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14
1월25일[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연중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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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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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KaIf6hYOgY
[인천교구 정호철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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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정말이지 극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원래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으며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다교 측에서보면 전도양양한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주님께서 낚아채십니다. 그 과정도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란 도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집회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기탱천한 그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애마(愛馬)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말달리던 어느 순간 그는 갑작스런 몸의 이상증세를 느끼며 낙마(落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강골이었던 그는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체험과 동시에 두 눈이 멀어버리게 됩니다. 갑작스런 인생의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와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생일대의 전환점, 다시 말해서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 ‘바오로’라는 이름의 뜻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하층민들이나 종들이 애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크고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가에서나 사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풍당당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한 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스스로를 귀족, 잘 나가던 사람으로 여겼던 사울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티끌이요, 종이요, 작은 자, 무(無)였구나.” 하고 깨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의미의 바오로로 바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대충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스포츠에 무척이나 심취해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라면 답답해 미칠 정도로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코린토 1서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1코린 9,26-27)
그리고 어느 날 노인이 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7-8)
뿐만 아니라 회심한 이후에도 복음 선포자로서만이 아니라 천막을 만드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투잡’을 한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를 일컬어 학자들은 ‘백 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대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때 혈기왕성한 촉망받는 유대교 젊은이로서 율법을 준수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장 역할에 충실했던 그였습니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주님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마 이후 일련의 회심과 쇄신의 과정을 거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말을 갈아탑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이런 고백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시킬 것인가 한번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주로 어디에다 집중시키는지 반성해볼 일입니다.
혹시라도 언젠가 모두 썩어 없어질 유한한 육체에만 모두 투자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재미거리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삶을 주님의 뜻에 걸맞게 재구성하는 영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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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BMRBkXZQ0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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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난 게 아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다 하느님을 위한다는 자기 생각에서 나온 행위입니다. 당신을 위하는 바오로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나타나시어 바오로에게 당신을 섬기는 올바른 길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을 뵈온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여쭈어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이미 바오로가 어떤 일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왜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지 않고 누군가를 통하여 전하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당신이 그 사람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을 ‘교회’를 통해 알려지도록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직접 해야 할 일을 바오로에게 알려주셨다면 바오로에게 교회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필요 없게 하실 일은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니아스’라고 교회의 사람을 통하여 바오로가 세례를 받게 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교회로부터 파견받게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만나 직접 무언가를 하도록 파견받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사실 어둠의 세력에 속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번즈에게 52세 앨리슨이라는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성은 10년 넘도록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울증의 이유가 바로 남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회계사라서 숫자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오랫동안 우울하고 외로웠던 이유는 남편 버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그러면 부부가 함께 와서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습니다. 앨리슨은 이미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는데 무슨 그런 시간 낭비를 또 해야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의사가 딱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하자고 하니 다음번에는 남편을 데리고 왔습니다.
남편 버크는 그런데 아내 앨리슨이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의사는 앨리슨에게 남편에 대한 감정을 1분 동안 이야기하고 남편이 그 감정을 잘 알아들었는지 반복해서 말해보게 하였습니다. 앨리슨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기감정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에요. 온갖 노력을 다 해봤지만, 가슴을 꽉 닫고 있잖아요. 당신 같은 냉혈한 때문에 몇십 년 동안 외롭고 비참했고, 이제는 포기했어요. 내 우울증, 끔찍한 결혼생활, 모두 감정 장애인에 구제 불능인 당신 때문이에요.”
남편은 아내가 한 이 말을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면서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점수를 먹여보라고 했습니다. 앨리슨은 매우 놀라며 자신의 말을 100% 잘 알아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엔 역할을 바꾸어서 버트가 말하는 것을 앨리슨이 듣고 그 감정을 받아들여 되풀이해보라고 했습니다.
