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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네트워크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와 자아’의 역동성을 탐구하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마누엘 카스텔의 ‘정보 시대 : 경제, 사회, 문화’
‘네트워크 사회’라는 개념을 주조해낸 마누엘 카스텔은 스페인 프랑코 총통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가담한 이후 프랑스 파리로 정치적 망명을 해 정보사회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전념한 사회학자다.
21세기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가장 유력한 두 개념은 정보 시대와 지구 시대다. 정보사회와 세계화의 도래는 사회제도는 물론 개인생활을 뒤흔들어 왔다.
정보 시대가 만개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이 시대의 특징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그 방향을 사려 깊게 탐색한 저작은 스페인 출신의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1942~ )의 <정보 시대: 경제, 사회, 문화(The Information Age: Economy, Society and Culture, 1996-98)>였다.
사회이론가에게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이 과제는 현실 분석의 설득력과 미래 전망의 통찰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전후 70년 사회사상에서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을 예견한 책들은 적지 않다. 피터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 대니얼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그 대표적인 저작들이었다. <정보 시대>는 이러한 저작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동시에 1990년대의 시점에서 정보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을 탐색한 기념비적인 저작이었다.
카스텔은 1972년 <도시 문제>를 발표해 도시사회학자로 자신의 학문 세계를 열었다. 1989년 <정보 도시>를 발표해 정보사회학자로 변신한 그는 <정보 시대>를 통해 사회학은 물론 정치학, 문화학, 매스 미디어 연구 등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그가 주조한 ‘네트워크 사회’는 정보사회의 변동을 분석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으로 평가돼 왔다. 출간된 지 2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정보 시대>는 이제 정보사회론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네트워크 사회와 정보 시대
<정보 시대> 3부작은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1996), <정체성의 힘>(1997), <밀레니엄의 종언>(1998)으로 이뤄져 있다. 카스텔에게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인 정보 자본주의를 생산·재생산하는 매개가 곧 네트워크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는 네트워크가 무엇이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다.
카스텔에게 네트워크란 상호 연관된 결절(node)의 집합을 말한다. 그리고 네트워크 사회란 사회구조가 극소전자 기반의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추진되는 네트워크로 구성된 사회를 뜻한다. 이 네트워크 사회의 등장은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 전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의 범위를 지구적으로 확대시켰다. 동시성과 지구성은 네트워크 사회가 갖는 중요한 두 특징이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는 이러한 네트워크 사회의 역사·이론·경제·문화 등을 포괄적으로 분석한다.
카스텔은 정보사회보다 네트워크 사회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그는 지식정보의 역할 증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증가가 가져오는 사회적 결과, 다시 말해 자아와 사회 간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 저작이 <정체성의 힘>이다. 이 책에서 그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정체성의 의미를 묻고 그 정체성이 사회운동들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다음, 정보 시대의 정치로서의 ‘스캔들의 정치’를 주목해 민주주의의 위기를 탐색한다.
<밀레니엄의 종언>은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와 <정체성의 힘>의 논의를 바탕으로 네트워크 사회의 등장이 가져온 세계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추적한다. 산업적 국가통제주의의 위기와 소련의 붕괴, 극빈국 제4세계의 등장과 정보자본주의의 블랙홀인 사회적 배제의 다양한 형태, 세계적 범죄 경제, 동아시아의 발전과 위기, 유럽연합의 딜레마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이룬다.
요약하면, <정보 시대>는 네트워크 사회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정보 시대의 등장과 변동을 포괄적이면서도 심층적으로 분석한 저작이다. 카스텔은 네트워크를 가운데 두고 네트워크와 사회, 네트워크와 자아의 역동성을 탐구함으로써 정보사회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다.
