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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8월.
오랜만에 중국에 다시 갔다.
중화권 방문은 지금까지 총11 번 째였다(마카오, 홍콩, 대만 포함)
중국 대륙엔 엄청난 규모의 호수가 있다.
둥팅호(洞庭湖)였다.
호수라기 보다는 차라리 바다라 불릴 정도로 광대했다.
그 호수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湖北省(후베이성), 남으로는 湖南省(후난성)이 자리했다.
이번에 간 곳은 후난성이었다.
성 하나에 남북한 전체 면적과 비슷하고, 인구는 약 6500만명, 차라리 하나의 국가라 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었다.
일조량과 강수량이 많고, 四季가 분명하여 예로부터 농업이 성했으며 온갖 물자와 산물이 풍족했던 축복의 땅이었다.
省都, 챵샤(長沙)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따라 400여킬로를 달렸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우리의 목적지, 신선들의 땅인 장자제(長家界)였다.
편도 7킬로미터,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를 타고 천문산 山頂에 올랐다.
말이 필요 없었다.
동서남북, 사발팔방 어디를 둘러봐도 기가막힌 풍경과 독특한 지세가 영험하고 출중했다.
한 번 벌어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만이 연방 흘렀다.
"와, 와, 와...세상에나"
정말로 그랬다.
천지신명이 이 세상에 허락하신 딱 하나의 무릉도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라 생각했다.
신선들이 모여 사는 지고한 上界가 내 눈앞에서 웅장하고 장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또한 서양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희구했던 꿈 속의 샹그릴라, 그곳도 바로 여기일 터였다.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명 영화감독, 제임스 케메론.
그이도 長家界와 遠家界에서 이 천하비경들을 보고 충격적인 감동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그의 최고 히트작, 아바타를 창작해 내지는 못했으리라.
경험하지 못한 건 공감하기 어렵고, 공감하지 못한 건 감동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바타의 놀라운 흥행과 공전의 성공, 그 숙주같은 밑바탕과 전제도 바로 장자제였다.
그곳의 영감과 모티브가 아니었다면 아바타의 시나리오는 애시당초 멋스럽고 탄탄하게 구성되지 못했을 게다.
그저그런 CG 픽션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천문산, 천문동, 천자산을 관광하는 수많은 인파들.
그들의 입에서도 역시 똑같은 감탄사들이 술술술 흘러내렸다.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영국인이든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 신이시여..."
그랬다.
단 이 한마디 뿐, 어떤 수식어나 문장으로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오히려 나의 비루하고 편협한 필설은, 적어도 그곳을 떠날 때까지는 조용히 가슴판에 묻어두고 싶었다.
솔직히 그랬다.
'묻어두고 싶었다'가 아니라 그 거대한 웅자앞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환상적인 스케일과 기묘함.
어느 누구라도 절대 진공같은 그 놀라움과 감흥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넋과 혼이 줄줄 빠져나갔다.
대자연과 조우하자마자 순간적으로 가슴을 적시며 뇌리를 강타하는 두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압도와 경외'란 낱말이었다.
장자제의 빼어난 산세와 독특한 지경은 수많은 탐방객들에게 그런 감동과 위엄을 침묵 속 사자후로 뜨겁게 웅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중국의 詩仙, 李白의 詩 한 대목이 생각났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복사꽃 흐르는 물이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에 있는 듯, 인간세계가 아니로구나."
내 가슴 속으로 이백의 뜨거운 훈염과 가슴 벅찬 울림이 여과없이 이입되고 있었다.
싯구 그대로 그곳은 과연 別天地였다.
1.400미터가 넘는 아찔한 수직절벽.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오금이 저려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쳐다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듯한, 그렇게 깍아지른 암벽 봉우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줄지어 서서, 탐방객을 위해 힘찬 열병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중원의 드넓은 대지를 향한 힘찬 포효였다.
그런 천길 만길 낭떠러지 위에 사람들이 보행할 수 있도록 작은 길을 낼 수 있을까?
백이면 백, 단박에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게 상식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세상의 상식과 상사를 여러번 뒤집고 비틀었다.
