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세기 전반 할리우드 영화의 전성기를 누리던 사람들 가운데 프랭크 카프라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그의 영화들은 유머와 재치, 달콤한 사랑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사회의식과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정의감, 인간미를 깊이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긴 세월 속에서도 영화의 고전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 의 대표작이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이라는 영화입니다. 70년이 다 되어 가는 영화이지만 감동의 힘은 여전합니다. 영화의 대단원이 크리스마스에 이루어지고 수호천사가 등장하기도 해서 성탄절에 보고 싶은 영화로 꼽히며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 이 영화는 '올바른 인생의 가치'라는 보편적이고 절실한 주제를 다룹니다. 유쾌하고 정의로우며 따뜻한 가장인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가업을 이어받아 최선을 다해 일하는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 반면, 전쟁과 공황의 어려운 시기를 이용해 수많은 사람의 집과 가게와 회사를 삼켜 엄청난 부를 축적한 포터가 그와 대립합니다. 그는 탐욕과 지배욕으로 가득 찬 자입니다.
영 화에는 멋진 대사들이 많이 나오면서 올바른 인생길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왜 그렇게 포터가 조지 베일리를 괴롭히며 파멸시키려고 애쓰는지에 대한 조지의 삼촌의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부를 늘리려고 주인공의 회사를 합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움의 이유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주인공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실행하려는 항구한 마음입니다.
오 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벌거벗은 미움을 똑똑히 대하게 됩니다. 선과 아름다움, 거룩함 앞에서 미움으로 응대하는 자세, 그것이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역시 그러한 악의 세력에 희롱당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미움을 이겨 내는 것은 오직 선에 대한 사랑과 실천으로 가능합니다.
어제 제가 운영하는 ‘새벽을 열며’ 카페에 들어가 사람들이 쓴 글을 보다가, 어떤 분의 글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카페에 처음 와서 첫인사를 남긴 글이었는데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우연히 커피숍에서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을 보고 카페를 찾아 가입합니다. 책이 절판이라 사지 못해 아쉽지만 카페를 발견해 기쁩니다~^^ 지금 교리반을 시작했습니다. 매일이 행복입니다~!”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이라는 책은 저의 첫 번째 책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출판사 사장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냥 정신없이 출판했던 책이지요. 그러다보니 내용이나 구성 모두가 부족했고 이 책의 표지만 보면 얼굴이 화끈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책장에는 이 책이 없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셨고 이 책으로 인해 제 카페를 찾아오셨고, 또 교리반도 시작하셨다니요.
부 족함을 가지고도 하나의 완전한 일을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많은 부족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또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편안히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여전히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면서 불평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첫 등장에서부터 우리들이 생각할 말이 있습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이 상하지 않습니까?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것은 과연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일은 밭 임자가 할 일이 아니라, 소작인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작인들에게 맡긴 일은 별 것 아닙니다. 단지 그곳에 있는 것들을 돌보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포도밭에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요.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음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해 은혜를 저버리는 악을 행합니다.
바 로 우리의 모습과 비슷함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받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불평불만을 던지면서 끊임없이 주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불의한 소작인이 아닌, 주인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면서 충실히 자신에게 맡긴 일을 행하는 의로운 소작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포도밭에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부의 격차보다 무서운 건 꿈의 격차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라 할지라도, 그것을 꿈꾸고 상상하는 순간 이미 거기에 다가가 있는 셈이다(이지성).
하지만 대신 그리고(샘 혼,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에서)
최 고의 인간관계는 반대 의견을 가진 두 사람이 적이 되지 않고 어울릴 수 있는지의 여부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그리고’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즉각 ‘내 생각이 네 생각보다 옳아. 넌 틀렸어.’라는 마음이 전달된다.
“독 신일 땐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갈 자유가 있지요.” “그래요. 하지만 그런 자유는 곧 싫증나는 법이에요.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게 얼마나 좋은데요.” “하지만 결혼은 구속이에요. 각종 청구서며 집안 살림이며 일이 끝이 없죠.”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하지만’을 자주 쓴다. 상대의 주장을 거부하고 자기 의견만 내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진전 없는 말싸움만 한다. 그렇다면 ‘하지만’ 대신 ‘그리고’를 쓰면 어떨까.
