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대 문종실록(1)
1.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
(1019년-1083년, 재위기간 : 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정종시절에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문종(文宗)은 정치, 사회, 문화. 외교,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일궈낸다. 3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된 이러한 발전은 이른바 ‘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고, 이에 따라 고려문
화와 대외적 위상은 한층 격상된다.
문종은 현종의 셋째 아들이자 원혜태후 김씨 소생으로 1019년(현종 10년) 12월 계미일에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휘
(徽), 자는 촉유(燭幽)다. 1022년(현종 13년)에 낙랑군에 책봉(칙서로서 벼슬을 줌)되었고, 1037년(정종 3년)에 내사령
(문하성의 종1품 품계,왕자와 중신에 주는 명예직)에 올랐다가 1046년 5월 정유일 정종(靖宗)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
11대 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혈기왕성한 28세였다.
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고 사리에 밝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막상 왕위에 오르자 그의 뛰어남은 한층 더 빛을 내기 시작했다.
즉위하자 그는 곧 스스로 검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금은으로 장식된 용상과 답두(踏斗, 발디딤판)를 동과 철로 바꾸
고 금은실로 된 이불과 요는 견직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환관의 수를 10여명으로 줄이고, 내시(왕의 측근,왕의 비서진
들)역시 20여 명에 한정시켰다. 그리고 변방에서 공훈을 세운 자를 포상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시중 최제안
(최승로의 손자)과 최충을 불러 정책 방향을 문의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이렇듯 정열적인 면모를 보이며
시작된 문종의 정치는 이듬해 4월 사망한 시중 최제안의 후임으로 최충을 시중에 앉히면서 본격적으로 왕총지, 이자연
등의 재상들을 거치면서 무르익는다.
문종의 정치력은 일차적으로 법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통해 드러난다. 안정된 법제 확립이 사회안정의 첫 번째 요
건이라고 판단한 그는 1047년 6월에 법률가들을 모아놓고 법률 중에 현실성이 결여되고 모순된 것들을 찾아내어 시
정할 것을 명령하게 되는데, 이 결과 가장 먼저 형법이 대폭 정비되었으며, 2년 후인 1049년에는 5품이상의 고급 관료
들에게 양반 신분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의 지급을 보장하는 공음전시
법(功蔭田柴法)이 마련된다.
또한 재해시에 세금을 면제받는 재면법(災免法)과, 전답의 피해분에 대해 직접적인 조사를 통해 세금을 면제시키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도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1062년에는 죄수의 신문에는 반드시 형관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공정한 조사가 이뤄지도록 하는 삼
원신수법(三員訊囚法)이 생겼고, 1063년에는 국자감 학생들의 재학 연한을 제한하는 고교법(考校法)도 생겼다. 고교법
마련에 따라 유생은 9년, 율생은 6년으로 재학기간이 제한됨으로써 자질이 부족한 학생들이 국자감에 지속적으로 머물
러 있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법률제도의 지속적인 정착과 더불어 1076년에는 양반전시과가 재겅되어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완성되고, 문
무백관과 노역자의 녹봉제도가 확립되었으며, 1077년에는 정치적 안정을 목적으로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개경에
머물게 하는 선상기입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되기도 한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실시된 일련의 법제도 확립 작업은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력을 신장시킴으로써
고려의 대외적 위상을 한층 높였다.
이에 따라 현종, 덕종, 정종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내침을 노리던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대하여 침략의도를 드러내지
않았고, 오랫동안 국교를 단절하고 있던 송나라와 다시금 외교관계를 재개할 수 있었다.
문종은 거란에 대해 외교관습 차원의 형식적인 행동을 넘어선 그 어떤 호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거란이
강제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압록강 동쪽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적대시하였다. 그러던 중 1055년 7
월, 압록강 동쪽에 거란이 성을 쌓고 다리를 가설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대해 문종은 거란에 국서를 보내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하기로 한 양국간의 과거 약조를 근거로 거란군이 압록강 동쪽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
였다.
그러나 거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1057년 문종은 거란에 대해 다시 항의문을 보낼 것을 명령하고, 거란이 고려
의 요구에 응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 항의하라고 다그친다. 이때 거란은 새로운 왕이 즉위했는데, 문종은 신
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위 축하사절단에게 항의문을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과거 같으면 고려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했을 것이지만 고려의 국력신장이 부담스러워 그렇게 강력한 태
도를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종은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선진문화에 대한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송나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비록 거란의 압력으로 국교는 단절되었지만 송나라 상인들의 고려 출입을 자유롭게 허락하고, 송에서 건너오는
문물을 배우는 데도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급기야 송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결심한다.
1058년 8월 문종은 서해를 건널 수 있는 큰 배를 조성하게 하고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재개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백관들이 거란과의 관계가 나빠질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여 실현시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지속적
으로 송나라 상인들과 접하면서 자신의 내심을 송 왕실에 전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1068년 그 동안 거란의 눈치를 살
피며 고려와의 국교 회복을 망설이고 있던 송은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국교를 맺을 것을 제의해왔다.
송의 사신이 고려에 당도하자 문종은 매우 흥분한 상태로 그들을 맞아들인다. 오랫동안 송의 선진문화를 열렬히 성
원했던 문종은 그들과 통교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071년 3월 신하들이 강력한
만류를 저지하고 민관시랑(호부의 정4품,정3품 상서 버금관직) 김제를 송에 파견함으로써 고려와 송은 다시금 정상적인
국교를 맺었다.
