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계획에도 없던 대회인데 모 업체를 통해 일종의 제품 테스트를 하는 일과 연관되어 급조 참가하게 되었다.
예전 전성기 때 같으면 요맘땐 동아마라톤을 대비해서 고성이나 여수 등지를 찾아 훈련삼아 달리곤 했었는데 요즘은 봄과 가을에 메이저대회를 그냥 그 옛날의 훈련대회만도 못하게 달리는 터라...
이번 시즌 들어서서 작년과 같은 악제가 없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런닝거리를 어느정도 채우는 수준에 그쳤고 훈련이라는 단어를 붙일만한 강도엔 전혀 이르지 못했는데다 체중 또한 입문 1년차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70Kg이 넘는 몸무게로 기록을 욕심내다가는 분명 큰 화를 당할게 뻔하니 완주에 촛점을 맞추고 가능하면 후유증이라도 적게 남기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는다.
대회전날 오후에 전주에서 차를 몰고 천안으로 올라와 런닝머신에서 5Km를 맛뵈기 삼아 달린 뒤 목욕탕에서 몸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준비를 마쳤다.
당일날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전날 저녁에 남겨놓은 김밥 두줄을 먹으며 채비를 갖춰 차를 몰고 천안축구센터로 가고 거기다 주차를 한 뒤 고속터미널까지 뛰듯이 걸어 도착, 06:15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탄 뒤론 잠시 눈을 붙이며 무념무상.
9호선 전철을 타고 종합운동장에 이르러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영하7도 아래로 내려갈거라도 했는데 한강에서 자전거길을 따라 왕복하는 코스다보니 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죽음일텐데
종합운동장을 온전히 관통해서 한강변으로 나오니 거기에 출발아치며 시설이 갖춰져 있고 맹추위 속에서도 북적북적 활기가 돈다.
일과 관련된 미팅을 갖고 최종적으로 오더를 받은 뒤 출발복장으로 갈아입고 잠시 워밍업을 하는데 기온이 너무 내려간 상태라 제대로 몸이 달궈질 리가 없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는걸 다행이라고 여겨야지
화장실이 밀려있어 마지막으로 소변을 보려는데도 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되고 출발점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카운트는 끝나고 주자들이 우르르 밀려나가고 있다.
관계자로부터 워치 2개를 스타트 시킨 뒤 주자들 틈바구니로 비집고 들어가 출발매트를 밟는다.
사람이 너무 많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하프와 동시에 출발 시켰단다.
한정된 폭을 가진 한강 자전거길에 한꺼번에 많은 주자들이 밀집되다보니 초반부터 아주 난리가 났다. 하지만 좋은점도 있으니 체감상으로 추위는 확연히 덜 느껴진다.
랩타임을 확인하며 달리던 습관이 20년 가까이 쌓였는데 양팔에 워치를 차고 있을 뿐 내가 원하는 정보는 얻을수가 없는 깜깜이 레이스. 하지만 어떡하랴 이것 때문에 달리고 있는건데
내가 가진 자원으로는 눈뜬 맹인 수준인지라 3시간40분 페이스메이커 무리를 이용해 달리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4명이서 달리고 있는 듯 보이는데 3군데로 무리를 이루고 있고 그 각각의 거리차가 최소 100에서 200이상쯤 떨어져 있다. 그 맨 뒷 무리를 따라 달리다가 중간으로 또 맨 앞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잠실지구 청소년광장에서 고덕생태공원까지를 2회 왕복하는 코스인데 한강코스 하면 떠오르는 평탄함과는 거리가 먼 마치 여수코스의 한부분을 옮겨놓은 듯한 오르막이 동쪽 끄트머리에 버티고 있다.
암사취수장과 바위절터가 있는 언덕인데 경사도 제법 크고 그 길이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보니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는 충격이 엄습한다.
첫회 왕복을 마치며 드디어 하프주자들과 헤어지고 그때부턴 3시간40분 페이스메이커 중 가장 앞서서 달리던 무리와 또한 헤어져 한단계 더 속도를 내어본다.
하지만 문제의 절바위를 지나며 뒤에서부터 우르르 몰려나오며 앞질러 지나가는 그 무리들로 인해 의욕이 확 꺾인다.
반환점을 돌기전부터 맞은편에 지나가는 주자들의 수를 헤아려 봤는데 대충120명은 넘을 듯.
100위까지 시상을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거품 빠지듯 사그라지는 것인지...
그나마 다행인것은 첫번째 페이스메이커 무리만 앞서 나간뒤 거리를 200미터까지 멀찌감치 벌렸을 뿐 그 뒤론 다른 페이스메이커가 앞질러 가진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앞서 나갈때 두명이 뭉쳐 지나갔고 그 뒤에 있는 이들은 아마도 퍼진것.
8Km쯤 남았을 무렵일까 급수대에서 두 명의 페이스메이커 중 한사람이 거의 포기한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제는 이승국 한사람이 이끄는 무리가 저멀리 가물가물
저기를 따라잡으면 어쩌면 100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목표이자 희망이 있지만 거리가 더 벌어지지 않는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형편.
그러던 중 7Km가 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즈음에 눈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누나가 등장, 꿀스틱을 하나 건낸 뒤 같이 뛰자며 옆 산책로에서 달리며 따라오는데 그게 오래가지는 못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 어쩌네 저쩌네 하지만 5분10초 이내의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데 눈으로 보기에 늦어보일 뿐 실제 함께 맞춰 달리는건...
그 뒤로 분위기가 쇄신되서 그런지 노란풍선이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더니 그게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3Km를 남겨둔 지점부터는 전북대 한바퀴만 돌면 된다는 암시를 주며 페이스를 한단계 더 올렸다.
그 덕에 2Km쯤 남은 시기에 거의 따라잡았고 이후로 추월에 성공하고 그 뒤로는 그 앞에 가고있는 배낭 맨 무리까지 추격을 해서 끝내 강나루 선착장 무렵에선 눈앞에 아무도 두지 않고 피니쉬 아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워치를 반납하고 물품 찾고 탈의실천막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방송이 나오며 100위의 기록이 3:36:56이니 자신이 그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확인을 거쳐 트로피를 받아가란다.
도무지 내 기록을 알수가 없는 터라 '38분대 쯤이나 되지 않을까?' 하고 아쉬움을 털어내고 있는데 잠시 뒤 그 백명을 일일이 순위대로 불러준다.
98위 무렵에서 얼핏 나와 비슷한 이름이 지나간 듯 하길래 설마...
탈의실에서 나와 기록증을 출력받았는데 3:36:09로 찍혀있다.
이건 뭐... 의문의 일승!
이번대회는 사상최초인게 세가지가 있는데 그 첫번째는 앞에서 풀어낸대로 사실상 랩타임과 스플릿타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달렸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풀코스를 달리는 내내 물을 한번도 마시지 않았다는 점. (물론 파워젤은 내가 준비해간 3개와 주로에서 제공해주는 1개를 포함해 4개나 먹었고 꿀스틱까지 하면 5개나 다름없다)
그리고 남은 한가지는 혼자서 대회에 참가했다는 점. 대회장에 혼자 오간적은 물론 있었지만 거기에선 동료들을 만나고 어울리고 그랬었는데 이건 1박2일 꼬박 혼자 있었으니...
한가지 더 하자면 확실치는 않지만 내거티브 스플릿을 어쩌면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확인해보려면 이승국님에게 연락을 해봐야 되는데 나중에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