“맞아요. 결혼 생활이 늘 좋다고 할 수 없죠. 그리고 세상에서 나를 최고라 생각하는 아이를 가진다는 것도 멋지네요.”
이 처럼 상대의 오류를 찾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말 한마디로 상대를 존중할 수 있다. ‘그리고’라는 말은 긍정적, 부정적 소식을 모두 이끌 수 있다. “문서를 훌륭하게 잘 만들었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나 더 넣으면 어떨까?” 혹은 “이 일을 처리하는 데 15분이면 충분하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초과해 죄송합니다.” 등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누군가와의 견해 차이로 고민 중인가?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하지만’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라. ‘하지만’은 갈등을 깊게 하고, ‘그리고’는 갈등을 예방한다.
좋 은 내용이라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글을 보며 어떤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부정으로 만들어 버리는 ‘하지만’이라는 단어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계속될 수 있는 ‘그리고’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인란...
-김대열신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마태오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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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내어주실 때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잘 그려져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바람도 무너지고 맙니다.
나는 이 소작인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편치가 않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는 없다며 부정을 하다가도,
우리가 걸어온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행되고 있는 가슴 아픈 일들을 볼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현실에 아픈 마음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람들에게 사람은 선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지,
아니면 악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지 갈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따를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생각해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악을 허락하셨냐는 질문을 자주 듣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이길 수 있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냐는 환경도 조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으로 지으셨으니,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으로 지으셨다면서 인형이나 로봇을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마저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
그 자유의지를 잘못 이해한 것은 인간들이었고, 그 결과 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맙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대속(代贖)의 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겠지요, 우리 인간이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어내신 인간들.
그러기에 사랑이어야 하는 인간들.
하지만 배신의 역사를 쓴 인간들.
당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셔야 했던 하느님.
그 마음을 감히 헤아려봅니다.
알면서도 번번이 죄에 주저앉고 마는 우리의 나약함.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보속의 마음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파하실 마음 때문에 힘들어 해야 합니다.
악과 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을 통해서 작은 예수가 되려는 자기 싸움이 있다면,
그분께서 함께 하실 것이고,
그 어떤 악과 죄도 힘을 잃고 말 것이라는 진실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숱한 죄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제 자리에 돌아올 것을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그분의 간절한 마음에 응답하는 삶이기를 희망합니다.
< "사랑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
-전삼용신부-
송정림씨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란 자신의 수필집에서, ‘사랑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소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사랑엔 ‘표현’이 반드시 필요한데, 왜냐하면 표현 없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씁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만큼 듣기 좋은 고백이 있을까요? 신발은 신고 있기만 하면 신발의 역할을 못하죠. 신고 걸아가 줘야 신발 노릇을 합니다. 자전거 역시 마찬가지예요. 타고만 있으면 가지 않습니다. 꼭 페달을 밟아야 나아가죠. 가람개비도 들고 뛰어가야 바람개비이고, 비눗방울 놀이도 불어 줘야 방울이 맺히고, 풍선도 불어야 부풀어집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겠지요. 마음에 품고만 있으면 상대의 마음에 가서 닿지 못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바람 부는 세상에서 털옷처럼 따뜻하고, 피곤한 몸을 감싸는 하얀 홑이불처럼 부드럽습니다. 그 말이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강풀의 만화를 영화화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소개합니다.
이 영화엔 젊은 사람들의 사랑과 연세가 든 이들이 말하는 사랑이 대조됩니다. 이 영화에는 네 명의 노인이 나옵니다. 성격이 까칠하고 입담이 거친 우유 배달부 김만석 할아버지는 새벽 배달 길에 파지 줍는 할머니 송씨와 마주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우유 한 통을 건네기도 하고, 송씨 할머니가 비탈길을 내려 갈 때는 어느 새 나타나 리어카를 잡아주고, 비탈길을 올라갈 때는 또 어느 새 나타나 리어카를 밀어줍니다.