송은 당시 고려와 힘을 합해 거란을 압박하고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고, 고려는 송을 통해 거란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부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거란과 외교관계를 끊지 않음으로써 고려는 북
방의 안정을 유지시켰다. 이에 대해 거란은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반발은 고려와 송의 결속을 더욱 강화
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문종은 그 같은 거란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송과 국
교를 재개했던 것이다.
문종대에는 청치와 외교의 안정과 더불어 학문적으로도 대단한 발전이 있었다, 학문 발전을 주도한 인물은 최충이었
다. 그는 나이 일흔이 되자 스스로 퇴직을 신청한 후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9개의
서재를 마련하여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자 정배걸, 노단, 김상빈 등 학문에 밝은 11명의 유
신들도 최충과 마찬가지로 학도를 길러냈다. 그 결과 최초의 사립학교인 이른바 12학도가 생겨나 고려 사회에 유학 열
풍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신하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유학열풍이 일어났지만 오히려 문종은 불교
발전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력을 동원하여 흥왕사(개풍군 소재.몽고침입시 불
에 타 없어졌으나. 다시 재건했으나 고려멸망후 자연히 폐사됨)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1055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약 13년 만에 완성되었으며 총 2천 8백 간의 규모로 대궐의 크기와 비슷했다고 한다. 그는 또 여기에다 금 144근, 은
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기도 하고, 절 주변에 성을 쌓아 재난시에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했다.
계행이 청청한(계를 받은 승려들의 생기있고 산뜻한) 1천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흥왕사는 문종대 이후 고려 불교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숙종대에는 흥왕사 금탑에 송나라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흥왕사 창건 이외에도 문종은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공식적으로 부활시키고 많은 불교 행사를 치렀으
며, 타락한 승려들을 환속시켜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되돌려놓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또한 스스로 청정한 생활을
하여 매월 세 번 이상 꼭 절을 찾아 기도를 하면서 백성들의 불심을 자극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세
아들을 출가시키는데, 그 중에 하나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천태종(법화경을 소(疏)로 하면서,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합친 종)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선불교운동이 일어난다.
문종이 이렇듯 불교에 열성을 쏟은 것은 스스로의 종교적 가치관에 따른 면도 있으나 한편으론 신앙으로 민심을 사
로잡고 불교를 통해 자신의 친위세력을 형성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당시 대
신들은 대개 유학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비해 일반 백성들은 불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학의 지나친 부흥
으로 대신들의 힘이 극대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민심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를 융성시키는 것보다 좋은 방
책은 없었다.
철저한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법제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문종이지만, 그는 곧장 예외를 인정하고 고도의 정치
력을 발휘하는 포용력 있는 왕이기도 하였다. 비록 법적으로는 인정될 수 없는 일도 그다지 무리가 따르지 않는 한도
에서는 법을 고집하지 않았고, 대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판단될 때는 과감하게 자신의 고집을 꺾는 군자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때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며 무서운 추진력을 보이기도 했는데, 불교융성책과 흥왕사
창건, 그리고 송나라와의 국교정상화 등의 문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문종의 정치적 넓이와 인격은 고려사회를 건국 이래 최고의 황금기로 끌어올렸다. 수많은 인재와 뛰어난 신
하, 그리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불교문화, 자연스럽게 퍼져간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사학의 융성, 이 모든 것
들은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폭넓은 인격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가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죽음의 날은 다가왔다. 1082년 인절현비가 이씨가 죽고, 이듬해 4월 아홉 번째 왕자 왕침이 죽고
난 다음 실의에 빠진 문종도 갑자기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5월부터 일어나지 못하다가 7월에 태자 훈에게 왕위를 물
려주고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향년 65세로 재위 37년 2개월째였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문종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쓸모없는 관원이 줄어 사업은 간편하게 되었고,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으며 창고에는 해마다 묵은 곡식이
쌓이고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때를 태평성대라고 일컬었다.’
능은 개성 불일사 남쪽 산기슭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경릉이다.
첫댓글
고려왕조신록 22편을 읽으면서
모처럼 답답함이 사라졌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인품이나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하는
고려의 왕 문종의 치세를
읽으면서 알게 합니다.
자고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합니다
우리나라는 언제 쯤 문종같이
현명하고 당당하고 백성들을
살펴 볼 줄아는 현명한 통치자가
나올까요~
화무십일홍이라 열흘 붉은꽃은
없다 했으니 이 또한 지나가겠지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추일슬풍님 감사합니다
긴글 쓰시느라 무더운 여름 건강을
해하면 아니 됩니다~ㅎ
항상 좋은 말씀으로 답글하여 주신 보쳉님의 노고에
크게 감사하나,
우리 범방의 조회수가 다른 글에 비해서 워낙 낮기에
상대적인 침체감을 느끼는 바,
다음회부터는 '자유게시판'이나, '커피 한잔의 여유방'으로
옮겨서 게재하겠사오니,양해바랍니다.
추일슬풍님
글을 쓰는 이유는 많이 읽혀지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거지요
어느곳에 게시글을 올리던
상관 없습니다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면
만족 합니다 .
건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