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생이 보기에 이 왜인(倭人)은 벌써 타인 같지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의 슬하에
있었던 제자를 보는 듯 했다. 겸호가 떠난 후 아무도 없던 집에 떡하니 한 사람이 들어
앉으니 석생의 기분은 절로 좋아졌다. 석생이 직접 차를 다려 미시마의 앞에 한 잔을
부었다. 작년 봄 솔잎을 잘라 보관해온 것이어서 묵은 잎 맛이 훅 풍겨 나왔다.
언제였던가, 스승이 떠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이 생각나 석생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차 한 모금을 마시자 진하게 밀려오는 차 향기와 함께 그 말씀을 이 어린 친구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지필묵을 꺼내놓자 미시마는 이제부터 석생이
필담(筆談)을 하려 한다는 걸 눈치 채었다. 그는 석생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석생은 붓을 잡고 한 호흡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重隱月絲擊射”(중은월사격사)
유려한 필체로 글씨를 쓴 후 석생은 미시마를 보며 방바닥의 화선지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에게 잘 보라는 뜻과 그의 느낌을 적어보라는 의미였다.
미시마는 석생이 한 자씩 글씨를 쓸 때 마다 긴장의 강도가 더 높아짐을 느꼈다. 필경
이것은 검학(劍學)에 대한 그의 심득임에 분명할텐데 그것을 자신과 공유(共有)코자 하는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직계의 자손이나 제자라 할지라도 엄격히 선정된 후계자가 아니면 비기(秘技)는
전수시키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생면부지의 나를, 그것도 비무를 하러 온,
엄밀히는 자기를 죽이러온 나에게 자신의 검(劍)을 가르치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시마의 혼란스러움은 겉으로의 무표정함과는 달리 내심으로 더욱 격정적이 되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생은 불쑥 자신에게로 쓴 글을 보라고 내밀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석생이 적은 글은 제대로 해석이 닿질 않았다. 이것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깊이 감춘 달(重隱月)이 실처럼 터져 나온다(絲擊射)’라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석생은 종이를 내밀고는 단정히 앉은 채로 미시마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두 글자로 끊어 읽어야 하는가. 미시마는 ‘무겁게 감추고(重隱), 달 같은 실타래에(月絲),
치고 쏘아댄다(擊射)’라고도 풀이를 해보았지만 썩 가슴에 와 닿지 않아 금새 머릿속에서
지우고 말았다. 석생은 무엇인가를 전하려 하는 것인데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필담으로 무슨 뜻인지를 설명해 달라고 하기는 내키지 않았다. 화두(話頭)를 받은
승려(僧侶)처럼 미시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밤은 금방 지나갈 것이었다. 그런 미시마의 모습을 보며 석생은 가만 자리를 비켜주었다.
궁구(窮究)란 역시 좋은 것이다. 그가 고민하는 모습에서 석생은 묘한 대리 만족을 느꼈다.
아마 스승께서도 그러셨을 것이다.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 깊숙이 그리움이 밀려
왔다. 석생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젠 가야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천명(天命)은 어디 있는가?’
날이 밝았다.
석생은 늘 해오던 데로 뒷마당에서 겹보 수련을 했다. 서재의 손님은 아직 나올 기색이
없었다. 그럴 것이다. 고집 센 겸호는 무려 사흘(三日)동안 나오질 않았었다. 이 손님도
그에 못 미치지는 않을 터. 그가 나름의 궁리(窮理)를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촉촉한 이슬기운이 뺨에 닿자 상쾌한 기분이 일었다. 석생은 가볍게 손을 비벼
얼굴을 문질렀다. 몸 깊숙한 곳에서 따스한 물방울이 송글송글 오르는 듯 했다.
