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고려와 요 조선과 청의 전쟁에 관한 책을 잃고 있습니다
참 정말 조선이 한심하더군요 고려와 비교해서...
고려 당시 요보다 모든 면에서 국력이 달렸다 조선이 당시 후근(청)보다 전체 인구나 국력이나 약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요나 후금 청은 기병을 중심으로 침공합니다 요은 청보다 몇배나 그리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최강의 병력으로 침공했습니다 2번째는 요 성종이 직접 친정했습니다 40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몰고
고려는 산성과 청야전술을 주로 사용합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근데 고려는 적극적으로 성 밖에서 배의 적의 병력과 싸우기도 했는데 놀라운 점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기병은 1만도 채 안됩습니다 근데 고려는 9만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기병은 동아시아 최강이라고 평가되어지는 요의 기병을 깨부숩니다 2차 침공시 요의 장친군 소속 정예기병 1000기가서경으로 정탐하러 갔다가 대장 을름을 비롯해서 하합문인진사 한기를 포함해서 모두 전멸되고 단 한명도 돌아가지 못햇습니다 당시 고려는 동북계 도순검사 탁사정의 휘하장수 정인으로 하여금 1000기를 거느리고 습격했습니다 단 한명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요의 성종이 그래서안졍역에서 3일동안 지체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앙규장군이 통주성 탈환작전을 할때도 고려기병 200백기가 나머지 2만의 보병과 보조를 해가며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요군은 항상 야간기습을 받았는데 고려는 기병을 많이 활용합니다 조선이 어설프게 야간기습하다가 오히려 역습을 받아 괴멸당한 예와 비교가 됩니다
당시 고려는 조선보다 인구도 적고 중앙집권도 덜 됬습니다 근데 더 불리한 조건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3차때 요군은 10만중에 살아 돌아간자가 1000명도 안됩니다 역시 1차 2차때도 요군은 질서정연하게 퇴군하지 못하고 고려의 기습을 받아 무질서하게 도강하다가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황페되었다고 하지만 당시 서북 평안도나 동북 함경도는 피해가 덜 받은 지역으로 충분히 받을 경제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군은 실전경험도 풍부하고 화기같은 화약무기에서는 우위를 보일수도 있었는데(초창기 후금과 싸울때만) 왜 일까요?
무능한 정권과 그리고 북방민족을 막는데 부적절한 전술인 삼수병제도 명의 소극적인 대응이 복합적으로 된 걸까요? 충분히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실패했더라도 적어도 피해를 줄일수도 있었습니다
외국책에서 병자호란 다룬부분을 기억하는데 "꽤 괜찮은 조총등으로 무장한 조선군이 여전히 창 방패등으로 무장한 청군에게 무릎을 꿇은것"을 보고 tragic comedy 라고 평하더군요. 사실 임진왜란때 만큼이라도 극력적으로 항전했다면 승패를 알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인조가 목숨을 건지고 싶어
안달을 했다는것을 들수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어떤 쬬다가 이괄의 난때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오합지졸들이 이괄을 왜군아니면 막을수 없다라는 말을 한것을 기준으로 조선과 왜의 근본적 전투력의 차이의 증거로 추정하고 꼴같쟎은 한탄을 한것을 본적 있는데 그런 단편적인 사고방식은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
고려도 건국초기에는 보병중심이었고 여진과의 전쟁에서 기병전술을 극력보완한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부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일본학자들의 의견을 좇아 한반도남부의 기병술은 4세기 후반부터 정착된것으로 보고 있지만 삼국사기 문헌등을 보면 그보다 훨씬 전에 많은 기병사용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 후에 윤관의 북벌등에서 보병중심의 고려군이 기병을 활용한 여진군에게 고전을 하면서(심지어는 산악전에서 까지) 기병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고 그때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육성한것 같습니다.(기병중심의 별초까지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오히려 기병이 많은 우리군사의 무기력, 특히 산이 많은 우리지형
에서의 부적합성이 논의 되었습니다. 병자호란때만해도 이미 기병의 전성시대는 지나간 시기였고 정치사회적 혼란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서양에서도 기병은 19세기까지도 유용하게 쓰였지만 17세기만해도 과거와 같은 무적의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내진단은 인조 얼간이와 그를 추대한
첫댓글 지겹다... 답도 없는 조선 이야기.
