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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9일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은?
마더 데레사가 젊었을 때 어느 빈민굴을 방문하였습니다.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돼지우리 저리가라 할 만한 방에서 술독에 빠져 게으르게 살고 있었습니다.
방엔 등잔이 있었지만 청년은 등잔을 켜지 않고 낮에도 어둡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등잔에 불을 켜자 청년은 화를 내며 불을 끕니다.
성녀는 지지 않고 다시 불을 켰고 청년은 다시 껐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화가 난 청년은 등잔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 깨 버렸습니다.
성녀는 시장에 가서 새 등잔을 사서 돌아와서는 그 방에 불을 밝혀주고 수녀원으로 돌아왔습니다.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찮게 한 젊은 수녀를 통해 그 청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청년은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착실히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마더 데레사와 같은 옷을 입은 젊은 수녀를 보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십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삶 안에서 빛나고 있다고.”
빛에는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빛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게 만들어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날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3 참조).
그 빛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실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세상은 위 청년처럼 빛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2008)는 ‘80억 인구가 눈이 멀고 혼자만 앞을 볼 수 있다면?’이란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눈이 보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본래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이들에게 눈먼이들은 착취를 당합니다.
혼자 눈이 보이는 이는 그들에게 표적이 되어 숨어서 그들과 저항할 세력을 모아야 했습니다.
본래 앞을 못 보았던 이들에게는 눈먼자들의 도시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빛을 거부합니다.
자신들이 차지한 권리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태생소경에게 눈을 만들어주십니다.
당연히 자신들 안에 빛이 있다고 믿었던 유다 지도자들은 그 눈을 뜬 소경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어둠을 더 사랑하여 빛을 보고도 눈을 감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어둠은 세상이 돈과 쾌락과 힘을 추구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러한 삶이 지옥이라고 말씀하십니다.혼자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함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빛을 받아들인 이들을 세상에 파견합니다.
오늘 태생소경이 눈을 씻은 실로암은 그래서 세례로 파견받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동안의 삶이 어둠이었음을 받아들이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거짓의 두렁이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는 분명 행복한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감정을 긍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함을 벗고 거짓의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어둠임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기들 스스로 고통이 행복이라고 믿기로 한 것입니다.
무언가 죄와 그로 인한 고통을 덮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요한 8,43) 라고 하시며,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 라고 하십니다.
거짓말은 세속-육신-마귀가 행복이라고 덮어버리는 어둠입니다.
거짓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라고 하시며
거짓이 없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9일 [사순 제4주일]
사무엘 상 16,1ㄱㄹㅁㅂ.6-7.10-13ㄴ
에페소 5,8-14
요한 9,1-41
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대재난 앞에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이 대재앙을 통해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 전체가 겪는 이 극심한 고통 앞에 왜 신속하게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아무리 곱씹고 또 곱씹어도, 아무리 묵상하고 또 묵상해도, 납득할만한 명쾌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하느님께서 진노하신 결과라고, 그에 따른 징벌을 내리셨다고 외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입니다.
괜히 별 생각없이 엉뚱한 말했다가 비난의 대상,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라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 본연의 나약함과 한계를 자각하고 더 겸손해지라는 메시지.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대악과 재난, 질병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서로가 더 연대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 평소 잊고 살았던 가장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지난 성 요셉 대축일에 배포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동시에 시련을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13).
오늘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시어 앞을 보게 하시는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오늘 이 시대 역시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만사 제쳐두고 실로암 연못으로 달려가야 할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수많은 교우들로 붐빌 텅빈 성전,
평소 같으면 수많은 아이들로 요란스러웠을 텅빈 교정, 텅빈 수련원 경당에 앉아, 늦었지만 절실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습니다.
평소 별 생각 없이 대하던 교우 한분 한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송이 꽃이었다는 것을.
아이들 한명 한명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눈만 뜨면, 만날 때 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축복인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교회의 가장 기본 세포요 조직인 교우들이 사라진 본당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은 그저 황량한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태가 진정되고 정상화되는 어느 날, 한분 한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답답하고 제한적인 삶을 시작한지 꽤 많은 날들이 지났습니다.
짧다고 하면 짧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날들, 우리는 그간 단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초유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흘러넘치도록 풍성했던 날들,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다 할 수 있었던 날들을 돌아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함몰되어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내 삶 안에 하느님의 영역, 신앙의 영역, 영적인 영역은 한없이 초라하게 위축되고, 인간의 영역, 세상의 영역은 괴물처럼 확장되었음을 성찰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기, 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그간 놓치며 살아왔던 일상의 지극히 작은 것들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4주일>
(2023. 3. 19.)(요한 9,1-41)
<참으로 눈이 먼 사람>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이 대화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 3,17-19).”
예수님은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고, 동시에 내가 비참하고 가련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나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관심도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곳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곳, 또는 ‘아버지의 집’이 아닌 곳으로 가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고, 그것은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살면서, 자기 인생에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종교는 불쌍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이고, 신앙인들은 무기력하게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려고 하는 가련한 인간들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이미 기쁨 속에서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라도 ‘사별’의 슬픔과 아픔을 겪게 되면 자신이 착각 속에 빠져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또는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임종을 앞두고 인생의 허무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기가 누렸던 것들을 모두 버려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 또 그동안 자기가 행복과 기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허무하고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을 때, 누구나 비참해지고 불쌍해집니다.
바로 그럴 때에 하느님과 심판과 내세를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때라도 믿고 회개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에 참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끝끝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위해서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습니다.
39절의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앞의 3장 17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나 뜻을 생각하면, 두 말씀은 서로 보충하는 말씀입니다.
3장 17절에 있는 ‘심판’이라는 말은, ‘구원’의 반대말, 즉 ‘멸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9장 39절에 있는 ‘심판’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심판’을 뜻하는 말, 즉 의인들은 구원하고 악인들은 처벌하기 위해서 재판하는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라는 말씀은, “겸손하게 회개하는 이들은 구원하고” 라는 뜻입니다.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죄가 없다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겠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지금처럼 ‘우리는 죄가 없다.’ 라고 계속 우기면, 너희는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정말로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정말로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 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죄의식이나 죄책감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아마도 지옥에는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을 것이고, 하느님의 심판이 부당하다면서 분노하는 사람들만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는 ‘영혼의 건강 진단’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병도 없다. 나는 건강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건강 진단 자체를 거부하는 병자는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죄인데도 죄가 아닌 것으로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또 죄를 짓고서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것 자체도 죄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스스로 확신한다고 해서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진짜 의인들(성인 성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하고 보속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