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과감하게! 3월의 그날, 현장은 살아 있다
2025년 3월 서울학교는 <3·1운동의 역사 현장>
“3·1정신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있다면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이 있을 뿐이지. 해를 낳고 달을 낳고, 천체를 낳고, 꽃을 웃게 하고, 새를 울게 하며, 사람으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정신이 3·1운동을 일으켰지. 민중의 산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민중의 가슴 속에 본래 언제나 있는 정신이 터져 화산처럼 불길을 뿜은 것이다.”
(독립운동가, 종교인, 인권운동가, 시인, 언론인, 역사가, 교육자였던 함석헌 선생(1901-1989)의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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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을 여는 3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9강(제7기 제5강)은 기미년 3·1운동이 은밀히 준비되어 비폭력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나아가서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된 서울의 역사적인 현장을 찾아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신축을 빌미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천도교중앙대교당Ⓒ천도교중앙총부
서울학교 제109강은 2025년 3월 9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모입니다(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북쪽(진행) 방향으로 100m/시내버스 109, 151, 162, 171, 172, 272번 타고 안국역(인사동) 앞에서 하차).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재판소-손병희집터-현상윤집터-중앙고등학교(3·1만세운동기념비/숙직실)-김성수서울주택-만해당(유심사터)-대각사-탑골공원-이종일집터-천도교중앙대교당-승동교회-태화관터-기독교회관-종루-보성사터(이종일동상)-한성오집터-딜쿠샤-서대문형무소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함께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합니다.
▲3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1만세운동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3·1운동은 이전까지의 여러 민족운동의 흐름이 하나로 합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보아 동학농민혁명운동, 천도교 민족운동의 흐름과 갑신정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애국계몽운동 등 개화파 민족운동의 흐름과 위정척사파의 의병운동 흐름도 합류한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대연합 전선을 형성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민족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민중들은 혁명의식이 고취되었고, 때맞춰 발생한 ‘조선왕조의 멸망’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주창이 ‘민족자주독립국가’에 대한 민중들의 간절한 열망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송진우, 현상윤 등과 최린이 국내 만세운동을 최초로 모의했던 중앙학교 숙직실Ⓒ서울학교
상해 신한청년당이 기미년 만세운동의 싹을 틔웠습니다.
1918년 8월 20일 상해에서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용은, 한진교 등 청년독립운동가들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차에 때마침 미국이 특사 크레인을 중국에 파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평화회담에 대하여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내용은 “전후의 식민지 처리는 피압박민족의 의사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존중하여 처리한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신한청년당은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의사를 발표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에도 적용할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습니다.
1918년 11월 28일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의 이름으로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크레인에게 의뢰하였고 김규식을 신한청년단 대표 겸 한국민족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였으며 선우혁은 국내로, 장덕수와 조용은은 일본으로,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로 떠나보내며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일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재미동포는 1918년 12월 1일 ‘재미한인 전체대표자회의’를 열고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3인을 한국대표로 보내기로 결의하였으나 미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뒤이어 재일본 조선유학생 학우회도 ‘조선독립청년단’을 구성하여 1919년 <2·8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의 움직임은 기독교청년회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에 알려졌으며,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고무되어 있던 차에, 건강했던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중병에 걸려 그 이튿날 붕어했다는 일본당국의 발표에 대하여 ‘일제의 고종 독살설’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3.1만세운동이 일어날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국내 만세운동은 최초로 중앙학교가 숙직실에서 모의 되었습니다.
중앙학교는 1919년 1월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찾아온 이후부터 3·1운동을 모의하는 책원본부(策源本部)가 되었습니다.
교실 앞 운동장 동남쪽에 자리한 중앙학교 숙직실(당시 교장 사택으로 활용)에서 설립자 인촌 김성수, 교장 고하 송진우, 교사인 기당 현상윤이 함께 생활하며 민족의 미래를 설계했으며 또 외부에서 찾아온 지사들은 학생들이 바깥에서 일본 밀정의 미행을 감시하는 동안, 중앙학교팀들과 함께 은밀하고도 활발히 독립운동을 논의했던 곳입니다.
인촌과 고하는 인근 김사용의 집(계동 130번지)에서 끼니를 해결했으며 자연스럽게 인촌의 서울 거처 또한 식사를 빙자한 독립운동 회합장소가 됐습니다. 해외 유학파들과 국내 지사들은 서울에 오면 으레 중앙학교와 인촌의 거처를 방문하곤 했는데 미국에서 활동 중인 중앙학교 출신 여운홍(여운형의 동생)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독립청원 백만인 서명’을 받아오라는 밀명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뒤 곧장 찾은 곳도 인촌의 거처였습니다. 이처럼 북촌은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국내와 해외를 연결하는 거점이 됐습니다.
현상윤은 먼저 송계백과 함께 <2·8독립선언서>(초안)를 가지고 천도교의 최린을 찾아갔습니다. 천도교 산하 교육기관인 보성학교 교장 최린은 현상윤과 송계백의 보성학교 시절 스승이기도 합니다. 최린은 송계백이 가져온 <2·8독립선언서>를 보고는 바로 천도교 수장 손병희에게 즉각 보고했습니다. 손병희는 일찌감치 이종일이 이끄는 천도구국단 등에 의한 정보망과 단결된 조직력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 선언서를 접하고서는 국내외 세력과 연대를 통해 민족적 거사를 벌이기로 최종 결심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최린과 손병희 또한 모두 중앙학교가 있는 북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최린은 재동 68번지(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손병희는 가회동 170번지(현재 북촌박물관 자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이 운영하던 유심사(계동 43번지) 또한 북촌에 둥지를 틀고 있어서 이래저래 조선조 이래 양반 집권층이 모여 살던 북촌은 3·1독립운동의 최전선 기지가 되었습니다.
송진우와 현상윤은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 이전부터 최남선을 끌어들여 독립운동을 함께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으나 최남선은 “나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오” 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송진우가 때마침 중앙학교를 찾아온 최남선에게 <2·8독립선언서>를 보여주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이광수가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국내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는 자신이 직접 작성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일본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 그리고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열국 위원들에게 보내는 서한까지 도맡아 집필하였습니다.
중앙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최남선이 경영하던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고전적 간행 일을 맡고 있었던 임규가 <3·1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등을 일본어로 주석, 번역한 후 일본에 건너가 일본 내각과 중의원, 귀족원 등에 우편으로 통고하였습니다.
최남선이 2월 상순경에 완성한 <독립선언서> 초안은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있던 조소앙에게도 전달됐는데 중앙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교사 나경석이 <3·1독립선언서> 초안을 비밀리에 휴대하고서 길림까지 들고 갔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친오빠이기도 한 나경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28일에는 인쇄된 <독립선언서> 1,000부를 만주의 손정도 목사에게 전달한 후 현지에서 총기 10정을 매입하여 귀국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