이웃집에는 장군봉 할아버지 내외가 살고 있습니다. 장군봉 할아버지는 작은 주차장의 관리인이며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그는 아내가 길을 잃을 것이 두려워 대문을 밖에서 잠그고 다닙니다. 치매에 걸렸지만 아이처럼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내 순이, 그런 그녀 곁에서 평생을 한결같이 함께해 온 군봉, 두 사람은 상대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자식들은 명절 때 찾아와, “자주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며 바쁘게 떠나지만, 그 ‘자주’가 언제 일지 이 노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내를 보살펴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장군봉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아내가 위암 말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치매 걸림 위암 말기 환자 아내를 혼자 저 하늘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안 좋은 말이 들리지 않도록 연탄가스 중독으로 위장하고 아내와 함께 마지막 길을 동행합니다. 장군봉 할아버지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움직이며 아내의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주며 말합니다.
“당신 만나서 참 오래 같이 살았다. 나는 새로 태어나도 당신인데, 당신은?”
그러나 할머니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미안한 얼굴로 말합니다.
“당신은 주고, 나는 받기만 했는데 내가 어떻게....”
군봉 할아버지는 순이 할머니에게 말합니다.
“잘 자래이. 나는 겁쟁이라서 당신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그러니께 내 손 꼭 잡그래이. 알겄재? 우리 또 만나재이.”
순이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길을 함께 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길을 애틋하게 동행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마지막 길을 차마 볼 수 없는 사랑도 있습니다. 송이뿐 할머니는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 김만석 할아버지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 떠나겠어요. 얼마 안 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겠지요. 그걸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저 세상으로 보낼 수 있겠어요? 처음 만난 이 행복, 고향에 돌아가서 간직하고 그렇게 늙어 가고 싶어요.”
송이뿐 할머니를 고향에 데려다 준 김만석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안고 슬퍼합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또 볼 수 있을까?”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서 상대를 그리워합니다. 결국 김만석 할아버지는 얼마 안 가 죽음을 맞습니다. 죽음 직전에 꿈속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준 장갑을 끼고 오토바이로 할머니를 태워줍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준 머리핀을 꽂고 할아버지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서 신나가 들판을 달려갑니다.
강풀은 우리에게도 참 사랑의 의미를 묻습니다. 참 사랑은 가슴 아픕니다. 함께 죽음을 맞는 것도 가슴 아프고, 헤어져서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도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이 가슴 아픔이 있어야만 참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이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십자가 위해서 피와 물을 쏟으시며 이것 없이 어떻게 사랑을 말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바닥 위에 놓인 성체를 볼 때마다 우리는 과연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될 지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포도원을 만들어 주고 떠나셨습니다. 당신이 해 줄 것은 다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작은 사랑의 ‘표현’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러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로만 그들을 깨우쳐 줄 수 없기에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주시는 사랑까지 보여주셨지만, 소작인들은 그분을 죽이는 것으로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것 없이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두가 내 것이고 그것 밖에 주지 않은 하느님에 대해 원망하며 내가 가진 것을 아주 조금도 하느님께 바쳐드리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내 안에서 사랑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사랑이 없는 사람도 결국 죽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참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스스로 표현할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 사랑은 죽게 됩니다. 사랑한다면 표현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표현이 곧 ‘도조’, 즉 하느님께 받은 것을 도로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성찬례 전에 반드시 봉헌이 있듯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리는 길은 그분이 나에게 주시기 위한 가슴 아픔에 나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며 내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무도 겁내지 않아
-반 영억신부-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 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 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 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 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꿈
.-이수철신부-
하늘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반복아닌 것도 없습니다.
제가 썼던 강론 들 언젠가 했던 내용들입니다.
같은 내용도 새롭게 깨달아 하면 또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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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면 어느 음식이든 맛이 있듯이
영혼이 배고픈 건강한 이에겐 어느 말씀도 새롭고 맛이 있습니다.
영혼이 배고픈 건강한 이가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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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꿈에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나이에 상관 없이 언제나 싱그러운 청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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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중의 꿈이 하느님 꿈입니다.
늘 하느님 꿈을 꾸는 이가, 지닌 이가 건강한 영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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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꿈 있어 초연하고 겸손한 깨어 있는 영혼들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끝기도 시,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주님만을 뵙게 하소서.'노래 한 후 잠자리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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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꿈을 꾸다보면 꿈 중에도 강론 내용이 생각나 잠 깨어 강론을 쓸때도 있고,
또 꿈 중에 완성한 강론에 흐뭇해 하다가 꿈 깨어 씌어지지 않는 강론에 허탈해 한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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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하느님 꿈을 지닌 자들이 깨어있는 자들입니다.