정말로 중국이란 나라는 접하면 접할수록 되레 더 무지해 지고 헷갈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민족이었다.
천 미터가 넘는 수직 고봉들의 그 살떨리는 단애에 직각으로 파일을 박고, 그 파일 위에 좁은 상판을 얹어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까마득한 공중 절벽 보행길을 무려 2.5킬로나 만들어 놓았다.
마치 인간들의 솜씨가 아닌 듯했다.
위대한 대자연에 연방 감동했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중국인들의 공력과 치성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천문산 鬼谷棧道였다.
발 아래 천 사백 미터, 이따금씩 밀려드는 운해 사이로 그 끄트머리가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로 오금이 저리고 손에 땀이 나는, 백척간두 위의 작은 보행길 - 그것이 棧道다.
걷기만 해도 완전 모골이 송연했다.
어떤 이는 식은땀을 흘렸고, 일부는 심장이 벌렁거려 그 길을 가지도 못했다.
형형색색, 기기묘묘, 최상의 자연미, 그리고 인간들의 지극한 공력에 대한 극한의 경악과 감탄이 쉼없이 교차했다.
신이 정성스레 빚어서 大陸에 선물하신 이 천혜의 웅대한 자연풍광.
이 절대 황홀경을 보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한 해에 5천만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하니 그저 놀랍고 또한 부러웠다.
눈봉사가 만진 코끼리 다리 하나.
그것이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다.
맞는 말이다.
대륙은 모든 것이 광막하고 거대했다.
지금까지 열 번 이상을 방문했고, 뜨겁게 부대끼며 그 땅 고유의 느낌들과 감동의 편린들을 부지런히 퍼담아 보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여전히 중국을 잘 모르겠다.
너무 크고, 많고, 다양하며, 복잡해 나같은 이방인으로선 좀처럼 그 드넓은 中原의 품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역시나 대륙은 '廣大無邊'이었다.
말 그대로, 無邊이라 더더욱 알 수 없는 나라였다.
호텔에서 하루일정을 끝내고 휴식을 취할 때에도,
챵샤에서 6시간을 달려오고, 다시 그 시간만큼을 되돌아가는 버스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의 긴 여정 동안에도,
나는 천하를 군웅할거했던 춘추전국시대 영웅호걸들의 치열했던 삶과 역사를 떠올렸다.
또한 동 시대, 백가쟁명의 불꽃튀는 사상과 그들의 예술혼을 하나하나 복기하듯 반추했다.
내가 서있는 바로 이 땅이, 본디 호걸들의 활동무대라 그랬던 것일까?
적어도 중국에서 만큼은 습관적으로 춘추전국시대와 백가쟁명의 치열했던 논쟁과 쟁투들이
자연스럽게 내 뇌리를 휩쓸었다.
자동적인 사유였다.
후난성에 도착해서부터 챵샤공항을 이륙할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머릿속 원고지에 글을 썼고, 가슴속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댔다.
까마득한 과거, 그 영웅들의 질팍한 삶과 불꽃같은 생애가 자연스럽게 현재화되고 있었다.
다양한 스토리텔링들이 꿈틀대며 파노라마처럼 살아 움직였고,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선명한 스크린의 영상들처럼, 한편의 대하드리마가 내 가슴속에서 조심스럽게 각색되고 탈고되기 시작했다.
천하를 통일했던 진나라에 뒤를 이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했던 한나라.
그 중심엔 '유방'이있었다.
한나라의 치세는 그 후 400년간 이어졌다.
달도 차면 기울 듯, 한나라도 종국엔 부패와 무능으로 쇠락했다.
사회는 혼란으로 빠져들었고 민중들의 삶은 팍팍했다.
특히 가렴주구가 횡행했다.
관료들의 가렴주구는 백성들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난세엔 필시 惑世誣民하는 세력들이 생겨나는 법.
그들이 바로 '태평도'라 불리는 사이비 종교집단, 바로 '황건적'이었다.
황건적의 난은 이내 평정되었지만, 다시 권력 중심부에선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말세의 전형이었다.