버트가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외롭고 답답했소. 나는 더 가까이 가고 싶었는데 나의 감정을 털어놓으면 비난과 무시부터 해서 점점 말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소. 나도 단단한 벽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는 것만 같았다고요. 당신이 왜 그렇게 말하는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면서도 여전히 당신의 핀잔이 두려웠소.”
앨리슨은 이 말을 듣다가 버티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일어나 손가락을 버크의 얼굴에 들이밀고는 이렇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무슨 낯짝으로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지껄이는 거야! 다 거짓말이야! 입 닥쳐! 멍청이.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다음번에 앨리슨은 혼자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남편은 바뀔 수 없어요.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요. 시간 낭비라고요. 앞으로 저만 혼자 오겠어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제 우울증이 저의 탓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 그날이 당신과 마지막 상담이 될 거예요. 남편과 똑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이미 제 치료사 세 명이 저에게 그런 암시를 해서 제가 잘라버렸어요. 조심해 주세요.” [참조: 『관계 수업』, 데이브드 번즈, 흐름 출판]
앨리슨은 의사를 찾아왔음에도 자기 생각으로 의사의 생각을 바꿔보려 했습니다. 자신을 지독히 믿는 사람은 조언을 해 주려는 의사의 생각까지도 바꾸려 합니다. 이 사람이 우울증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먼저 자기 생각을 접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해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전에는 지나친 자기 신뢰에서 오는 우울한 마음을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마음을 바꾸어주시는 분이 빛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바오로처럼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이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살아왔던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교회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게 됩니다.
신앙에서 회심은 ‘나로부터’ 돌아서서 ‘교회로 향하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나를 믿는 것에서 교회를 믿는 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자신을 믿다가 자신이 박해하던 교회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와 고해성사, 성체성사와 복음선포를 위한 파견도 믿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이 우선시된다면 그 사람은 아직 빛이신 분을 만나지 못한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대 자기 생각을 믿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불신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왔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일 수 있다고 믿어도 대부분 나 자신이나 악령의 목소리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으라는 말은 어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주일 미사 때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믿어서 교회와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리스도께서는 나로부터 떠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게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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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사제가 된 신부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신학생 때 교구장님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이 교구장님께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주교님, 신학교의 규칙을 완화하면 더 많은 신학생이 사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교님께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구장님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열 사람의 불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열 사람의 교만한 사제는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열 사람의 욕심 많은 사제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불성실과 교만 그리고 욕심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겸손한 사제는 공동체에 큰 위로를 줍니다. 한 사람의 청빈한 사제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그러자 신학생은 규칙을 잘 지키는 신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상품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정한 상품이 매출을 선도합니다.
사목자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완벽한 카리스마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목자입니다. 열정이 있고, 아는 것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목자입니다. 신자들은 그런 사목자를 만나면 뛰어난 선장을 만난 것처럼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그런 사목자와 함께하면 신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비전은 있지만 모든 것을 함께 상의하는 사목자입니다. 일의 진행이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며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과 함께하고 역할을 분담하기에 사제는 쉽게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습니다. 함께 하기에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에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의존형의 사목자입니다.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목자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지만, 성과도 얻기 힘이 듭니다. 좋은 협력자를 만나면 좋지만, 의견이 갈리면 공동체가 갈등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목자는 외로운 등대처럼 때론 고독과 고통을 감수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파수꾼은 홀로 깨어서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자신이 주도하려 하는 신앙인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의견을 잘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일의 성과를 먼저 생각합니다. 결단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지만 자칫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비전은 있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끝까지 청취하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분들이 레지오를 하면 단원이 늘어나고, 늘어나는 단원 때문에 프레시디움을 나누기도 합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싱싱한 것처럼 주변에 늘 사람이 함께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먼저 생각합니다.
