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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힘으로 일부일처제 지켜
국왕은 왕비를 여럿 두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일부일처를 지켰다. 고려의 혼인 제도가 일부일처제였다는 사실은 충렬왕 때 박유가 올린 상소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때는 바야흐로 몽골과 오랜 전쟁이 끝나고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고, 박유는 인구 감소를 걱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처를 한 명씩만 두고 아들이 없어도 첩을 두지 못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은 결혼에 제한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흘러 들어갈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대소 신료는 처를 여러 명 두게 하되, 품계에 따라 수를 줄여나가서 벼슬이 없는 사람에 이르면 처 한 명과 첩 한 명을 두게 하고, 여러 처가 낳은 아들도 적자와 마찬가지로 벼슬에 나갈 수 있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원망이 사라지고 인구도 증가할 것입니다.”(『고려사』 열전 박유)
전쟁으로 젊은 남자가 줄어 혼인하지 못하는 여자가 늘고, 게다가 몽골군과 강제로 결혼하는 일까지 벌어져 원망이 일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구도 줄어들고 있으니 일부다처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었다. 이 사료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처를 한 명씩만 두고 첩을 두지 못한다’고 한 대목이 고려의 일부일처제를 증명한다.
박유의 상소문이 올라가자 오히려 여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들끓었다. 어느 연등회 날 박유가 국왕을 모시고 시가에 나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알아보고는 “처를 여러 명 두게 하자고 청한 자가 바로 저 빌어먹을 노인네다”라고 소리쳤고, 그러자 사람들이 박유에게 손가락질을 해서 ‘저자에 붉은 손가락이 한 무더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럼 이 일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고려사』는 당시 재상 중에 부인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 이 논의를 그만두게 되었고,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일부다처제의 도입 시도는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급제해서 고관이 된 고려의 서얼들
고려시대에는 결혼한 부부가 부인 집에서 사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남자가 처가에 살면서 부인 말고 다른 처나 첩을 두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고려시대 사료에서 국왕 이외에 일부다처의 사례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간혹 부인이 둘 이상인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이 상처 후에 재혼한 것이다. 그러나 예외 없는 규칙이 없듯, 인간사에도 예외는 늘 존재했다. 아주 드물지만, 고려에도 첩을 둔 사람이 있었다. 이 사실은 서얼의 존재로부터 확인된다. 고려 후기에 김구(金坵)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자임이 밝혀져 있다. 또 최씨 정권의 제3대 집정인 최항이 최우의 얼자였고, 채하중·권중화·황희 등 제법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들도 얼자였다. 하지만 고려 일대에 걸쳐 서자나 얼자 모두 겨우 십수 명 정도가 찾아질 뿐으로, 첩을 두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드물었다.
고려시대에는 서얼이 드물기도 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도 없었다. 김구의 서자 김승인은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이 대사성까지 올랐다. 조선 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권한공의 얼자 권중화는 과거에 급제했고,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이색과 절친했는데, 이색의 글 어디에도 권중화를 얼자라고 흠잡거나 업신여긴 흔적이 없다. 유명한 황희도 얼자였지만 고려 말 과거에 당당히 급제했고, 이후 조선 세종 때까지 62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출신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이 없다. 조선 초까지도 고려의 분위기가 이어졌고, 그런 속에서 서얼도 차별받지 않았던 것이다. 차별이 시작된 것은 조선에 들어와서부터로, 남자들이 여러 번 결혼해서 동시에 여러 처를 두는 중혼(重婚)과 다처(多妻)가 빌미가 되었다.
고려 말 언젠가부터 슬며시 중혼·다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지방 출신 관리 가운데 고향에서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와 또 처를 들이는 사람이 많았는데, 고향에 두고 온 조강지처를 향처(鄕妻)라고 하고 서울에서 새로 들인 처를 경처(京妻)라고 불렀다. 이성계가 그랬다. 젊은 시절 함흥에서 결혼한 한씨 부인이 살아있는데도 서울에서 강씨와 또 결혼했다.
관리 사회에서 중혼이 유행처럼 번지자 처와 처 사이에, 또 소생 자녀들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조선 건국 후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 일에 적극적이던 태종은 1413년 3월 11일을 기준으로 그 전의 다처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하지만, 이후로 그런 일이 있으면 장(杖) 90에 처하고 강제 이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효과를 거두어 다처 현상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일부일처제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축첩, 국가와 남자들의 타협
법에 따라 여러 명의 처를 둘 수 없게 된 남자들이 이번에는 첩을 들이기 시작했다. 국가는 다처를 금지했을 뿐 축첩은 허용했다. 말하자면 축첩은 국가와 남자들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에 따라 첩이 늘어나고 서얼 자녀가 많이 태어났는데,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시작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적자를 보호하려는 목적과, 가정에서 정실부인의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차별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서얼의 문과 응시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또 어떻게든 관직에 오르더라도 승진할 수 있는 상한을 정하고, ‘청요직(淸要職)’이라고 해서 관리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에 서얼이 임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서얼은 무과나 잡과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고, 주로 무반직이나 기술직으로 진출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중인과 한 묶음이 되었다. 밖에서 차별받는 서얼에게 집도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았다. 집에서도 아버지에게 차별받고 홍길동 같은 신세가 되었다. 차별을 철폐해달라는 홍길동들의 아우성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쯤에서 서얼을 차별하는 법을 만든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그들에게는 서얼 자녀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의 축첩은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처보다 첩이 많았을 것이니, 적자녀보다 서얼 자녀가 더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 이들은 자신의 서얼 자녀에게 피해가 가는 법을 만든 셈인데, 자신이 적자라서 적자를 보호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신분 질서의 확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자기 자식들의 ‘사소한’ 피해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축첩으로 인해 태어난 아들·딸이 그 출생 때문에 평생 고통받는 것을 가슴 아파한 사람은 없었을까? 이런 의문을 뒤로하고, 서얼에 대한 차별이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역사적 산물임을 똑똑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