 잠깐사이 깊은 혼란에 빠졌다.
일대일의 비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은 가능성이 절반 이하임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미시마는 내심(內心) 부끄러움이 스물 스물 기어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밤의 산바람은 계곡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몰아친다. 그 기세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진솔산에도 여러군데 냉곡(冷谷)으로 이름 붙여진 곳이 있을
정도다. 석생은 등허리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며드는 걸 내버려두며 미시마를 보았다.
볼수록 탐이 나는 재목이었다. 아마도 제자이자 아들인 겸호와 비교해도 이 나이의
성취(成就)는 막상막하일 듯 했다. 왠지 이 친구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이미 싸움은 없었다. 석생은 오른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가만히 쥐려했다.
미시마는 놀라지 않았다. 앞에선 노인은 어릴 적 자신을 업어주던 할아버지 같았다.
미시마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부드러웠다.
무라세와 요시다는 기겁했다.
싸우러온 자가 적(敵)의 손을 잡는다. 그것도 검객의 오른손을 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죽이러 왔는데 그냥 죽어주겠다는 뜻은 아닐 터. 무라세는 그동안 석생을 조사해오면서
보고서를 쓴 입장에서 놀라움이 더욱 컸다. 그가 알고 있는 석생은 검(劍)을 쥔 상태에서
상대를 제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검사(劍士)라면 칼을 쥐지 않았으면 모르되 쥐고서는
베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석생은 분명 논검(論劍)이 아닌 진검(眞劍)의 승부사였다.
그로써는 미시마의 태도도 납득되지 않았다.
본국(本國) 제일의 검객이란 호칭이 무슨 의미인가?
그의 칼 아래 적어도 백여 명 이상의 고수들이 패퇴(敗退)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자객인 그 자신마저도 쉽게 암중(暗中)승부에 자신이 없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또한 전략(戰略)인가?
두 사람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판단이 혼란스러웠다.
그 때, 고개를 돌리며 미시마가 말했다.
“자네들은 먼저 돌아가게. 미우라 상에게는 내가 돌아가 말씀드릴 것이네.”
두 사람은 미시마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조직의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미시마는
그들마저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검객이었다. 둘은 아무 대꾸도 없이 조용히 뒷걸음치며
산을 내려갔다.
석생은 미시마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도 가세. 참! 말이 안통하지”
그러면서 미시마의 눈앞으로 가볍게 손을 저었다. 미시마는 가볍게 웃었다. 석생의 그런
모습이 너무 천진스러웠기에 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