셋째는 비판적인 신앙인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허물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편입니다. 본당 단합대회를 산으로 가자고 하면 바다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바다로 가자고 하면 산으로 가자고 하는 편입니다. 많은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된 것에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헌신은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과 재물에 대한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나태함과 교만을 끊어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 대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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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일치 주간’의 마지막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일치의 관점에서 묵상해 봅니다. 바오로(사울)는 율법에 대하여 철저히 교육받은 유다인으로서 당시 새로운 종교적 움직임으로 드러나고 있던 예수님 추종 세력을 박해하였습니다. 바오로는 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22,7)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바오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다마스쿠스로 들어가라고 이르십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독실한 유다인을 만납니다.
하나니아스는 처음에는 바오로와 만나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9,15)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바오로를 찾아가 말합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9,17) 하나니아스는 박해자 사울을 ‘형제’라 불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나 세례를 받은 바오로는 열렬한 복음 선포자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오로를 믿고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는 여전히 위험인물이었고, 유다인들의 눈에는 변절자요 배신자였습니다. 몇 년 뒤 바르나바가 고향 타르수스에 머물던 바오로를 찾아와 안티오키아로 데려가 함께 활동함으로써 바오로는 복음 선포자로 거듭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만남에 더하여 하나니아스와 바르나바의 신뢰와 환대로 박해자로서 지녔던 적개심을 모두 내려놓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화해의 사절’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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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18: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 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심을 알게 된다. 이때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회심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회심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이며, 박해자였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의 회심은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룬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을 지낸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 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며,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나 자신과 모두가 주님 안에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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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회개와 구원의 본보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5-18)
1) 바오로 사도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면,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예수님께서 박해자를 회개시키고 변화시켜서 사도이며 선교사로 삼으신 일입니다.
교회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라는 위대한 선교사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신 일입니다.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셨다는 말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지역을 떠나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일이고,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에서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의 ‘세계 종교’로 성장하기 시작한 일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우리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나니아스를 박해자 사울에게 보내실 때, 이방인 선교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또 바오로 사도는, 사도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선교 대상자를 구분해서 일하기로다른 사도들과 합의를 했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9-10)
<물론 그 합의는, 엄격하게 금을 그은 일은 아닙니다. 열두 사도도 나중에 이방인 지역에 가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고, 바오로 사도도 어떤 지역에 가서 선교활동을 할 때에 우선 먼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는 주로 이방인들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3)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박해자를 선택하셨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또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왜 그가 교회를 박해하기 전에 먼저 선택하시지 않고, 그가 박해자가 된 다음에, 또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한 뒤에 선택하셨을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류 구원 계획과 그 계획의 실현 과정을 모릅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믿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어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그 일이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 일이 모두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게 그래서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느님은 ‘모든 것’에서 ‘당신의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지금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면 엉망진창으로 보일 때도 있고, 선보다 악이 더 힘을 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인류 역사는 ‘하느님의 선의 완성’이라는 마지막 목적지를ㅍ향해서 나아가고 있고, 언젠가는 틀림없이 그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ㅠ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2-13)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뽑으셨다는 것은, 바오로 사도 자신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말은, 자신의 죄를 고백한 말입니다.
