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도에 영성집회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집사님 부부가 있는데 부인 집사가 내 아내에게 뼈있는 한마디를 해주었다. "사모님이 목사님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셔야 겠습니다. 목사님이 사모님 때문에 꿈을 접는 일이 많다고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 말은 나에게 정말이지 가장 아픈 곳을 긁어주는 시원한 한마디였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다행히 화를 내지는 않았고, 알겠습니다라고 반응해 주었다. 그렇다고 변한 것은 없다.
결혼은 정말이지 중요하다. 지금와 회상해보니 친구 누님을 통해 첫번 맞선이 들어온 자매가 가장 적합한 배필감이었다는 생각이다. 당시 나이도 아직 준비가 안된 이른시기 였지만 무엇보다 결단을 못한 것은 자매의 신체조건 때문이다. 나와 동갑내기 였는데, 소아마비로 지체장애자 였다. 그렇다고 목발을 짚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받아들여 지지를 않았다. 장고를 거듭했지만 결국 "지금은 결혼할 때가 아니라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거절을 하였다.
만일 그 때 결혼했더라면 이성문제로 갈등을 겪거나 시험에 들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27세때 출석하던 교회에서 한눈에 반할만한 자매를 만나 4년을 교제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변을 통해 온갖 상처만을 경험해야 했다. 시골교회에서의 목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떠밀리듯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현재의 아내를 선택한 근거는 첫째로 당시의 복잡한 마음의 갈등을 잠시나마 잊게해주는 푸근한 인상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매로 밀어부치는 당시의 노회장 목사님의 추진력 앞에서 더이상 버텨야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나의 기대와는 많이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심리학자가 열등감이라고 표현하는 심리적 현상은 영적으로는 마귀의 조정이라 표현함이 더 정확하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상대에 대하여 곡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마귀가 바로 이점을 이용하게 된다. 가급적이면 마귀에게 이용당할 기미를 제공함은 현명하지 못하다.
공자가 주장하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적극성은 인간의 연약함을 가장 잘 파악한 대책이다. 그럼에도 남녀가 함께 활동을 하다보면 본의아닌 탈선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인간이 스스로 마귀에게 음란한 악령이 활동하도록 근거를 제공하는 행위이다.
비혼을 고집하는 아들의 선택에 대하여 간여하지 않는 이유도 결혼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지대함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창세기에서 말하는 돕는배필-에젤의 역할을 다하는 배우자가 있는가하면 단순히 구색을 갖추어주는 배우자로만 한정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후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제와 지난날의 실수를 깨닫고 인정하다 하여도 그것을 번복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타인에게 조언을 해줄수는 있다는 것이 그나마 소득일 것이다.
배우자를 위한 간절한 기도는 과연 가능할까에 대해 이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야말로 열심히 기도를 했던 시기도 있다. 문제는 아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는 현실이 때로는 힘을 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나마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면 어떤 문제이든 해결되지 않을 과제가 없다는 논리에서 희망을 찾게 된다.
하지만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산다는 것은 그 어떤 쓰디쓴 약보다 더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