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나는 병원에 관한 추억이 없다.
내 어릴 적 어머니가 주기적으로 장애인 형을 리어카에 싣고 시오리 길 병원을 다녀오기는 했어도 내가 따라가 본 적 없으니 병원을 모른다.
배탈이 나도 어머니가 손으로 아랫배를 쓸어주거나 머리통이 깨져서 피가 나도 된장 바르는 것으로 끝이었다.
워낙 개구쟁이라 여기저기 생채기 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 흔한 빨간 아카징끼도 없이 나는 어린 시절을 났다.
성인이 될 때까지 치과 한번 간 일 없고 십대 후반에 공장에서 다쳤을 때와 군 제대 후에 고래 잡을 때 병원 간 것이 30대 이전은 전부다.
그런 내가 백병원에 관한 추억이 있으니 어쩌면 젊을 때 겪은 유일한 병원 기억일 것이다.
내가 부천에서 공장을 다닐 때 공장장이었던 분은 내 누이 외에 유일하게 나한테 신경을 써 준 사람이다.
그 분이 구로공단으로 자리를 옮기며 나도 따라갔는데 시설과 복지가 열악한 부천 공장에 비하면 가리봉동은 가히 대기업(?) 수준이었다.
1979년 아니면 80년쯤일 것이다. 어느 날 그 분이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문안을 갔다. 백병원은 최신 시설과 크기부터 입이 벌어졌다.
촌닭인 내가 난생 처음 본 병원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을 한다. 당시 나한테는 을지로 서울 백병원이 가장 크고 유명한 병원이었다.
잡초처럼 자라선지 아님 내가 워낙 건강 체질이어선지 이후에도 병원 갈 일이 거의 없어 백병원은 잊고 살았다.
가끔 영화 보러 중앙극장이나 명동 성당 부근을 갈 때 백병원 건물을 보면 조금씩 세련되는 건물 외벽에서 세월의 흐름을 감지했을 뿐이다.
서울 백병원이 이달 말인 8월 31일로 폐업한다고 한다.
얼마전부터 문을 닫네마네 하는 소식을 듣긴 했으나 완전 폐업이 결정되자 아쉬운 생각이 들어 며칠 전에 그곳을 가봤다.
서울 백병원은 1941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민간병원인데 80년 넘은 전통을 가진 병원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폐원 이유는 막대한 적자 때문이다.
하긴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산부인과도 없어진 지역이 많은데 적자가 쌓이는 병원을 마냥 껴안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재단과 서울시는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여러 방안을 고심했으나 해결책을 찾지 못해 결국 폐원으로 결론이 났다.
내 나름 백병원이 계속 있어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봤다. 서울 도심에 이런 병원이 없어지면 도심에서 생긴 위급 환자가 피해를 본다.
명동 성당이나 서울역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응급환자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곳이 서울 백병원이다.
곧 사라질 응급센터를 오래 바라보며 병원이 꼭 영리만을 목적으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통 있는 백병원을 서울시가 인수해서 공공병원이나 고급 요양병원으로 운영하면 안 될까?
백병원 간 김에 백인제 가옥까지 보고 올 생각에 내처 북촌까지 갔다.
백인제 선생은 백병원을 세운 인물로 현재 백병원 1층에도 선생의 얼굴상과 함께 상세한 약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백인제 가옥은 일제시대에 지은 개량 한옥인데 내노라 하는 유명 갑부가 살던 집을 1944년에 백인제 선생이 매입해 거주하면서 오늘날 백인제 가옥으로 불린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백인제 가옥에 얽힌 사연과 건축사적 의미가 나온다.
유홍준 선생은 인왕산 아래 서촌이 고향인데 북촌 인근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어릴 적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백인제 가옥은 서울시가 사들여 지금은 문화재로 관리를 받으며 일부 시설을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단풍 든 가을에 가면 더욱 좋다.
백인제 선생은 1941년 백인제 외과병원을 개원했고 1946년 백병원을 설립했다.
경성의대와 서울의대 교수로도 지냈는데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지 못해 납북되었다.
천재 외과의사의 실력을 북에서도 인정해 백인제 선생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 분의 일생을 오늘 굳이 자세히 기술할 필요는 없겠다.
단지 조만간 문을 닫을 서울 백병원 설립자였고 현재 백병원은 서울 백병원을 포함해 전국에 5개 백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 수도권에는 서울 백병원과 상계 백병원, 일산 백병원이 있다.
82년 역사의 서울 백병원이 8월 말 모든 환자 진료를 종료하며 폐원 절차를 강행한다.
병원 곳곳에 폐원 반대 문구가 붙어 있었고 직원들의 시위가 열리고 있지만 병원이 문을 닫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서울 백병원 폐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며칠 전에 찍은 백인제 가옥 사진을 몇 장 올린다.
첫댓글
그런데 서울에 유명병원들은
진료를 받으려면 한달 이상씩을
기다려야 의사선생을 만날 수 있는데
백병원 처럼 유명한 병원이 경영난으로
폐업신고 를 한다니 납득이 안되네요
서울에 백병원은 우리 어릴적엔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병원이었는데
실력있고 의술도 좋은 의료진을
스카웃하지 못했나 봅니다.
병원 신세를 안지고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복받은거지요 건강한신체로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세요.~ㅎ
보쳉님 말씀처럼 서울 유명병원은 환자들이 몰려 진료 대기 시간이 엄청 깁니다.
그런 병원은 서울대 병원이나 삼성병원, 세브란스처럼 최상급 병원이구요.
백병원은 최상급 바로 아래 병원이어서일 겁니다.
호텔도 별 다섯 개 특급호텔은 객실이 차지만 어중간한 급은 영업이 어렵듯이요.