미시마는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 속에 몇 마리의 거미가 들어앉아 있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거미줄을 달고 다니는 놈, 외줄을 흔들며 둥글게 짐을 집는 놈, 척하니 걸려든
먹이를 고치 집을 짓듯이 감싸는 놈 등 온갖 짓거리를 하고 있는 작태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가닥가닥 마다 석생이 내어준 숙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주 흉물스러워 쳐다보기
조차 싫었지만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 악의(惡意)가 아닌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려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분명 이것은…,
그렇다. 분명 검(劍)과 관련된다. 이것이다. 미시마는 아침녘에서야 검(劍)이라는 글자를
석생이 내민 종이위의 글씨에 붙여보기 시작했다.
‘重劍, 隱劍, 月劍, 絲劍, 擊劍, 射劍’(중검, 은검, 월검, 사검, 격검, 사검)
막상 검자(劍字)를 접미(接眉)해놓고 보니 의미는 명확히 되었으나 오히려 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석생이 어떤 사람인가.
이미 검가(劍家)에 든 지 오십 여년이 넘은 사람이 아닌가. 그가 내게 준 화두가 이리
가벼울 리는 없다. 미시마는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유산검(流散劍)은 흐름이다.
나의 이 기법에 무거움(重)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감춘다(隱)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미시마는 만쿠모를 집어 들었다. 무거움. 석생에 대한 보고서에서
석검(石劍)이란 말이 있었다. 분명 발경(發勁)이었다. 그렇다면 중(重)이란 중류(重流)로
해석될 수 있다. 나에게 없는 기법이다. 은(隱)은 유산검의 잠저(潛底)수법이다.
빠름을 취하면서 검의 그림자를 감추는 연검(練劍)은 내가 검을 잡은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온 수련이었다. 그런데 월(月), 사(絲), 격(擊)은 무슨 의미인가.
사(射)는 방사(放射)임에 틀림없다. 중류(重流), 은류(隱流), 방사(放射)는 찾은 듯하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서재 바닥에는 화선지가 수북히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세 가지를 찾았다.
무언가 더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여섯 글자에 두 글자가 더 붙는다. 아니, 붙여져야만
될 것 같다.
‘重隱月絲擊射劍流’(중은월사격사검류)
이렇게 보면 나는 지금까지 ‘중은사류(重隱絲流)’를 근간으로 삼아온 것이다.
비록 중류(重流)를 얻지는 못했으나 어떻게 하면 나의 검으로 만들 수 있는지는 찾았다.
나머지는 ‘월사격검(月絲擊劍)’이다.
월사(月絲)는 글자 그대로 달빛이 실타래 같은 것이다. 검기(劍氣)로 능히 만들 수는 있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것은 내게 하나의 새로운 검(劍)을
만들도록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를 삼류(三流)와 일검(一劍)으로 부를 것이다. 월검(月劍)
은 유산검(流散劍)과 함께 나의 검이 될 것이다.
갑자기 소나기처럼 피로가 몰려들었다. 미시마는 바깥 공기를 마시려 문을 열었다.
백로(白露)가 지난 가을 밤하늘에 별자리가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틀 밤이 지난 것이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건 허기다.
미시마는 따뜻한 된장국 한 그릇을 마시고 싶어졌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쓸었다.
7.
석생에게도 지난 이틀 여는 몹시 바쁜 날들이었다. 첫날밤은 특히 더했다.
미우라는 미시마를 보내놓고 다시 오쿠노(奧野)와 다부치(田淵)에게 각각 조원(組員) 5명을
데리고 석생의 집을 지키도록 하였다. 미시마와 석생의 비무는 분명 양패구상 할 확률이
높았고 미시마의 성격상 다친 석생을 건드리는 걸 참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무라세와 요시다에게 현장에서 처리하도록 지시해두었지만 그들만으로 상대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오쿠노, 다부치 양조(兩組)까지 투입된다면 확실히
석생의 목줄을 접수할 수 있으리라 단정했다. 미우라는 무라세쪽과 오쿠노쪽이 서로
임무를 모르도록 철저히 각개 명령을 하달했다. 삼중(三重)의 사망로(死網路)에서 석생이
살아날 확률은 전혀 없다고 미우라는 확신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과 같지 않아 미시마는 석생의 손에 이끌려 칼 한번 뽑지도 않고
그의 서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셈이었다.