끝내 조정은 '동탁'의 손에 넘어갔다.
동탁은 실권을 거머쥐자마자 새로운 황제를 옹립했고, 폐위한 황제를 곧바로 독살하는 등, 제멋대로 전횡을 일삼았다.
예서제서 동탁에 등을 돌리는 세력들이 급증했다.
저항파들은 급속히 세를 규합해 나갔다.
그 중심축엔 亂世의 영웅, 조조가 있었다.
조조의 강력한 주창으로 반 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동탁은 위기를 직감했다.
그러나 정작 양쪽은 단 한 번 싸워보지도 못했다.
동탁이 낙양을 버린 채 대소신료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떠나면서 그간의 수도였던 낙양을 모두 불질러 버렸다.
최악의 비행이었다.
이에 분노한 조조는 혼자서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동탁과 대적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조조가 무릎을 꿇자 반 동탁세력들의 제후들도 각기 자신의 영지로 뿔뿔이 흩어졌고, 후일을 기약했다.
그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를 호령했던 동탁도 믿었던 자신의 심복 '여포'에게 죽임을 당했다.
본디 權力이란 이처럼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다.
그래도 인간들은 권력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1800년 전의 後漢時代나 작금의 韓國政治나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동탁에게 참패했던 조조는 절치부심했다.
하루하루 와신상담하면서 차근차근 전열을 재정비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여러 분쟁들을 순차적으로 평정하며 河北地域의 강력한 실세로 성장해 나갔다.
당시 하북 일대의 좌장은 단연 '원소'였다.
수장이었던 원소와 실세로 급성장한 조조.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는 없었다.
피할 수 없는 패권다툼의 기운이 양 진영 사이에서 모락모락 싹트고 있었다.
양자의 명운을 갈랐던 싸움은 '관도전투'였다.
그 혹독한 쟁투에서 조조는 2만의 군사로 10만의 원소 군대를 섬멸하는 개가를 거뒀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조조의 대승이었다.
하늘이 조조를 낙점한 것이었다.
그렇게 歷史의 물꼬는 조조에게 새 시대의 물길을 허락했다.
이로써 대륙의 북부는 모두가 조조의 천하로 재편됐다.
魏의 초석이었다.
한편, '손책'은 상대적으로 분쟁과 파열음이 적었던 江東 일대에서 무서운 속도로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河北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화에 잠겨있을 때, 상대적으로 피를 적게 흘리면서도 각 영지를 하나 하나 치밀하게 접수해 나갔다.
착실하게 기반을 다진 셈이다.
급기야 강동지역 전반을 손아귀에 넣었고, 제국의 기틀을 세웠다.
吳의 태동이었다.
삼국의 또다른 주인공 劉備는, 하북과 강동에 비해 출사가 늦은 편이었다.
유비는 공손찬, 조조, 여포, 원소 등, 근 20년 이상을 여러 장수에 의탁한 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았다.
하지만 그에겐 과거 자신의 위대했던 조국, 한나라를 再建시키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 숭고한 뜻에 힘을 합쳤던 세 사람.
그들은 복숭아 밭에서, 자신들의 생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했다.
각오는 뜨거웠다.
秋霜같은 결의였다.
굳건한 신의로써 의형제를 맺었으며, 훗날의 대업을 다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유비', '관우', '장비'의 기념비적인 桃園結義다.
후발 주자인 현덕에겐 거사를 위해 다양한 인재들이 필요했다.
당연한 이치였다.
그 인재영입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최고의 책사, '제갈량'이었다.
그를 얻기 위해 3번씩이나 찾아가 예의와 진정으로 설득했다.
유비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한 태도로 제갈량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것이 바로 '三顧草廬'다.
공명의 합류는 유비에겐 천군만마, 그 이상이었다.
까마득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사람'이었다.
유비군도 하나 둘씩 체계가 잡혀갔다.
마침내 세상에 현덕의 출사를 알리는 위대한 서막이 그렇게 올라가고 있었다.
당시 형주땅의 주인인 '유표'였다.
유비는 아직 힘이 미약했다.