그는 ‘첫째가는 죄인’인 자신을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1티모 1,15-16) 바오로 사도는,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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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인물이지만, 회심한 뒤에 그가 보여 주었던 열정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 옮아갑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넘어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방뿐 아니라 유럽에도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가 남긴 많은 편지는 당시 교회의 상황을 보여 주며, 초대 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그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사명을 가장 잘 실천한 사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님의 활동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입니다.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열거된 기적들은 사도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실현된 적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마귀들을 쫓아내고(사도 8,7 참조),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2,4; 19,6 참조), 손으로 뱀을 잡거나(28,3-6 참조), 안수로써 병자를 고쳐 줍니다.(28,8 참조)
복음은 믿는 이들 모두 이와 같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의 선포와 활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징이 일어났던 것처럼, 표징은 지금도 교회의 선포와 활동을 통하여 지속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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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한 번의 들음이 바오로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필리피서는 바오로 안에서 어떤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는지 다음과 같이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3,7-9)
예수님을 얻고 싶은 마음, 예수님 안에 있고 싶은 마음, 바오로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진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참된 회심은 ‘들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 우리의 믿음은 영적인 힘을 되찾게 됩니다. 바오로에게 일어난 영적인 변화가 우리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얻으려는 열망, 예수님 안에 있으려는 열망과 함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10,17)라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은 들음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이 중단된 신앙생활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심’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기쁨도 사라져 버리게 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그 힘을 잃어 가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구원을 가져다주는 신앙생활이 짐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신앙생활은 “믿는 이들에게” 일어나게 될 영적인 표징들을(마르 16,17-18 참조) 체험하게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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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극적으로 회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열정적인 사도로 변화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그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그의 ‘이름’입니다. 사실 바오로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사울은 하느님께 ‘간구하다’, ‘청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청하는 이로써, 자신이 열심히 공부하던 율법을 하느님의 뜻과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겁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할 수만 있었기에 자연스레 유다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는데에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랬던 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주님의 등장에 어찌나 놀랐던지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하지요. 그는 직감으로 자신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신 예수님이 거룩하고 전능하신 참 하느님이심을 알아보았고, 그런 그분에 비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지, 그런 비천한 자신이 감히 주님을 박해하겠다고 나섰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주제넘은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바오로’로 바꿉니다. 로마식 이름인 바오로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상태가 되었기에, 자신의 약함을 기쁘게 자랑하면서 당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이 ‘박해자’에서 ‘사도’로 변화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환점은 내가 새로 바꾼 그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의미가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은 뒤에 갑자기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삼 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와 묵상을 통해 철저히 준비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리고 주님께서 길을 이끄시는대로 복음 선포의 여정을 계속해서 감으로써 진정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 삶의 전환점은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지만, 그것이 우리 신앙과 구원에 의미있는 사건이 되려면 주님께서 방향 지워주시고 이끌어주시는대로 한 발 한 발 꾸준히 나아가야 하지요. 그런데 그 길엔 두려움과 불확실성이라는 짙은 안개가 깔려있기에 한 걸음 내딛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를 이끄시는 주님 손을 믿음으로 꼭 붙잡고 그분과 함께 걷다보면 어느 새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변해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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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분의 사랑은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것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 어둠을 거쳐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으로 변화되어 바오로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러한 사랑에로의 부르심은 날마다 우리에게도 다가옵니다. 사랑할지 하지 않을지를 내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랑에 사로잡히며 사랑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가져 가시길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한 기자가 어느 성공한 CEO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사장님, 성공의 비결을 한 마디로 요약하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올바른 선택(Right Choice)”
“아~ 그렇군요. 그럼 올바른 선택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죠?”
“좋은 경험!!(Good Experience)”
“아~ 그렇군요. 그럼 좋은 경험은 어떻게 얻으셨죠?”
.....
“잘못된 선택!!!(Wrong Choice)”
자매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매 순간 “당신 사랑을 선택하며 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같은 상황에서 어떤 이는 화를 내고, 어떤 이는 받아들이고, 또 어떤 이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우리가 비록 약해서 잘못된 선택(Wrong Choice)을 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로부터 “잘못된 선택-좋은 경험-올바른 선택”의 예를 볼 수 있는 듯합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잘못된 선택을 하였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의 체험은 그의 전 존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그가 참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올바른 선택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업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사업가는 잘못된 선택을 하여 실패의 경험을 하였지만 그런 과정에서 좋은 경험을 하여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하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당신을 선택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나니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셨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사울을 회개시켜 당신을 증언하게 한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은총으로 회심하여 바오로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심정을 코린토 후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여기서 “다그친다”는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문은 συνέχω [soon-ekh'-o] 인데, 이는 영어의 urge에 해당하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충만해서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고,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도 사랑을 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충만히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오묘한 섭리와 그 만남으로 그는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그는 그 사랑을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나에게도 사도 바오로에게서 처럼 이런 은총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부러워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럼 나도 당장 회개할 텐데…’ 라고 생각하실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의 체험이 우리를 회심시켜 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는 그것은 암흑과 같은 두려움으로 다가 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바오로에게 찾아왔지만 사실 바오로가 한 번에 이를 알아보고 한 순간에 회개하였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을 뵙고도 깨닫지 못한 바오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멀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오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당신이 직접 가지 않고 당신의 사람을 보냅니다. 어둠을 체험한 바오로는 어쩌면 눈이 먼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어둠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전과는 달리 하나니아스의 말을 배척하지 않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어둠의 체험이 없었다면 아마 하나니아스의 말을 인간의 말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옛날 사도 바오로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그쳐 그를 변화하게 하였듯이 지금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뜨거워지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려 예수님과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분과의 사랑에 빠진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주님의 빛을 이미 받은 우리 모두는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에 따라 그분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하며 더 큰 사랑의 빛 안에서 주님의 피가 되고 주님의 사랑이 되어갑시다.