하느님 꿈이 자기를 초월하여 자유로운 영적고공비행을 가능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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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독서의 소주제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다'이고, 그 앞절들의 소주제는 '요셉의 꿈'입니다.
꿈 자랑하다 형제들의 질투로 급기야 이집트로 팔려가게 된 요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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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꿈에 대한 강론을 착안한 다음 구절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Here comes that master dreamer!창세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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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대가(master dreamer)'라는 영어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진정 하느님 꿈의 대가인 요셉임은 차후 전개되는 역사를 봐도 분명히 들어납니다.
하느님의 원대한 꿈이 '꿈의 사람' 요셉을 통해 실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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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이 시인이자 신비가 였고 하느님의 꿈쟁이 였습니다.
아니 진정 하느님을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꿈쟁이요 역시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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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하느님 꿈이 실현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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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도 '하느님 꿈의 사람'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악도들은 상속자로 상징되는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를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님을 통한 당신의 꿈, 하늘나라를 실현시킵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늘나라를, 하느님을 꿈꾸며 사셨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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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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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하느님 꿈의 실현임을 깨달아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꿈꾸고 하느님은 우리를 꿈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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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 땅위에 당신의 꿈을 실현시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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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나의 예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기현신부-
전에 있던 본당에서는 공동으로 하는 농사들이 있었습니다. 고구마도 있었고, 벼농사도 있었는데요. 새로 온 본당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농사를 계속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공부와 실습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책들을 사서 보고 있는 중입니다. 서점에 가면 귀농총서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요. 그 중에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여러 권 사다가 틈나는 대로 보고 있습니다. 생소한 것들이 많아서 금방 읽히지도 않고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도 많지만, 일단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 내용들을 조금이라도 실습해보고자 땅을 구했습니다. 제가 구한 건 아니고 신자들을 통해서 얻었는데요. 대략 800~900평 정도 얻었습니다. 많죠? ‘너무 많이 구한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어떤 목표량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될 거 같습니다.
지금 대략 계획은 조금 먼 밭에는 손이 덜 가는 만차량이라는 호박이랑 고구마를 심을 예정이고요. 사제관 뒤에 있는 밭에는 당장 먹을 수 있는 작물들을 다양하게 심어보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거기다 감자와 부추, 그리고 양파를 심었고, 다른 것도 구하는 대로 심을 예정입니다. 성당 옆에 있는 밭에는 콩, 깨, 마, 옥수수, 수수 같은 것들을 심을 예정이고요. 하우스 밭에는 고추를 심어보려고 합니다. 약을 안 주고 해 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농부학교라는 데를 다니고 있습니다. 2월에서 4월까지 진행되는 학교인데요. 서울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입니다. 선배 신부님이 ‘실제로 농사짓는 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너도 한 번 가봐라..’ 하셔서 가게 되었는데요. 멀어서 가기 힘들긴 하지만, 강의 내용도 괜찮고 농사짓기를 원하는 분들과 조금 유대도 만들어 갈 수 있어서 좋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실제로 자연농법이나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분들을 소개 받아서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제가 지난 3년 동안은 농약도 치고 화학비료도 주는 농사만 봐 왔는데요. 그렇지 않은 방법으로 농사짓는 분들을 방문하여 조금 흉내를 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농사를 배우고 있는데요. 문득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우정일기’ 라는 책을 보면서 아주 잠깐 노동사제가 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요. 신학교에서 일년 이년 살아가면서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분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농사를 배우러 다니고 농사를 짓는 제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그 바람을 이루어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더라고요. 제가 예상한 방식은 아니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주셨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요셉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요셉은 하느님이 보여주신 꿈을 통해 가족들이 자신을 섬기리라는 메시지를 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그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화답송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켜, 양식을 모두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린 요셉이라네.
예상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요셉은 이집트로 가게 되었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상과는 다른 형태와 과정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나의 바람과 그분의 일이 예상대로 되어가시나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떠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보면, 언젠가 나의 예상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바람과 그분이 보여주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60대 며느리는 싱겁게 먹고,
90대인 어머니는 짜게 먹는다.
그래서 음식을 대부분 짜게 하시는 거 같은데,
한 번은 며느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거 같다.
“엄니, 나도 오래 좀 살게 싱겁게 좀 먹읍시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