미우라가 요시다로부터 엉뚱한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은 그날 밤으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무라세는 석생의 집 근처에서 미시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시다가 보고하는 내용을 미우라는 금방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손을 잡았고, 먼저 가라고
했다. 미시마가….
미시마에게는 무슨 복안이 있는 것인가. 미우라는 잔뜩 혼란스러워졌다. 미시마는 비록
미우라의 아래로 편제(編制)된 인물이지만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자(者)가 아니었다.
이토 통감의 신뢰뿐만 아니라 미우라 자신이 보기에도 미시마는 옅은 경지에 오른 검객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그리하였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우라는 잠시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쿠노와 다부치 조(組)는 어찌하고 있는가. 그들에게는 비록 필살(必殺)을 명령하긴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 아마도 섣불리 공격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우라는 빠르게
모여지는 판단들을 정리하며 요시다에게 가만히 말했다.
“미시마와 함께 움직이도록.”
오쿠노 타쿠마(奧野巧馬)는 다부치 마사나오(田淵正直)와 동문(同門)이었다.
무사계(武士界)에 입문하기 전에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지냈었지만 지금 둘의 관계는
서먹했다. 나이가 세 살이나 아래인 오쿠노가 다부치의 상관(上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임무에서도 2개조가 구성되긴 했지만 최고 명령권자는 오쿠노가 되어있었다.
미우라의 명령에 따르면 백로(白露)날은 반드시 석생이란 인물을 제거해야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석생은 어떤 일인(日人)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무쥬(武中)에서도 최고수라는 미시마였다. 석생을 치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12명의 자객단(刺客團)은 모두 오쿠노의 최종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쿠노는 일순 혼란스러웠다. 석생과 미시마의 태도로 보면 둘은 싸우는 분위기가 아니다.
지금 치면 미시마가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오쿠노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오쿠노는 잠시 지켜보기로 하고 나머지 인원들에 바로
잠복 지시를 내렸다.
다부치는 오쿠노의 명령이 탐탁지 않았다. 머리가 허옇게 쉰 노인 하나를 상대하는데
십여 명이 달려온 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판단으로는 무쥬의 미시마가 있을 때 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인데 오쿠노는 그의 이런 건의를 무시하고 말았던 것이다.
윗선이 이렇듯 사이가 좋지 않자 두 조(組)사이에도 틈이 벌어져 있었다.
잠복 중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팽팽한 경쟁심이 양측에 남겨진 것이다.
석생이 집 주변의 이상한 기운을 알아챈 것은 산에서 내려와 집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미시마는 전혀 그런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석생은 수 대(代)에 걸쳐 쌓아온
집 주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까지도 그 변화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숫자는 열명 남짓, 모두 살기가 그득했다.
싸늘한 밤공기에 진득한 피 냄새가 실렸다. 이들이 이처럼 노골적인 살기를 보인다는
의미는 뻔한 것이었다. 석생은 이들을 빨리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화두(話頭)를 미시마에게 던지고 서재를 나온 석생의 손에는 애검 서명(瑞名)이 들려
있었다. 석생은 천천히 진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살기는 다시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한 석생은
겹사보로 걸음을 뛰듯이 바꾸었다.
겹사보는 발가락 끝, 특히 엄지발가락으로만 튕겨지듯 걷는 걸음이었다. 말이 걷는 것이지
어지간한 전력으로 뛰는 뜀박질보다 빨랐다. 특히 산길에서는 작은 디딤돌들을 차듯이
하며 탄력을 만들어내는데 이만큼 효율적인 걸음새는 없다.
오쿠노는 석생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산으로 향해가는 모습을 보며 잠시 판단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가 움직인다. 이 밤에, 그것도 산으로. 이것은 명백한 유인(誘引)이다.