회개는 매일 매일 우리 영혼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아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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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퇴근할 때마다 자기 집을 찾지 못해서 애를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재일까요? 바보일까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천재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을 펼친 아인슈타인은 천재일까요? 바보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아인슈타인을 천재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죽음 이후 그의 뇌를 훔쳤던 병리학자(토마스 하비)가 있었습니다. 천재의 뇌는 어떻게 다른 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뇌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앞서 퇴근할 때 자기 집을 찾느라 애 먹었던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물리학에서는 천재였지만, 모든 부분에서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부분에서 천재였고, 가끔 천재였던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지 않을까요? 어떤 모임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천재입니다.
이런 천재성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천재’인 자기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별것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남과 비교하고, 부정적 생각으로 좌절에 빠지면서 자기의 천재성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 ‘가끔 천재’의 모습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동조했었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심과 함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기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의 출신, 학식, 기득권 등이 자기 천재성을 세상에 발휘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면서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지상의 지혜가 아닌 천상의 지혜,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면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천재성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천재성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오로 사도와 같은 깊은 회심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회심을 통해서만 주님의 일을 하는 진짜 천재성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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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회심의 길>
사도행전 22,3-16 (자신을 변호하다.)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마르코 16,15-1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회심의 길>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당신 없는
나의 길
아니요
나 없는
당신의 길
아니요
당신과 나
함께 걷는
우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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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심은 삶의 방향 전환이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주님을 증언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약하기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무엇이든 용서하십니다. 혹 바른길을 걷지 못하고 있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어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기존의 삶에서 돌아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회심은 방향 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히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눈에 성공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달려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찡그린 얼굴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얼마 전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특별교육을 반복해서 한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각성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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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사도행전 22.8)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함께 있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무엇을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있음이 행복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사는 동안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영원히 행복하리라는 희망을 가졌기에 내 인생을 모두 걸었습니다.
