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정녕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말씀을 마음으로 귀담아듣지 않기 때문이다(복음).
‘이청득심’(以廳得心)이라는 고사 성어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나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듣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조종하려는 태도 때문에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감적 경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자리에 서서 그 마음을 헤아리며 듣는 것을 말합니다.
공감하는 마음 없이 들을 때에는 상대방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소리나 모습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자랑을 하며 온갖 너스레를 떤다고 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듣는 사람에게는 금방 잘난 체하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나 공감적 경청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한 겹 깊은 곳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외로운 마음’이 들립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그 사람의 순수한 세계를 들을 수 있고,
마침내는 그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내면을 깊이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귀담아들어라.” 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분 마음 깊은 곳을 듣지 못하니 진리의 말씀이 들릴 리 없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을 들어주고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며 나눌 때 천국이 열립니다.
주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도
깊이 듣는 연습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그들은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9,45)
우리가
주님의 축복은
애타게 바라면서도
주님의 십자가에 관하여서는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행여, 나에게만은
비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살고 있다면
주님의 부활과
주님의 수난에 관한
신비는
우리에게 영영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리.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