별로 안좋은 리플이군요.
지울까요? 저도 참 한심합니다 그렇다고 조선왕조를 부정할수는 없습니다
조선이 맘에 안들긴 하죠..."지금 기준으로 봐서는" 그건 인정해야하는거 아닐까요?
고려 전성기의 시작인 고려 '성종'과 조선에서 '임란 후의 전후 수습 부진 그리고 수습책을 둘러싸고 지도층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을 발판으로 해서 성공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를 비교하신다면... 그다지 비교대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으음. 그리고 북방의 군사력은 정묘호란 3년전의 '이괄의 난'으로 그다지 강력하였다고 볼 수는 없겠군요. 도리어 이괄의 난을 통해서 그나마 잘 훈련되어 있던 병력도 소모되었다고 보는게 옳겠지요?
예 맞습니다
고려 최고의 전성기는 문종이 아닐까요?
하지만 결국 고려나 조선이나 기본 군사개념이 공세적인 입장보다는 수세를 중심으로 했다는게... 조선이 바로 고려를 계승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앗!.. 예. 정정합니다. 최고 전성기는 문종이군요.^^;;; 성종은 귀족사회의 토대를 닦고.. 문종에서 고려귀족사회가 완성되었지요... 으음. '成'자에 무심코 넘어가 벼렸다는..-_-;
외국책에서 병자호란 다룬부분을 기억하는데 "꽤 괜찮은 조총등으로 무장한 조선군이 여전히 창 방패등으로 무장한 청군에게 무릎을 꿇은것"을 보고 tragic comedy 라고 평하더군요. 사실 임진왜란때 만큼이라도 극력적으로 항전했다면 승패를 알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인조가 목숨을 건지고 싶어
안달을 했다는것을 들수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어떤 쬬다가 이괄의 난때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오합지졸들이 이괄을 왜군아니면 막을수 없다라는 말을 한것을 기준으로 조선과 왜의 근본적 전투력의 차이의 증거로 추정하고 꼴같쟎은 한탄을 한것을 본적 있는데 그런 단편적인 사고방식은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
고려도 건국초기에는 보병중심이었고 여진과의 전쟁에서 기병전술을 극력보완한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부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일본학자들의 의견을 좇아 한반도남부의 기병술은 4세기 후반부터 정착된것으로 보고 있지만 삼국사기 문헌등을 보면 그보다 훨씬 전에 많은 기병사용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왜구 침략을 전기병부대로 맞아 싸운 기록등이라든지 보면. 여하튼 5 세기 전후해서 중장기병등 본격적인 기병의 활성화가 보이는 듯하기도 하지만 통일신라 초기에 보면 다시 보병중심의 군제가 보이는듯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고려초까지 이어졌다는것이 무난한 해석이고요.
그 후에 윤관의 북벌등에서 보병중심의 고려군이 기병을 활용한 여진군에게 고전을 하면서(심지어는 산악전에서 까지) 기병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고 그때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육성한것 같습니다.(기병중심의 별초까지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오히려 기병이 많은 우리군사의 무기력, 특히 산이 많은 우리지형
에서의 부적합성이 논의 되었습니다. 병자호란때만해도 이미 기병의 전성시대는 지나간 시기였고 정치사회적 혼란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서양에서도 기병은 19세기까지도 유용하게 쓰였지만 17세기만해도 과거와 같은 무적의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내진단은 인조 얼간이와 그를 추대한
사대병에 걸린 늙은이들의 공동작품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