그러나 지금 그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 할 것인가. 오쿠노는 다부치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자기 조(組)가 먼저 뒤따를 테니 십여 분 후 바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 조원(組員)들과 함께 석생이 간 진솔산의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방밖으로 나서기 전, 십여 명을 상대할 계획(計劃)을 생각하였다.
이 밤에 정상적인 비무는 안된다. 그렇다면 다시 산으로 가야한다. 그곳에서 최대한
빠르게 제거한다. 적어도 두 명 이상의 고수는 있을 터, 그들에겐 그들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겠다. 석생은 두 군데의 장소를 마음속에 정했다. 수련장으로 쓰는 공터 위쪽과
그곳으로 가는 첫 번째 산굽이였다. 그곳에서 끝내야 한다. 석생은 검을 힘주어 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밤 산길을 뛰어가며 오쿠노는 약간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노인네가 일흔 넘어서 도대체 어디까지 갈려는 건지, 이런 속도라면 십여 분 이상은
절대 계속 뛰기 어려울 텐데도 벌써 이십 여분 동안 석생을 따라잡고 있질 못하고 있다는데
신경질이 났다. 뛰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방향을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오쿠노는 계속해서 조원들에게 서두르라는 독려를 했다.
오르막길에다 산굽이를 돌아가는 곳이었다.
오오키(大木)는 오쿠노 조(組)에서 가장 발이 빨랐다. 요시모토(吉本)와 함께 산굽이를
꺾었을 때, 오오키가 먼저 어렴풋한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왼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요시모토도 뒤이어 오오키의 기합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몸을 날리며 동시에 칼자루를
잡아채었다. 오랜 살검으로 다져진 감각적인 발검(發劍)이었다.
석생이 이곳을 염두에 둔 것은 오르막길이기 때문이었다.
인체(人體)는 오르막길에서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뒷축에 자연적으로 힘이 실려
도약(跳躍)이 쉽지가 않다. 또한 시야(視野)가 걸어가는 앞쪽의 길과 맞닿은 곳의
하늘 사이에서 일종의 착시(錯視), 복사(複寫)현상이 나타난다. 더군다나 굽이치는
곳이라면 평상감각과는 다르게 마련이었다. 석생은 여기에서 일차 공격을 준비했다.
처음 다가온 자는 예상 밖으로 발검이 빨랐다. 그러나 석생은 여유 있게 안치 걷어내며
상대를 베어 버렸다. 뒤이어온 자는 도약과 발검은 좋았으나 앞쪽의 인물로 인해 칼이
무디어졌다. 그 틈을 활용하여 석생이 가볍게 발목을 베었다. 목숨은 부지하겠으나 다시
칼을 쥐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두 사람을 처리하자마자 석생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공터로 달렸다. 뒤쪽에서 들리는 발걸음은 추격자의 숫자가 네 명임을 선명히 가르쳐주고
있었고 그렇다면 굳이 기습을 할 이유가 없었다. 기다려야하는 것이다.
옆구리가 완전히 베어져 버린 오오키와 발목이 절단된 요시모토를 보며 오쿠노는 석생에
대한 강렬한 전의(戰意)를 느꼈다. 잘못 보았다. 그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는 그의 땅, 우리가 이방인이다. 천천히 따라간다. 곧 다부치가 올 것이다.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오쿠노는 남은 세 명에게 발걸음을 늦추라고 지시했다.
그렇다고 이 기세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단지 조심해야 할 뿐이다. 더 조심해야만 한다.
오쿠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터에는 아직도 얼마 전 석생이 수련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석생은 서명(瑞名)을 가볍게 떨쳐내었다. 두 사람의 피를 묻혔지만 오늘 밤은 더 많은
자들의 피를 부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먼저 건드리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감히 칼을 든 나에게 덤비다니 오늘 너희는
조선검객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석생은 서늘한 밤 산의 기운을 깊이 흡입했다.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쿠노는 다시 한 구비를 돌면서 무언가 육중한 기운을 느꼈다.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까울 줄 알았다면 다부치조(組)를 합세 시켜서 오는 것이 옳았다. 남은 인원은
네 명, 좀 전 그의 수법으로 보면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쪽에 확률이 가깝다.
