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관할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한 후 1910년 2월 14일 뤼순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사형 당한다.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당하기 직전까지 안중근은 두 권의 책을 집필한다. 옥중에서. 하나는 1910년 3월 18일경 자서전 『안응칠 역사』이고 또 하나는 미완의 유고집인 「동양 평화론」이다.
「동양 평화론」의 원본은 현재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단 일본인에 의한 한문 필사본(1979년)이 남아 있어 이것을 토대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동양 평화론」에서 안중근은 본인이 왜 이토를 저격했는지 국제 정세와 일본의 야욕을 적나라하게 실체를 밝혀냈다. 러일 전쟁의 당위성에 대해 일본 천황은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독립을 명분으로 내세웠다고 말한다.
"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 일본 천황 선전포고 조서 中
청과 조선이 러일 전쟁 시 일본을 응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토는 러일 전쟁 승리 뒤에 만주를 비롯하여 조선까지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동양 평화론」은 청, 조선, 일본 세 나라가 서구 세력에 맞서 동양 평화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중립지대를 만들어 함께 쓸 공용화폐를 상용화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유럽경제공동체 EU를 연상케 한다. 100년 전의 생각이라고 하니 안중근은 앞선 간 선각자임에 틀림이 없다. 아쉬운 것은 일본의 강경파의 여론 때문에 안중근의 사형은 조기 집행된다. 만약 조금이나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동양 평화론」의 완성본이 탄생될 수 있었다.
안중근의 사상과 주장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자료 중에 하나가 「청취서」다. 「청취서」는 안중근 의사가 1910년 2월 17일에 히라이시 뤼순고등법원장과의 면담 내용을 서시가 기록한 내용이다. 「청취서」에서도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를 저격한 이유는 개인의 자격이 아닌 대한민국 독립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였으며, 동양 평화를 위해하는 이토의 욕심을 없애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본이 해야 할 급선무로 재정 정리라고 주장한다.
"재정 정리란, 귀순에 동양평화회를 조직해 회원을 모집하고 각 회원에게 1엔을 회비로 징수하는 것이다. 일본, 청, 한국 국민 수억이 이에 가입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은행을 설립해 각 나라가 공유하는 화폐를 발행하면 반드시 신용을 얻게 되니 금융은 자연스럽게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일본의 금융은 비로소 원만해지고 재정도 완전해 질 것이다" 「청취서」 中
옥중에서 갑자기 생각해 낸 이론이라고 보기에는 세밀한 전략을 제시한다. 그만큼 오래 전부터 동북아시아 정세를 적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론적 배경이 튼튼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4개 국어로 번역된 것을 모아 놓은 책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읽어봐야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12월 21일 개봉된 <영웅>을 관람한 뒤 읽어보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