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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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에 대한 변명>
학봉은 죄갚음을 했습니다.1차진주성대첩의 1등공신이 세분입니다.
학봉 김성일(경상우도관찰사),충무공 김시민,충장공 이광악 장군(곤양군수) 세분이 진주성전투 1등공신입니다.세분중의 수공(首功)은 학봉 김성일입니다.
김성일은 진주성전투 다음해 진중에서 전염병으로 생질과 함께 죽지만 두분다 선무원종공신에 들지 못했습니다.
학봉이 임진왜란 발발하자 정세를 잘못보고한 죄값을 받으려 금부에서 체포하러온다고 하자,자신이 조정에 출두하겠다고 충청도 직산까지 올라갔지만,류성룡의 진언으로 선조는 학봉의 죄를 사하였습니다.선조가 초유사로 임명했지요.
진주가 위급할 때,호남과 경상도 각지로 의병의 응원을 요청해서 전투를 승리케한 것은 누가 뭐래도 김성일의 공입니다.
학봉은 선비 박성을 호남으로 특파해서 원군을 요청합니다.보성출신 전라좌의병장 임계영,화순출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 등이 "호남을 지킬려면 진주를 지켜야한다"는 학봉의 요청에 호응하여 거창 우척현전투,지례전투,김천전투,성주전투 등을 치렀고 드디어 진주성에 입성해서 김시민 등과 함께 성을 지켰습니다.
이때 망우당 곽재우에게 왜군이 철수할 때 요격하라고 지시했는데 망우당이 군율에 따르지않자 학봉이 곤장을 칩니다.
다음해 2차진주성 전투때는 의병의 지원을 요청한 사람이 없었죠.학봉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김시민은 진주성을 두번이나 비웠는데, 학봉이 질책하며 자신은 외부원조를 책임질테니까 당신은 무관으로서 제발 성을 지키라고 당부했죠.
김시민이 1차진주성전투때 적탄에 쓰러지자 그를 대신해 전투를 지휘한 이광악의 전공은 사람들이 잘모릅니다.
이광악이 난중일기에 20여회 등장한다고 3년전에 후손에게 알려줬는데,그때까지 후손들은 모르고 있었죠.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주관으로 청주에서 학술회의를 했는데 ,난중일기도 안읽어본 서울대 교수가 분석은 하나도 못하고 날짜만 나열했습니다.무지하고 무능한 후손과 이상하게 학술회의를 진행하는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류한성 회장과 이천용(덕수이씨) 사무총장을 비판합니다.
학봉이 임진왜란 발발과 전쟁준비를 안했다고 책임자라고 하는 것은,조정의 무능을 감싸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더구나 나라를 망친 서인과 그 후예 노론들이 400년간 김성일의 책임으로 전가했습니다.
몇년전 강진의 지방지에 학봉을 두둔했다고 류성룡을 역적과 간신으로 기술한 언론사에 반박을 한 적이 있습니다.그러면 ...류성룡이 천거 발탁한 이순신은 간신과 역적이냐고요.
학봉은 학봉대로,류성룡은 류성룡대로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봅니다.
제가 임진왜란사와 이순신을 연구합니다.학봉은 선조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7등급 특진시키자 예규에 어긋난 일이라고 몇번이나 상소합니다만,그러나 저는 학봉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조정이 살아있다면 그런 언로는 있어야하니까요.
400년을 노론과 일제 친일어용사학자들은 학봉을 비난했지만 저는 노론들이 자기들 책임을 면하려는 꼼수로 봅니다.
난중일기에는 북인과 서인계열 어사들이 한산도나 남해안에와서 이순신과 함께한 휘하 제장들을 탐관오리로 지목하여 삭직시킵니다.그러면 이순신은 휘하 장군들을 조방장등으로 재기용합니다.
이순신을 모함하고 휘하장군들을 탐관오리라고 내친, 서인과 북인들 음모자들에 대한 논문이 한편도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학계는 서인과 노론들과 친일 어용학자들의 흉계에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임진왜란 발발이 단지 학봉 혼자만의 책임과 죄라면 선조와 조정은 책임안져도 되지요.
서인인 안방준은 왜란이 끝난후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김육에게 '선조때 간신 류성룡을 닮았다'라고 비판했습니다.과연 맞는 말일까요?
학봉은 죄를 사하고 초유사로 임명받았습니다.그리하여 관군과 의병을 연결하였고 그 결과가 승전이었기에 진주성대첩은 학봉이 1등공신입니다.
서인계열 광주출신 고경명의 가족들이 안동에서 피난할 때,사돈인 임청각에 안가고 학봉집에서 피난생활을 같이했습니다.이것도 한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영남 이순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