그래서 유표의 휘하로 들어가 작은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지만, 도원결의 형제들에겐 뜨거운 大望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북, 강동, 형주에서 앞으로 몇십 년 간 대륙을 할거하며, 직접 자신의 손으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용광로같은 야망들이 그렇게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손아귀에 거머쥔 뒤 천하통일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영웅호걸들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야심의 첫번째 책략은 노른자 중의 노른자땅인 형주를 치는 것이었다.
형주는 여러모로 최고의 요충지였다.
형주의 통치자, 유표가 죽자 뒤를 이은 '유장'은 심약했다.
조조의 대군이 침공하자 단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형주땅에 함께 있었던 유비는, 아직 조조를 대적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일단 퇴각할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강하로 철군하며, 책사 공명을 강동으로 급파했다.
함께 힘을 합쳐 조조군과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다.
손권도 이내 화답했다.
강동도 하북의 급성장과 승천하는 기세를 경계하고 있던 참이었다.
즉각 출병했다.
손권, 유비의 연합군은 조조의 100만 대군과 적벽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교전했다.
하늘도 연합군을 도왔다.
때마침 남동풍이 불었다.
그 바람을 등에 업고 맹렬하게 '火攻戰'을 펼쳤다.
작전은 주효했다.
조조군은 괴멸했고, 연합군은 극적으로 승리했다.
이 赤壁大戰의 승리는 하늘이 유비에게 내린 서막같은 축복이었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주력부대는 손권의 군대였다.
동쪽의 오와 북쪽의 위가 용호상박하는 사이, 어부지리를 취한 건 바로 현덕이었다.
양 진영이 치열하게 싸우는 사이, 유비는 형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빛나는 계책이자, 영특한 작전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그 달콤한 승리의 열매는 모두 유비가 취한 꼴이었다.
전쟁만 치르고 별반 소득이 없었던 손권은 형주땅을 되돌려달라고 유비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때 지혜로운 공명이 해결사로 나섰다.
자신들이 서쪽의 익주를 쳐서 복속시킬 때까지 잠시만 더 형주에 머물게 해달라고 역제안을 했고, 끝내 합의를 끌어 냈다.
역시 공명다운 담판이다.
공명은 여러면서서 판세를 잘 읽었고, 대화와 지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형주땅에서 왕조의 기틀을 다진 유비는 형주를 아우인 관우에게 맡기고, 계속 서쪽으로 진격했다.
치열한 전투끝에 드디어 익주도 함락, 서쪽지역 대부분을 차죽지세로 평정했다.
역시 유비군의 과감성과 예리함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는 長江처럼 유장하게 살아서 펄떡거렸다.
그렇게 가장 늦게 蜀이 등장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魏, 吳, 蜀의 삼두체제가 구축되었다.
삼국은 저마다의 대의를 주창했고 대망의 실현을 위해 진중하게 골몰했다.
광대한 중원에서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天下統一 이란 대업을 향해 멈출 수 없는 질주를 시작했다.
적토마를 타고 눈썹 휘날리도록 달려가서 대륙 한가운데에 웅혼한 기상으로 펄럭이는, 자신의 깃발을 꽂고자 각축했다.
죽음을 불사하는 용맹, 가슴 뜨거운 신의, 상대의 허를 찌르는 놀라운 지략들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광활한 강토는 노심초사하며 절치부심하는 호걸들의 말발굽 소리에 그렇게 서서히 잠겨들고 있었다.
유사 이래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역사는 끊임없이 돌고 돌았다.
영원한 우군도 없고, 영원한 적군도 없었다.
유비가 서촉을 복속하고 제국의 토대를 형성한 뒤에도, 여전히 형주땅을 돌려주지 않자 손권은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강동의 吳는 다시 하북의 魏와 손을 잡았다.
과거 적벽대전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물리고 물어뜯었던 사이.
그랬던 견원지간이 오늘은 화친을 맺었다.
그때로부터 거의 2천 년이 흘렀건만 2014년, 현재의 국제정세와 외교전쟁도 옛날과 똑같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벗이 내일의 원수가 되는 참 비열한 세상.
