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톡톡 터졌습니다.
바야흐로 봄이 시작되었네요. 여기저기 꽃소식이 시작되는 삼월에
이 싱그러운 봄날에 우리는 김용락 시인을 만납니다.
최근 발표한 시집의 제목도 [산수유나무] 입니다.
삼월에 모시기를 너무 잘 한 것 같지요.^^
김용락 시인과 함께 할 그 날 설레며 기다려 봅니다.
많이 와 주실거죠?
기다리겠습니다.
시 토크/ 박상봉 시인
노래/ 통기타가수 정영주 님
김용락 약력
1958년 경북 의성 출생
1984년 창비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 등단
1985년 <분단시대> 평론 등단
현재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장
한국문회분권연구소 이사장
경운대 교양학부 교수
-저서-
●시집
『푸른별』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시간의 흰 길』 『단촌역』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같지 않은 시』 『산수유나무』
●문학평론집
『시와 함께하는 오후』
『민족문학논쟁사연구』
『지역, 현실, 인간 그리고 문학』『예술과 자유』『이야기로 풀어 읽는 시의 세계』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
『평화와 깨달음을 찾아가는 교육』
『영혼을 깨우는 독서』
『문학과 정치』
신영복 선생님
수험생인 작은 딸애와
마루에서 치맥을 먹고 있는데
밤 10시 45분 연합뉴스 티비에서
붉은 띠 자막 속보로
신영복 선생님 별세를 알린다
입으로 향하던 맥주잔이 멈추었다
어, 이럴 수가
갑자기 10년 전에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님이 생각났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오늘은 그대가 내일은 내가...
그렇지 인간은 영생의 존재가 아니지
누구든지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
누구나 왔다 가는 평범한 이 진리를
20년 전 김남주 시인이 작고해서
민족문학인장을 한다고
서울 경기대학교 교정에 임시 연단을 만들 때
못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잔못을 입에 문 채
2월 늦추위에 망치를 들고 사다리 위에서
현수막 걸게 틀에 못질 하던
잠바 입은 남루한 중년의 목수노동자
그때 나는 그 신영복을 처음 보았지
한참 기다리니까 작업 끝내고 내려와서
미안해하며 내 손을 잡아주던
사색의 은사
나의 또 한 명 스승이던 전우익 영감이
입만 띠면 신 샘, 우리 신 샘 하면서
신영복 찾아다니며 칭찬하고
글씨 얻어오고 하시더니
전 선생님 뇌졸중으로 쓰러져 자리에 눕자
신 선생님 경북 봉화까지 내려 와
전 선생님 돌아가시면 우리나라 지도에서
봉화라는 지명을 없애야 되는 것 아니에요?
부창부수 서로 띄워주며 조크하시더니
이렇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구나
무기징역살이로 햇볕을 못 쫴 피부암에 걸리셨다나
‘頓淡’ 거실 벽에 걸린 액자
우익 선생님이 용락이 준다면서 받아온 신영복 글씨
내가 불필요하게 생각 많은 인간인 것을 어떻게 아시고
욕심 많은 못난 인간인 것을 어떻게 아시고
그 많은 좋은 말 가운데 하필 ‘돈담’을 고르셨나
마루에 누워 그 글씨 보면
한여름에도 등짝이 서늘해져 벌떡 일어나곤 했지
(2016. 1. 15)
심야눈물
-이오덕 일기1(1962~1977. 양철북 2013)
자료 뒤진다고 이오덕 일기를 읽는데
내가 단촌초등학교 4~5학년 무렵이던
1968~9년을 읽는데
어찌 그리 당시 모습이 생생한지
어찌 그리 부패한 관료, 부족한 선생이 많은지
어찌 그리 촌아이들은 불쌍한지
또 어찌 그리 이오덕 선생님께서는
타협 없이 곧으신지
요즘 말로 왕따였겠구나 생각하다가
“마음 붙일 곳 없는 외로움(56쪽)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62쪽)” 라는 구절을
읽다가 갑자기 울컥해져서
이오덕 선생님 진짜 그립습니다
하늘나라에 잘 계시죠
밤 12시 지하연구소에서
나 혼자 두 팔을 번쩍 쳐들고 크게 고함을 질렀더니
그만 내 두 눈에 심야눈물이 핑 돌았다
(2016. 1. 20)
가혹한 운명
경상도의 어느 엄숙한 종가의 종부로
평생을 살아오신
일흔 넘은 먼 집안 누님께서
신영복 선생 별세 소식을 듣고
아우님
진짜로 신영복 씨가 간첩 행위를 했나?
하고 묻는 것이었다
아니요, 그냥 독서그룹에서
활동했다고
그 분이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는데요
그럼 왜 무기징역까지 살았는고?
가혹한 운명이지요 뭐
으음, 가혹한 운명...
