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정조임금이 당시 전통문학에서 벗어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하여 문책한 문체순정(文體醇正.후대에서는 文體反正이라고 불렀음) 또는 비변문체(丕變文體) 문제를 남공철이 박지원에게 전하고,박지원이 남공철에게 답한 편지이다. 出處: 연암집2권 [答南直閣書]/고전번역원 역문.
● 남공철이 박지원에게
서울에는 한 자가 넘게 눈이 내려 가죽옷을 껴입지 않고는 외출을 못할 지경인데, 남쪽 소식은 어떤지 몰라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요즘 정사(政事)에 수고로운 몸 안녕하신지요? 영남(嶺南)은 가뭄의 피해가 이루 다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귀하의 고을은 세금 독촉이며 기민 구제 사업으로 정신이 괴롭지나 않으신지 이것저것 삼가 염려되옵니다. 기하생(記下生.남공철 자신)은 어지러운 진세(塵世)와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 예전의 저 그대로입니다.
지난번에 문체(文體)가 명(明)ㆍ청(淸)을 배웠다 하여 임금님(정조)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치교(穉敎.심상규)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함추(緘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내각(內閣)으로부터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내각에서 북청 부사(北靑府使)로 부임하는 성사집(成士執.성대중)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대개 그는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낙서(洛瑞.이서구) 영공(令公)과 여러 검서(檢書)가 다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성사(盛事)요 난파(鑾坡.규장각)의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
어제 경연(經筵)에서 천신(賤臣.남공철)에게 하교하시기를,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하시고, 천신에게 이런 뜻으로 집사(執事.박지원을 말함)에게 편지를 쓰도록 명령하시면서,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음직)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하시며, 이로써 곧 편지를 보내라는 일로 하교하셨습니다.
이런 임금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줄 상상되오나, 다만 이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은 진실로 졸지에 지어 내기는 어려울 터이니,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성상의 고심과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나마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집사는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도리상 더욱이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나, 그 제목을 정하기가 딱하게도 쉽지 않으니, 명ㆍ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한두 권 글을 지어서 올려 보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남(嶺南) 산수기(山水記) 한두 권이나 혹은 서너 권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막론하고 두어 달 안에 올려 보내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보낸 것은 이 때문이며, 이만 줄입니다.
● 박지원이 남공철에게
금년(1793) 정월 16일에 형이 지난 섣달 28일 띄운 서한을 받고서 비로소 형이 내각(內閣. 규장각)에 재직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바삐 서한을 펴 보고 또한 평안히 계심을 알았소이다. 그런데 반도 못 읽어서 혼비백산하여 두 손으로 서한을 떠받들고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렸소.
대개 사신(私信)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받든 것이라,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두렵더니 뒤따라 눈물이 마구 쏟아졌소. 진실로 위대한 천지는 만물을 기르지 않음이 없고, 광명한 일월은 미물이라도 비추지 않음이 없음을 알게 되었소. 그러나 글방의 버려진 책(熱河日記를 말함)이 위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대궐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이곳은 천 리나 동떨어진 하읍(下邑)이지만 임금의 위엄은 지척(咫尺)이나 다름이 없고, 이 몸은 제멋대로 구는 일개 천신(賤臣)이건만 임금의 말씀은 측근의 신하를 대할 때나 차이가 없으며, 엄한 스승으로서 임하시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가르치시어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킨 죄로 처형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편의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속죄하도록 명하셨으니, 서캐나 이 같은 미천한 신하가 어이하여 군부(君父)께 이런 은애(恩愛)를 입는단 말이오.
아! 명색이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몸소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교화를 펴는 시대를 만나고도,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이 화목하고 평온한 음향을 발하고, 《서경(書經)》ㆍ《시경(詩經)》과 같은 저작을 본받아 임금의 정책(政策)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선비의 수치입니다. 더구나 나 같은 자는 중년(中年) 이래로 불우하게 지내다 보니 자중하지 아니하고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때때로 곤궁한 시름과 따분한 심정을 드러냈으니 모두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요, 스스로 배우와 같이 굴면서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으니 진실로 이미 천박하고 누추하였소이다.
게다가 본성마저 게으르고 산만해서 수습하고 단속할 줄 몰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로(畵蘆.표주박을 그림)ㆍ조충(雕蟲.벌레모양을 새김) 따위의 잔재주가 이미 자신을 그르치고 또한 남까지 그르쳤으며, 부부(覆瓿.항아리 덮개)ㆍ호롱(糊籠.종이로 농을 바름)에나 알맞은 글로 하여금 혹은 잘못된 내용이 전파됨에 따라 더욱 잘못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차츰차츰 패관소품(稗官小品.패관소설과 소품산문)으로 빠져 든 것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위항(委巷)에서 흠모를 받게 된 것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문풍(文風)이 이로 말미암아 진작되지 못하고 선비의 풍습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퇴폐하여진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교화를 해치는 재앙스러운 백성이요 문단의 폐물이라, 현명한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에 형벌을 면함만도 다행이라 하겠지요.
제 자신은 웅대하고 전중한 문체를 거역하면서 후생들이 고문(古文)의 법도를 계승하려 하지 않음을 탄식하고, 벌레 울고 새 지저귀는 소리나 좋아하면서 ‘옛사람들은 듣지도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이로 말하자면 나나 그대나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 하겠소. 지금에 와서는 도깨비가 요술을 못 부리고 상곡(桑穀)의 재앙이 저절로 소멸되게 되었으니, 그 본심을 따져 보건대 비록 잔재주에 놀아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는 진실로 무슨 심보였던가요?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단단히 기억을 해야겠소.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용서하시니 임금의 덕화(德化)에 함께 포용되었음을 확실히 알았으며,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청아(菁莪)에 거의 자포자기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나나 그대나 죽도록 같이 힘쓸 바요. 어찌 감히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뒤늦게나마 만회할 것을 급히 도모하여 다시는 성세(聖世)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