■정보 시대의 미래
<정보 시대>를 출간한 이후 카스텔이 발표한 저작들은 <인터넷 갤럭시: 인터넷, 비즈니스, 사회에 대한 성찰>(2001), <네트워크 사회: 비교문화 관점>(2004)과 <이동통신과 사회: 지구적 관점>(2007) 등이었다. 이 저작들에서 카스텔은 네트워크 사회론을 한층 정교화했다. 구체적으로 <인터넷 갤럭시>에선 마셜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와 대비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세계인 ‘인터넷 은하계’로의 진입을 주목했고, <네트워크 사회>에선 네트워크 사회의 경제, 사회운동, 문화 등을 분석했으며, <이동통신과 사회>에선 모바일 네트워크 사회의 등장에 초점을 맞췄다. 흥미로운 것은 <이동통신과 사회>의 모바일 시민사회의 한 사례로 한국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다룬다는 점이었다.
정보 시대가 본격화된 이후 네트워크 사회를 포함한 정보사회의 미래에 대해선 낙관론과 비관론이 맞서 왔다. 낙관론은 정보기술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평등한 사회관계와 민주주의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반면 비관론은 노동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정보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됨으로써 불평등이 증가하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보 시대의 미래에 대한 카스텔의 전망은 조심스럽다. 그는 미래학자들의 과도한 낙관론이나 사회이론가들의 지나친 비관론을 모두 거부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낙관론과 비관론은 정보사회의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카스텔에게 중요한 것은 근거가 취약한 낙관주의나 결정론적인 비관주의를 넘어서서 네트워크와 사회, 네트워크와 자아의 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합리적 실천이다. 정보 시대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정보사회론의 출발점으로 삼아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어판 저작은
<정보 시대> 3부작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는 김묵한·박행웅·오은주에 의해, <정체성의 힘>(우리말 제목: <정체성 권력>)은 정병순에 의해, <밀레니엄의 종언>은 박행웅·이종삼에 의해 번역됐다.
■한국 SNS 공론장의 특징 - 치열한 ‘논쟁의 마당’…개인주의와 공동체 성향 공존
네트워크 사회를 포함해 정보사회의 도래가 한국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초고속 인터넷과 이동통신망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정보기술혁명은 산업부문과 노동시장 및 고용구조를 재편시켰다. 나아가 선거 운동과 정권 교체의 정치변동에는 물론 개인들의 사고방식 및 생활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보사회의 진전과 연관해 최근 한국사회에서 큰 관심을 끌어온 것 가운데 하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등장이다. 페이스북·트위터·인스타그램 등으로 대표되는 SNS는 신문과 방송 등 제도화된 기성 공론장에 맞서는, 온라인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론장이다. 이 SNS 공론장에서는 두 가지 특징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SNS 공론장은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벗어난 유비쿼터스 공론장이다.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현재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벗어나 가상 공간에 자유롭게 접속함으로써 소통을 활성화하고 여론을 형성한다.
둘째, SNS 공론장은 심미적 공론장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심미적 공론장이란 기존의 숙의적 공론장, 대항적 공론장과는 다른 형태의 공론장이다. 이 공론장에서는 개인의 정체성·내러티브·유희·감수성·이미지가 더욱 중시되고, 개인적 흥미와 사적인 이야기가 한층 강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SNS 공론장이 긍정적인 측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존 오프라인 공론장의 보수적 성향에 대응해 SNS 공론장이 진보적 담론 생산과 유통의 새로운 중심을 이뤘지만, 이는 다시 보수적 SNS 공론장의 능동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최근 SNS에서는 진보 대 보수 간의 논쟁들이 과도할 정도로 치열하게 진행돼 왔다. 더불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SNS 공론장에서 개인주의적 경향 못지않게 공동체적 성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소통은 현실 공간에서의 소통보다 단절적이고 느슨한 형태를 띠지만, 동시에 이념·직업·취미 등을 매개로 한 공동체적 유대를 강화시키기도 한다. 정보사회의 도래는 대체로 개인주의를 확산시킨다. 그러나 SNS 공론장에서 볼 수 있듯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공존하는 것은 한국 정보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회적 풍경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