다부치를 믿을 수밖에 없다. 오쿠노는 부정적인 사념(邪念)을 떨치며 마음을 차분히 하려
깍지 손을 끼고 우두둑 꺾어 댔다.
어차피 서로가 말이 통하지 않는 차였다. 오로지 검(劍)만이 이야기를 대신할 뿐이었다.
석생은 하단세(下段勢)로 서명(瑞名)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오쿠노가 발검을 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이미 중단세(中段勢)로 석생을 겨눈 채 오쿠노의 지시를 기다렸다.
합공(合功)을 위해서는 상대의 몸짓둥을 읽는 눈매가 중요했다. 오쿠노는 석생이 검을
하단세로 떨궈 둔 채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수비적인 검세를 취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우선 세 명으로 그를 흔들어보는 편이 좋을거라 여겼다.
지형에 익숙한 석생은 굳이 이들을 선제(先制)할 생각이 없었다.
공터라고는 하지만 과거 사찰이 있었던 곳이어서 군데군데 주춧돌이 남아있었다.
평지(平地)라기 보다는 울퉁불퉁하고 장애물까지 있는 곳인 셈이다. 여기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발밑에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지만 석생은 눈을 감고도 돌부리
하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주춧돌이 있는 공터의
좌측면 쪽에서 저들을 맞이하였다.
석생은 집 근처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었다. 만일 그들이 합세한다면,
이 싸움은 힘들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빠르게 끝내고, 내려가면서 그들을 거꾸로 내가
마중해야 한다. 이건 기세의 싸움이기도 하다. 석생은 칼자루를 가볍게 했다.
굳이 목숨을 취하지 않더라도 패퇴시키는 게 바람직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쳐라!”는 오쿠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명의 칼이 움직였다. 석생은 몇 차례
칼걷이를 한 후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좌측에서 오는 놈을 가볍게 안가로 베었다.
석룡검(石龍劍) 제삼세인 좌형(座形)가로베기는 일순간 상대로 하여금 나를 사라지게
만드는 은검(隱劍)이었다. 허벅지로부터 단전까지 길게 베인 상대는 더 이상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석생은 크게 발짓둥하며 오른쪽의 검을 쳐 내리는 자를 밧엇베어 버렸다.
칼을 내리치다가 두 팔을 베인 그 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칼을 놓쳤다.
팔이 달아나지는 않았지만 중간이 베여 너덜해진 상태였다. 석생이 검로를 한 치 죽인
덕에 목숨은 부지한 것이다.
뒤쪽의 공격자는 석생의 좌우 공격에 잠시 칼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석생은 하단세의
칼을 쳐올리며 뒤 걷어내는 자세를 취하고는 바로 칼을 내리 후렸다. 석생의 검(劍)인
격중세(擊重勢)였다. 상대는 석생의 칼을 받았지만 이내 자신의 칼을 놓고 무릎을 꿇었다.
가만히 있던 그가 부르르 떨면서 뒤로 넘어졌다.
마지막 석생의 검이 휘둘려 졌을 때, 오쿠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가 상대한 자는 지금껏 자신이 보아온 조선검객들과는 너무 큰 실력 차이를
보였다. 일흔 노인의 검이 아니었다. 오쿠노는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석생은 남은 왜인(倭人)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는 이미 기세를 잃은 멧돼지 같았다.
숨결이 나빠진 것을 느낄 정도라면 그의 칼은 떨고 있는 터,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목숨이 오가는 싸움을 할 줄 알아야 하는 검수(劍手)라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다.
늘어진 검을 가볍게 착검을 하고 석생은 하산(下山)했다. 석생의 발걸음이 들리지 않게
되자 오쿠노는 무릎을 꿇었다. 이런 공포(恐怖)라니. 오쿠노는 칼을 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