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Proust)는 어느 겨울날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입 베어 문 순간, 어릴 적 고향에서 숙모가 내어주곤 했던 마들렌의 향기를 떠올렸다. 프루스트의 머리에 펼쳐진 고향의 기억은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집필로 이어졌다. 이후 향기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르게 됐다.
과학자들은 프루스트 현상의 비밀을 뇌와 진화에서 찾고 있다.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의 야라 예슈런(Yeshurun) 박사는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향기와 기억 간의 연관관계를 추적한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16명의 성인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달콤한 배나 눅눅한 곰팡내를 맡게 했다. 90분 뒤엔 같은 사진에 다른 냄새를 맡게 했다. 1주일 뒤 여러 가지 냄새를 맡게 하면서 뇌의 활동을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했다.
뇌의 특정 부위가 작동하면 그쪽으로 피가 몰리는데, fMRI는 이를 영상에서 불이 반짝이는 형태로 보여준다.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1주일 전 두 번의 실험 중 첫 번째 맡았던 냄새에 노출될 때 사진을 더 잘 기억했다. 이때 뇌에서는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인 해마에 불이 켜졌다. 특히 첫 번째 맡은 냄새 중에는 곰팡내처럼 기분 나쁜 냄새에 더 강력한 반응을 보였다.
예슈런 박사는 "뇌는 좋든 싫든 가장 먼저 맡았던 냄새의 기억을 각인한다"며 나쁜 냄새에 대한 기억이 강한 것은 진화과정에서 독초나 썩은 음식물, 천적의 나쁜 냄새를 빨리 알아채야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좋은 향기는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2007년 3월 독일 뤼벡대 얀 본(Born) 박사는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장미향을 맡으면 기억력이 높아진다고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했다.
본 박사는 실험참가자에게 잠들기 전 카드의 그림과 위치를 외우게 했다. 절반은 자는 동안 장미의 향기를 맡았고, 나머지는 아무런 향을 맡지 않았다. 다음 날 카드에 대해 묻자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장미향을 맡은 그룹의 정답률은 97%였다. 장미향을 맡지 않은 그룹의 정답률은 86%에 그쳤다. 본 박사는 장미향이 뇌 기억 중추인 해마를 활성화한다고 설명했다.
◆뇌 감정 중추 자극해 추억 불러
낙엽 태우는 냄새는 군고구마를 먹었다는 단순한 사실만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을 받던 따스한 감정이 더 생생했다. 프루스트 효과의 세계적 전문가인 미 모넬화학감각연구센터 레이철 헤르츠(Herz) 박사는 향기가 뇌의 감정영역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실험참가자들에게 특정 향기를 맡으면서 감정이 들어간 개인적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자 이번엔 뇌 영상에서 편도의 활동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편도는 뇌의 감정 중추다. 반면 시각적 자극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헤르츠 박사는 "향기는 감정이나 향수(鄕愁)와 깊이 연결돼 있다"며 추수감사절 때 오랜만에 찾은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요리나 거실의 양초에서 나는 냄새가 없다면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향기와 감정의 관계는 뇌의 진화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헤르츠 박사는 편도가 있는 뇌의 변연계가 원래 후각을 담당하던 조직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감정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후각 덕분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빗대 헤르츠 박사는 "나는 냄새를 맡는다. 고로 나는 느낀다"고 말했다.
◆브랜드 마케팅에도 활용
향기와 감정의 연결은 마케팅에도 활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다. 아이스크림용 향료는 수십 가지가 있지만, 바닐라향 아이스크림이 매출의 절반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바닐라향은 엄마의 모유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소비자가 무의식적으로 바닐라향 아이스크림에 친근함을 느끼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브랜드 마케팅에도 향기가 필수적이다. 인간은 정보의 80~90%를 시각과 청각을 통해 얻는다. 하지만 LG생활건강 김병현 향료연구소장은 "브랜드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려면 향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청각 정보는 단기 기억이지만 후각은 장기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LG생활건강은 향이 오래 남는 샴푸를 생산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향기에 소비자가 무의식적으로 해당 브랜드를 떠올리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