자국의 이익과 정권의 안위만이 유일한 신앙일 뿐이었다.
여전히 횡행하는 건, 배반의 눈동자와 성동격서하는 권모술수였다.
吳는 魏에 제안했다.
연합군으로 형주를 치자고.
승리하여 그 땅을 차지하면 양분하자고.
조조에게 촉의 급성장은 눈엣가시였다.
그 매력적인 친서에 위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양쪽에서 거병했다.
적들의 출병소식에 蜀의 진영은 다급해졌다.
판세를 읽고 분석한 유비는, 동생 관우에게 명령했다.
읹아서 기다리지 말고 위나라를 先攻하라고.
관우도 위의 정벌에 나섰다.
관우는 개전 초기에 각 전장에서 승승장구했다.
대적할 군대가 없었다.
조조도 촉의 밀물같은 공세와 아군의 連戰連敗에 몹시도 두려움을 느꼈다.
공포의 그림자가 魏의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런 전황 중에 吳가 촉에 씻을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육손'은 蜀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와 형주 일대를 순식간에 접수했다.
형주의 수장이었던 관우는 허를 찔렸다.
속수무책이었다.
關羽는 전장에서 회군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한 시대를 멋지게 풍미했던 걸출한 장수, 관우.
지금도 중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있는 용맹무쌍한 장군, 關羽.
그는 끝내 육손의 군사에 의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밤하늘에서 찬란하고 밝게 빛나던 큰 별.
그 별은 애통하게도 하나의 별똥별이 되어 광막한 광야 저 멀리,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믿었던 동생, 의지하고 있던 아우, 관우가 죽자 맏형 유비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냉철한 복수를 다짐했다.
공명을 비롯해 휘하 장수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吳와의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형제들의 굳건했던 도원결의.
적어도 그들에겐, 전장에서의 처참한 죽음이나 승패를 점치는 판세분석 이전의, 그들만의 뜨거움과 간절함 그리고 애끓는 눈물, 그 이상의 무었이었다.
호탕하고 불같은 성격의 막내 장비도, 맏형 현덕의 지시를 받아 吳와의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휘하 장수들에게 매질을 가했고, 혹독한 군율로 다스렸다.
저돌적이며 호랑이같은 성격이었다.
부하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관우와 장비는 여러 면에서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다.
한때 촉한을 호령하며 적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불꽃같은 용장, 張飛.
그는 吳와의 전투를 목전에 두고 부하의 칼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황망한 죽음이었다.
대업을 이루지도 못한 채, 그렇게 두 명의 장수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비에겐 雪上加霜이었다.
유비는 가슴으로 울었다.
丈夫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동생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진군의 나팔을 울렸다.
"지금 당장 죽는 한이 있어도, 동생들의 희생을 철저하게 앙갚음하리라"
蜀은 70만 대군을 이끌고 吳로 진격했다.
촉의 군사들은 요원의 불길처럼 밀어붙였고, 개전 초기에는 결전했던 전투마다 큰 승리를 쟁취했다.
관우의 원수들을 모조리 찾아내 무자비하게 척살했다.
가는 곳마다 도처에 선혈이 낭자했다.
도륙의 산하였다.
그러나 吳에는 '陸遜'이 있었다.
육손은 촉한의 명운을 갈랐던 '이릉전투'에서 오의 군사를 이끌었던 총사령관, 대도독이었다.
양 군사들은 진을 치고 오랫동안 서로 대치했다.
초계활동만 전개했지 싸움은 없었다.
서로의 계책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촉의 군사들이 들판에서 산속으로 진영을 이동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육손은 기습과 화공으로 무지막지한 타격을 가했다.
전광석화였다.
유비의 군사들을 궤멸됐다.
눈물겹도록 참담한 패전이었다.
땅을 치며 울분을 토로했지만 이미 종결된 싸움이었다.
'이릉전투'에서 대패한 유비는 쓸쓸하게 백제성으로 피신했다.
유비는 그곳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가장 신임하는 단 한 사람, 공명을 불렀다.
