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깨어지고]
영훈과 서대문 네거리에서 헤어진 연숙은 아현동 집까지 쭈욱 울면서 걸었다.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려 앞을 가려 볼 도리가 없다.
꿈은 깨어졌지만 어쨌든 영훈을 만나 본 것만이 연숙에게는 다행이었다.
사람의 마음 하나 돌이키지 못할 법이 어디 있겠느냐고, 그 험준한 삼팔선을 넘으면서부터 생각해 오던 백연숙의 꿈은 결국에 있어서 한낱 허황한 공상이었음을 연숙은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마침내 나를 용서했다!』
그 하나의 사실 만으로도 연숙은 적지 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거지처럼 초라했던 감정을 무마하면서 아현동 중턱에 있는 열다섯 간 짜리 대문을 열고 연숙은 들어섰다.
『오셨어요.』
밥 짓는 계집애가 보루루 마주 나오면서 호명은 없이 연숙의 귀밑에다 속삭이었다. 연숙의 남편인 김석호가 왔다는 말이다.
『그래?』
연숙이가 안방으로 들어가보니, 김석호는 아랫목에다 연숙의 이부자리를 단정히 깔아 놓고 웃목에서 샤쓰 바람으로 술상과 마주 앉아 있었다.
삼십 칠팔 세의 유둘유둘한 장년이다. 벌거우리 취기가 돈 얼굴이 연숙을 바라보자 희쭉하고 웃었다.
『주인마님도 안 계시는 집에 무단히 드나들어서 미안하오.』
이처럼 농담조로 나오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사나이였다.
『미안한 줄 알면서 왜 드나드는거야요?』
뾰루퉁하니 대답 하나를 던지고 연숙은 이부자리와 술상 사이에 주저앉아서 날름 김석호를 흘겨보았다.
『마님의 술을 한잔 얻어 먹으러 왔소. 거 너무 박대는 마시오.』
그러다가 김석호는 빙그레 웃으며
『마님도 한잔 걸렸구려!』
했다.
그 말에 연숙은 다소 당황한 빛을 보이며 후딱 경대를 들여다보았다.
감정이 들떠 다소 무리를 했던 고뿌 술이 눈언저리를 발가우리 붉히고 있었다.
『마님의 얼굴 풍경이 그럴듯하오. 내가 다시 한번 반해 봐야겠소.』
김석호는 잔을 들어 연숙에게 권하면서
『자아, 내 술 한잔 드시오.』
『싫어요.』
연숙은 뺑하니 돌아앉았다.
『하아, 이거 큰일인걸! 어떤 놈팽이와 나누고 온 술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의 술이 필시 그만 못하다는 말인데……』
김석호의 두 눈이 정욕의 불길로 말미암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남편은……누구가 내 남편이라는 말이야요?』
감정이 담뿍담뿍 서린 대답이었다.
『허어, 백연숙의 남편은 필시 하나 밖에 없을 텐데, 또 다른 데두 한두 사람 있다는 말 같이 들리는구려.』
『당신을 남편이라고 부를 사람은 따로 있을 텐데, 왜 이러는 거야요?』
『아, 그런 문제 밖이래두!』
『왜 문제 밖이야요? 산월(山月)이가 당신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어서 빨리 가 보아요.』
『이거 봐요, 연숙이!』
김석호는 농치면서 무릎걸음으로 닥아왔다. 닥아와서 연숙의 손을 잡고 술잔을 쥐어주며 『한 잔만 먹어요. 내가 배워 준 술을 딴 사내와만 먹어서야 되겠소? 생각하면 벼락을 맞을 노릇이지.』
그러면서 연숙의 목을 껴안고 술을 억지로 먹여 주었다.
『놔요. 내, 내 손으로 먹을테니 놔요.』
놓기 전에 김석호는 연숙의 볼에다 입술을 꽉 갖다 댔다.
『글쎄 놔요! 놓면 먹겠다는데 왜 이래요?』
연숙은 탁 남편의 손을 뿌리치며
『자아, 여기다 부어 줘요.』
밥주발 뚜껑을 연숙은 상 위에 탁 벗겨 놓았다.
『허어, 이거 오늘 술맛 나게 됐는걸!』
석호는 될될 술을 부었다.
이 감정 저 감정이 한데 뭉킨 서글프고도 고단한 심정의 노예가 되어 연숙은 칠칠 넘는 주발 뚜껑을 약이라도 먹는 것처럼 눈을 딱 감고 벌컥벌컥 마셔 댔다.
『허어, 대단한걸!』
김석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연숙은 서글퍼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연숙이, 울기는 왜 또……가 이처럼 당신 품에 돌아오려는데……자아, 눈물을 씼고 웃어바요.』
연숙의 어깨를 한 손으로 껴안고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눈물을 김석호는 씻어 주었다.
연숙은 멍하니 앉아서 끝끝내 안아 주지 않고 사라져 간 영훈의 냉혹한 심정을 원망스럽게 들이켜 본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영훈의 성실한 인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성실이 연숙에게는 하나의 냉혹으로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당연한 노릇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연숙은 차차 질투의 감정이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 자기의 가슴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그처럼 골돌히 생각하는 거야?』
김석호는 또 연숙의 목덜미에다 입을 맞췄다.
『어서 돌아가요. 당신과 나는 이미 거리가 먼 사람들이야요.』
연숙은 쓸쓸히 말했다.
『내가 이처럼 연숙을 사랑하는데두……?』
『그건 사랑이 아닐거야요. 점심 한끼 굼 때듯이 어떻게 후딱 생각나니까 그러는 거지. 당신의 수중에 돈이 있는 한, 당신은 영원히 애욕의 방랑자야요.』
『무슨 말을…….』
『제 버릇 개는 못 줘요.』
『당신은 내 조강지처가 아니오?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곱게 모시리다. 당신의 마음만 돌아서 준다면 내 재산은 모조리 당신의 것이 될텐데…….』
『나 돈 필요 없어요. 당신의 돈 안 얻어 먹구, 나 굶어 죽는 편을 택할테야요.』
『무슨 그런 뾰족한 말만……그러지 않아도 나는 지금 이런 걸 생각하고 있소.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족히 해 나갈 사업이 하나 있는데……당신은 본래가 인테리요, 또 그 방면에 다소의 소질도 있고 해서……일한 무역만해도 나는 바쁜 몸이고 또 믿을만한 사람도 없고 또 나와의 관계는 어쨌든 간에 당신의 장래를 생각해서도 「신여인」사의 전책임자로서 당신이 한번 나서 볼 생각을 해 보면 어떻소?』
「신여인」사라면 고영훈의 직장이 아닌가! 그 순간까지도 예사로 들어 넘기고 있던 남편의 이야기에 갑작스럽게 관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