하지만 사는 동안 많은 중대한 선택을 당신보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였습니다. 나의 행복을 찾는 것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라고 여겼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당신을 만났고 나의 더 큰 행복을 위해 당신과 살게 되었습니다. 내 안의 당신은 나의 행복을 위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당신의 존재 이유는 오직 나를 위함이었기에, 당신에게 내가 필요함은 늦게 알았습니다. 나를 위해 당신은 늘 활동하셨지만, 당신의 일을 내가 해야 함은 잊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항상 희망을 주었지만, 나는 당신에게 실망을 더 많이 안겨주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산다고 말만 더 많이 했고, 나를 위해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간혹 내가 당신의 마음을 헤아린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당신이 내 마음을 헤아린 시간과 공간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많고 넓기만 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내가 당신을 선택했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당신이 나를 먼저 사랑하고 선택하셨음을 아직도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지난 날 상처들은 당신이 아니라 나의 한계 때문이었고, 그 아픔들은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드려는 당신의 뜻임을 조금씩 알고, 상처 안에 숨어있는 당신의 일을 조금이나마 끌어 안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며 자신의 행복만을 찾던 사도 바오로가 회심을 하여 이제는 주님을 찬양하며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박해보다 몇 배를 더 많이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시도 바오로가 인류에게 전한 복음의 기쁜 소식은 회심의 증거입니다. 그 회심의 은총이 오늘 저에게 주어지는 축제의 날이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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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여정>
-회심과 복음 선포-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 117,2ㄱㄴ)
오늘은 성 바오로 회심 축일이자 일치 주간의 마지막날입니다. 또 오늘은 제가 1986년 1월25일 첫서원 후, 서원 39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일치 주간은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교회 일치를 위한 지향으로 기도하는 주간으로 매년 1월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오늘 1월25일까지 8일 동안 거행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치운동의 흐름을 이어받아 1968년부터 한국기독교협의회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함께 일치기도주간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일치의 중심에 성 바오로 사도의 결정적 회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성 스테파노의 죽음시 순교상황을 그대로 목격했던 열렬한 박해자 사울이 결정적으로 회심하여 바오로로 전환된, 참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 획기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제 종파를 초월해 모든 갈린 그리스도교인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회심과 복음선포의 모범이, 일치의 중심이 성 바오로 사도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 없는 예수님의 그리스도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제1독서에서 사울의 회심 장면이 너무 극적이요 생생합니다. 해마다 읽고 묵상하는 내용이지만 그때마다 신선한 충격입니다. 사울의 결정적 회심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한없이 기다리고 인내하며 그 때를 기다렸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가 친히 전해주는 회심 장면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입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바오로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아마도 평생 예수님과의 첫 만남과 더불어 이 회심 체험은 평생 늘 바오로의 신앙을 새로이 했을 것이며 회심의 여정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박해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새삼 우리가 형제들을 박해하는 경우는 그대로 예수님을 박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로 사울이 회심했음을 알리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회심 직후 우리가 저절로 터져나오는 즉각적 질문입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답변입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
주님의 눈부신 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사울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갑니다. 하느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사울이요 즉시 하느님의 사람, 하나니아스에게 인계되니 그가 주님께 받아 전하는 충고도 감동적입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참으로 사울의 감동적 회심 장면은 언제 읽어도 늘 새로운 영감이 됩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결정적 회심에 이른 사울은 옛 사울이 아닙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새로난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은 사울을 당신 복음 선포의 증인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의 비상한 회심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사울이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울을 선택했듯이 우리 믿는 이들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우연한 나의 선택이 아닌 주님의 필연적 선택으로 세례와 더불어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의 복된 신원입니다. 사울에서 바오로가 된 것처럼 우리 각자도 새롭게 태어난 세례명도 지니게 된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탄생에 이은 영적탄생이요 복된 죽음은 천상탄생이 됩니다.
바오로의 극적인 회심 사건은 우리의 회심과 세례를 상기하게 하며, 우리의 계속될 회심의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오로와 같은 비상한 회심 체험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평생 계속될 회심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한두 번의 회심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회심의 여정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심의 여정과 더불어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끊임없는 회심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문득 11년 전 배밭에서 일하다 순직과도 같이 새상을 떠난 정훈만 세례자 요한 형제가 정자에 만들어 붙인 ‘회심정(回心亭)’이란 명패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회심의 중요성입니다.