제갈공명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大業에 대한 대망을 내려놓은 채,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삼고초려 후 16년간 군신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극진하게 챙겼던 현덕과 공명.
역시 대장부들의 호연지기와 신의는 남달랐다.
말할 수 없이 애틋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순결했다.
유비의 顧命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반드시 위를 쳐서 한나라 제국의 영광과 명예를 재건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들 '유선'의 후사를 보위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비가 죽자 공명은 顧命大臣으로서의 역할과 도리에 최선을 다했다.
주군의 유언을 託孤한 신하, 그는 죽는 날까지 그 고명을 받드는데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주군의 生과 死에 관계 없이, 그는 자신이 모션던 主君의 충직한 신하임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주군이 죽자 공명은 '유선'을 황제에 옹립했다.
그리고 서둘러 吳와 동맹을 회복했다.
주군의 고명인, '魏의 정벌'을 위해 강동과의 화친은 시급했고 긴요했다.
또한 남만의 왕 '맹획'을 7번 잡았다가 7번 놓아주며, 마음으로부터 그의 항복을 받아내 복속시키는 등,
北伐을 위한 계획과 준비를 차근차근 실행해 나갔다.
사람이 기동할 수 없는 협곡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와 물자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천리길 잔도도 만들었다.
그 길이 지금도 명승지로 소문난 石門棧道다.
그러나 치밀한 준비와 작전으로 6차례나 북벌을 시도했지만 모두 큰 성과가 없었고, 무위로 끝났다.
유비의 고명도, 공명의 비장했던 맹세도, 그렇게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미완의 恨으로 남았다.
그는 끝내 6차 북벌의 출정지였던 오장원에서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운명하기 전에 공명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했다.
그가 바로 강직한 蜀의 장수 '강유'였다.
강유는 꺼져가는 조국의 횃불을 다시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 '유선'은 이미 酒池肉林 속에 빠져 헤매고 있었다.
제국의 망조였다.
슬픔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형국이었다.
허망하고 속절없는 정치와 권력.
유비가 세웠던 왕조는 그렇게 아들 대에 병들어 갔다.
촉한의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었고, 제국의 낙조는 더없이 스산했다.
'강유'는 이러한 국내정세 속에서도 공명보다 더 많은 아홉 번이나 北伐을 시도했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제국의 흥망성쇠와 그 징후의 면면들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蜀의 국운이 쇠락하고 있을 때, 魏도 심각한 정변에 휩싸여 있었다.
'사마의'가 봉기해 조씨 일파를 몰아내고 군권을 찬탈했다.
軍權은 곧 국가의 모든 권력을 의미있다.
삼국 중 가장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던 위나라.
그동안의 강력했던 '曺 氏 왕조'는 하루아침에 '司馬 氏 왕조'로 돌변했다.
사마의가 죽자, 대권은 '사마사'를 거쳐 '사마소'로 이어졌다.
魏의 국운도 여기까지 였다.
마지막 잎새 하나만을 남겨둔 가여린 사직이었다.
魏의 내부적인 정변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사마씨 일족'은 본격적으로 촉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위와 촉의 곙계엔 천혜의 요새 '검문관'이 있었다.
바람도 구름도 쉬이 넘을 수 없는 수직 절벽들과 고봉들 사이로 딱 한 곳,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가능한, 매우 좁다란 고갯길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劍門關이었다.
魏에서 蜀의 성도로 진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이곳에서 강유(蜀)의 2만 군사는 진을 치고 있었다.
종회(魏)의 10만 군사가 전의를 불태우며 촉을 치기 위해 진격했지만 허사였다.
참새의 목구멍 보다도 더 좁은 검문관을 통과할 재간이 없었다.
양국의 군사는 작전을 변경했다.
陣을 치고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위의 계책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강유와 종회가 검문관에서 기약없이 대치하는 사이, 위의 또 다른 장군, 등회가 나섰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다른 방향에서 협곡을 건너고, 절벽을 기어넘어 촉한을 공략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공격루트, 촉은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렸다.
이미 병세가 깊었던 蜀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이내 함락되었다.
촉은 유비와 유선, 2대 42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그렇게 사라졌다.