안 그래도 제가 아직까지는 병원을 모르고 산 편이라 행운아로 여긴답니다.ㅎ
백병원은 저희 가족하고도 인연이 많은데..
오래전 우리집 애도 거기서 태어났고, 처가집 애도 거기서 출생~~
지금은 내노라 하는 큰 대학병원들이 많다보니 밀리지 않았나 봅니다..
10년간 적자 누적이라는데 어쩌겠어요..
그나마 그 자리를 기념관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동님은 백병원에 대한 추억이 많을 듯합니다.
시설 좋은 초대형 병원들이 있는데 굳이 도심에 있는 백병원을 이용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용산에 있던 중앙대 병원도 없어지고 산부인과로 명성을 날렸던 필동의 제일병원도 문을 닫고,,
점점 서울 도심에 의료 공백이 커지고 있네요.
한편 백병원이 어서 폐업해서 팔리길 고대하는 사람이 많다는군요.
노른자위 땅에 상업 시설로 개발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긴답니다.ㅠㅠ
친정아버지도 백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셨는데
폐업이라니 ㅠㅠ
백병원이 워낙 역사가 있는 유명병원이라 사연 있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싱글벙글 님도 그런 분이시군요.
어쨌든 전통 있는 병원이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네요.
사십넘은 우리딸.
여섯살적에 가와사끼병으로 입원. 살려준 곳인데..
안타깝네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니~~
중앙극장도 진즉 사라졌고.
제2의 고향이 영 낯설어져가네요
감사르~
앗! 백병원과 중앙극장을 아신다니 반갑습니다.
희수님한테는 이 병원이 은인처럼 여겨질 것 같군요.
제가 워낙 영화광이라 서울 도심 극장은 아주 빠삭하지요.
코리아극장, 스카라, 명보, 국도, 대한극장 등 명동과 충무로 극장을 아주 쓸고 다녔답니다.ㅎ
@유현덕
강남이 없던시절이니..
여고시절.
명동성당 근처. 유네스코회관옆. 남산 케블카타는 곳 아래..살았지요
ㅎ
판수니하믄서도~~
세월따라 변하는 세상.
아쉽지만. 다 그런거지요 역사속으로 ~~
@희수 백병원 문 닫는 글에서 서울 도심 역사로 전환이 되는군요.^^
희수님이 저보다 한참 선배님이셔서 완전 서울 도심 역사를 꿰고 계시네요.
저는 종로에서 친구 만나고 가리봉동으로 돌아갈 때도
미도파 앞까지 걸어 와서 버스를 타곤 했네요.
크리스마스 무렵이던가?
미도파 건너 코스모스 백화점에서 여친에게 털장갑을 선물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암튼 저도 여태 서울 시민이니 말할 자격은 있겠지요.ㅎ
백병원이 폐원을 한다니 놀라지않을수 없네요
친할아버지 께서 지방 에서 내려오시면 꼭 백병원이나 성바오로 병원 두곳중 한곳 으로 입원 시키셨거든요
종갓집 장손의 며느리인 엄마가 하루종일 간호를 해야해서 집에서 가까운곳 으로 정하느라구요
서울 백병원 이 없어진다니 믿어지지않네요ㅜ
리즈향님도 백병원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많겠습니다.
지인 중에 백병원을 애용하던(?) 분이 있는데 그 분도 방장님처럼 백병원 없어진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네요.
대기업에서 인수해 리모델링을 하고 계속 운영하면 어떨까 생각도 해 봤으나
아마도 병원으로는 수익 내기가 쉽지 않은 걸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백병원 폐원 소식에 방장님처럼 아쉬운 마음 갖는 사람들 많을 거예요.
편안한 밤 되세요.
저는 백병원은 가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오래된 병원이
없어진다는건 의외네요
의료비도 오르고 보험도 오르고
아픈사람도 많던데 적자라니
더 의외구요~~
그래서 의사들이
비싼 검사를 권하면서
영업을 많이 하나봅니다
그러게요.
오래된 유명병원이 어쩌다 적자로 문을 닫게 되었는지 뜻밖이지요.
병원과 정비소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엔진오일 갈러 갔더니 이것도 갈아라 저곳도 문제 있다 하면서 돈 쓰게 만든다지요.
병원도 잘못 걸리면 쓸데없는 과잉 검사로 호구되기 십상이랍니다.
나이 들수록 병원 갈 일은 생기겠지만 정신은 바짝 차려야겠지요.ㅎ
어떻게 백병원이 없어져요
서글프네요
육교건너 스카라 극장
종로가 고향이라 잊을수가
없지요
백병원 극장 길건너 쵝오
인테리어와 경양식짐 스테이크
아주 유명했지요
머리로 그려짐니다
서운해서..
교동님 고향이 종로시군요.
저도 종로구가 고향인 절친 때문에 일찍부터 종로 변천사를 경험했지요.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그래도 전통 있는 병원이 사라지는 것은 막았으면 한답니다.
스카라, 명보, 국도, 사라진 극장들이 그립듯이 훗날 백병원도 그리워지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오래오래 건재하자구요.ㅎ
@유현덕 서울 동기 만나 반갑네요..종로 에서 결혼전 까지 있었지요
긍금합니다
교동 국교 동창생 모임이 있는지 ???
우리집도 백병원에 추억이 있는데....
아쉬운 소식입니다 ~
네, 쉼표 선배님도 백병원에 추억이 있으시군요.
유독 선배님 또래가 백병원에 관한 기억이 더 많을 걸로 봅니다.
병원은 사라져도 우리는 범방에서 오래 함께 했으면 합니다.ㅎ
무엇이든지 수입이 적으면 문을 닫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네요.
그동안 적자 분을 다른 백병원 수입으로 매꿨으나 한계가 왔나 보더라구요.
워낙 전통 있는 병원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