회심이 끝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회심으로 끝나면 반쪽입니다. 완전한 회심은, 회심의 완성은 복음 선포를 통해 이뤄집니다. 회심은 끊임없이 복음 선포를 지향하며, 복음 선포는 부단한 회심을 요구합니다. 흡사 관상과 활동이 함께 가듯 회심과 복음선포의 선교는 함께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최고의 애덕형태가 복음 선포요 그대로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사람들을 포함하여 주변의 모든 피조물이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새삼 내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선포의 현장임을 깨닫습니다. 정주(定住)의 삶을 사는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삶자체가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삶’이겠습니다. 회심을 늘 새롭게 하는 복음선포의 활동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주님을 선포하는 것이요, 우리의 삶자체가 주님 파스카의 삶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놀랍고 감사한 것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ㄴ)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심의 여정에, 복음선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회심의 여정을 상징하는 제 좌우명 기도시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원래 사랑의 강에 회심의 강, 복음선포의 강을 추가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회심의 강(江)'이, '복음선포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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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뜨거웠던 적이 있는가?>
신앙인이 아닌 사람에게 회개가 그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의미라면 신앙인에게 회개는 개과천선의 의미도 있지만 흔히 하느님께로 돌아섬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준이나 관점에서 볼 때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는 하느님을 등지고 있지 않았고 하느님의 일을 등한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입으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등지고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예수를 등지고 앞장서 가혹하게 신자들을 박해할 정도로 하느님께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가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전했던 것은 그가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성적으로 믿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로 향했던 열성이 예수님께도 향했던 겁니다.
달리 말하면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예수를 박해했기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예수님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열성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에겐 열성이란 것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열성이 있는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지 않은가? 믿지도 박해하지도 않은 나는 아닌가? 세상살이도 대충 신앙생활도 대충 아닌가?
이때 우리는 시인의 시 한 편이 생각납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불이 또 다른 연탄을 뜨겁게 불타게 하듯 하느님께 대한 그의 뜨거움은 예수께 대한 그의 뜨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대한 그의 뜨거움은 이제 사람들을 향한 그의 뜨거움이 되고. 사람들을 향한 그의 뜨거움은 다른 이들을 뜨겁게 불타게 하는 밑불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알 불이 이웃 사랑의 밑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 사랑을 묵상해봅니다.
나의 사랑이 실패한다면 사랑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이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입니다.
그다음으로 실패한 사랑은 사랑을 포기한 것이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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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더 나은 삶으로의 응답!>
오늘 복음(마르 16,15-1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방인의 사도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박해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의 대변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회개하기 이전에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며 살았던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모질게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사도 22,6-10 참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니아스를 도구로 쓰시어 그를 회개하도록,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니아스는 자신을 찾아온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2,14-16)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부르시고,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미사)를 통해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성직자의 말과 너를 통해서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날마다 더 나은 삶으로 응답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더 나은 삶으로의 '응답과 애씀'이 바로 '회개요 복음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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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하느님의 지극한
뜻은 우리의 진정한
회심입니다.
회심 없이는
복음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복음은 거짓된
가면을 회개로
벗게합니다.
회심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가 예수님을 이제
알게되는 것입니다.
회심이 빛이
참된 생명의
빛입니다.
회심은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는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자아가 이끌던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총은
언제나 우리의 바른
회심입니다.
회심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됩니다.
진심을 다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됩니다.
회심과 복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생에 걸쳐 우리는
회심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회심의
기쁜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회심의 빛이
복음의 빛입니다.
+++++++++++++++++
(2)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장 15절)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방향이다. 방향을 틀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다.
가장 아픈 삶이 가장 기쁜 삶이 되게 하는 회심(回心)이다. 하느님의 방식은 참된 회심의 방식이다. 회심은 참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참된 길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보게 되는 회심이다. 회심으로 하느님께로 가는 복음을 믿게 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가 회심의 탄생이다.
다마스쿠스의 회심으로 성 바오로 사도가 탄생한다. 회심이 참된 사랑이다. 삶을 되돌려주고 되돌아가게 하는 빛은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성 바오로 사도는 회심의 여행을 떠난다. 되돌려주어야 할 복음의 사랑이다. 회심으로 자라나는 교회의 삶이다.
우리의 회심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랑의 빛임을 믿는다. 다마스쿠스와 수도원 사이를 이어주는 회심의 빛이다. 한 사람의 참된 회심이 필요한 때이다. 하느님 사랑을 향하는 기쁜 회심 축일이다. 가장 좋은 회심의 때를 선물로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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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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