푸르렀고 웅혼했던 그들의 꿈과 기상은 등회장군에 의해 철저하게 뭉개졌다.
이때가 서기 263년이었다.
蜀이 멸망하자 魏는 환호했다.
국운은 하늘을 찔렀고, 사마씨 일파는 기세가 등등했다.
사마소의 뒤를 이은 사마염은, 아무런 실권 없이 명맥만 잇고 있던 魏 황제 '조환'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했다.
혹자는 '선양'받았다고 하나 겁박해 빼았은 것이 어찌 선양일 수 있을까?
麗末鮮初, 우리의 역사도 비슷했다.
이미 국운이 쇠락한 왕조, 고려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고려 34대 공양왕은 역성혁명의 기치를 내세운 '이성계 일파'에게 왕위에서 쫓겨났다.
1392년 7월이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삼척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필부보다도 못한 형편으로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어갔다.
이것이 정치요, 이것이 권력이었다.
촉을 멸한 위, 사마염은 위의 마지막 황제, 조환을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했다.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국호를 魏에서 晉으로 변경했다.
수도도 다시 낙양으로 옮겼다.
이로써 魏는 46년만에 그 명운을 다했고, 권력 내부로부터 스스로 자멸했다.
촉나라가 멸망한지 2년 후였다.
서기 265년의 일이었다.
蜀과 魏가 사라진 뒤에도 吳는 15년을 더 유지했다.
삼국 중 가장 길게 제국을 보위했다.
吳의 마지막 왕, '손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제국의 영속을 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새롭게 역사의 패권을 거머쥔 떠오르는 태양, 진나라의 국운엔 미칠 수 없었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와 도도하게 흐르는 시대의 조류를 거꾸로 되돌릴 순 없는 법이었다.
그것이 역사의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吳의 태양도 언제부턴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진은 군사들을 출병시켰다.
마지막 남은 강동의 吳만 제거하면 꿈에도 그리던 대륙평정의 대업을 이루는 것이었다.
진장과 왕준이 나섰다.
吳의 최대 요충지, '석두성'을 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장이었다.
양국군의 기세와 전의는 초장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다.
끝내 석두성은 나가 떨어졌다.
吳의 4대 왕, 손호는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오나라 건국 52년째, 그때가 서기 280년이었다.
호걸들의 질박하고 치열했던, 그래서 더욱 웅장했던 스케일과 광대무변한 대하드라마가 내 가슴팍을 알싸하게 적셨다.
삼국지는 진나라에 의해 천하가 재통일되면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삼국지의 웅혼한 얼개와 치밀한 스토리가 과거 이천 년 간,
時代와 世代를 초월해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저들의 한결같은 信義와 의리 그리고 추상같은 절개 때문이었다.
대륙을 종횡무진 누볐던 장부들의 호쾌한 기개와 대의가, 아주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잔챙이들만이 준동하는 이 팍팍한 시대에 영롱한 별빛처럼 가슴 뜨끈하게, 다양한 독자들에게 정제된 가르침과 참신한 교훈을 주고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살았어도 형제요, 죽었어도 형제였다.
生死에 관계없이 君臣간의 진정어린 충성과 대쪽같은 신의를 목숨걸고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각근한 노력과 미더운 열망이 언제나 충일했던 대장부들.
대의와 소망을 위해 멸사봉공의 자세로 꼿꼿하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뜨거운 발자국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준용될 수 있는 최상의 덕목이자 훌륭한 인생 지침서가 아닐까 한다.
또한 꼭 필요한 인생의 중심 테마요, 삶의 핵심 요체가 아니겠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신의와 기개를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삼고 있는가?
아니면 이익과 기회를 중시하는가?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지는 가을이다.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함께 소중한 추억을 엮어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이런 고마운 벗들이 있어 삶이 더욱 다감했고 풋풋했음을 고백한다.
더 감사하고, 더 배려하며
어떤 비바람에도 신의와 소망을 소중하게 간직한 채 , 흔들림 없이 살고 싶다.
그리고 매일 이른 새벽, 낮은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면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