하시더니 일흔 누님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물론 나는 6~70년대 독재정권의 그 많던 간첩조작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2016. 1. 26)
울진 불영사
내 10대 말
야위고 남루했던 청춘
젊은 어느 여름날
꽉 막힌 세상
피안을 그리다 소문만 듣고
울진 불영계곡 불영사 찾아간 적이 있다
낯섦과 두려움 속에
자신을 던져넣자
먼지와 자갈길 돌부리가
헤진 신발을 뚫고
사정없이 내 육체와 여린 정신을 찔렀다
계곡을 묻어오는 저녁 어스름과
서편 핏빛의 옅은 노을이
예리한 통증처럼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갑자기 내린 소낙비 피해
불영지 돌아 청풍당 처마 밑
몸을 숨기자
자욱한 빗줄기 속에서
부처님 그림자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날개 죽지가 심하게 젖은 가련한 참새처럼
빗속에서 마냥 떨고 있던 내 슬픈 청년
그게 인생의 본 모습이라는 걸
그때는 차마 몰랐지
자갈길 돌부리에 절뚝 절며 걷는 게
어두운 산 속에서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온몸을 떨며 기다리는 게 삶이라는 걸
(2016. 2. 19)
어둠
산 속에 밤이 깊었다
어둔 숲 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이따금 정적을 깨운다
산 너머 저 멀리서 달이 떴는지
무릎 꿇고 앉아 바라보는
산의 이마는 윤곽이 뚜렷하다
초저녁 얕은 처마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도
어둠에 묻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문득, 초 가을밤에 느끼는
인생의 이 쓸쓸함
그러나 산 너머 저쪽 도시에는
화려한 전깃불이 바삐 오가는 사람과
고급 아파트를 오래 비출 것이다
그 그림자 아래로
여전히 얼어 죽은 노숙자의 흰 뼈가
먼지 속에 굴러다닐 것이다
(2014. 9. 17)
눈물
모 문학잡지에 실을
「분단시대」
문학동인 30년사를 쓰다가
홀연히
80년대 어느 봄날
청주 미평교도소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면회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그 선하디 선한 두 눈을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콘크리트 천장을 쳐다보던
도종환 시인의 눈이 떠올랐다
그때, 그가 숨기려 안간힘을 쓰던
반짝이는 눈물방울 몇 개를
나는 기어코 보고 만 슬픈 기억이었다
감옥 밖에서는
엄마 없는 아기가 팔을 부러뜨렸다고...
(2014. 5. 13)
‘허물’이라는 말
3월 이른 봄 어느 날
줄기세포연구로 유명한 황우석 박사가
경상북도 영천시 보현산 기슭에
마치 야생화처럼 쪼그려 앉은
고방사라는 조그만 사찰에 들렀는데요
산 흙 일구고 논밭 가꾸던
촌 무지랭이와 불자 몇 모여 저녁 공양을 마치고
밥상을 마주 보고 앉아
세상사 이야기 나누는데
황 박사님을 이 지경 만든 건
소위 그 잘난 기득권 세력의 음해 아니에요?
누군가 박사님을 시기해서 그러는 것 아니에요?
온갖 미운 소리들이 불쑥 불쑥 나왔다
그때마다 황 박사라는 사람
두 손을 비비며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허물입니다
그게 다 제가 잘못한 저의 분명한 허물입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수도 없이
자신의 허물을 자임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풍문처럼 그가
위대한 과학자인지 사기꾼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물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는 밤도
흔치 않던 깊은 산 속의 봄밤이었다
(2014. 3. 31)
단촌역 은행나무
단촌역 입구에
큰 은행나무가 몇 그루 서 있네
40년 전 내가 중학교 통학할 때는
결코 보지 못했던 그 나무들
새벽 통학생 발자국
서울 공장 간다고 기다리던 밤기차
모두 사라지고 화물차의 기적만
이따금 산협을 울리는 간이역
만추의 가을비 속에서
안부를 여쭙는 듯 떨어뜨리는 노오란-
저 멀리 허공이 된 세월 속으로
아! 정말 인생이 깊다
(2013. 12. 9)
권정생이라는 문학
1990년대 후반 어느 날
내가 안동 조탑동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서울의 대형 출판사 사장이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에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모아
자기 출판사에서 호화장정본 전집을 만들자고 제의 했다
작품을 한 군데 모아두면
독자들이 읽기도 좋고
책도 모양이 나고...
잠시 후 권정생 선생의 힘없는 입술이 달싹거렸다
“내사 그냥 둘라니더
내가 어려울 때 책을 내 준 고마운 출판사들이고
또 모두가 작은 군소출판사들인데
혹시 내 책이 몇 권이라도 팔려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고마운 일이고요...”
그 권정생 선생은
물론 큰 출판사에서 호화전집을 내지 않았고
자신이 죽거든 문학비나 기념관을
절대 짓지 말라고
자신이 살던 댓 평짜리 슬레이트집도
헐어서 평지로 돌려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다 돌아가셨다
아 벌써 6년이 지났구나
그 ‘문학’이 우리 곁을 떠나간지가...
(2013. 7. 17)
절 3천 배
꼭 30년 전, 1982년 가을
대학 졸업 학술세미나를 하기 위해
가야산 해인사에 갔다
反戰 시인 W.H 오든에 빠져있던
당시 영문학도 나는 밤새 술만 잔뜩 마시고
다음날 새벽 ‘빈 콜라병’의 시인 신동집 은사님의 인솔 아래
백련암에 올랐다
그곳에는 절을 3천배 해야 만나주는
성철 스님이 계신다고 했다
골방에서 원고지만 쳐다보던 젊은 약골 문청에게
백련암은 너무 높았다
헉헉 거리며 암자에 다다라
절 3천배를 어떻게 하겠노?
지레 겁을 먹고 산 구경만 하고 내려왔다
그날 절 3천배가 아니라 3배 만이라도
정성스레 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하루 3천 번 남에게 허리를 굽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더라면
나는 벌써 부처가 됐을텐데...
절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下心 하지 않고 사는
이 삶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2012. 10. 3.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