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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에서 퍼온 글)
북한강 기슭에 자리 잡은 강촌은 과거 산과 강이 어우러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1896년 춘천의병을 이끈 이소응(李昭應, 1852~1930) 선생은 1852년 이곳 강촌(강원도 춘천시 남면)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 또는 사정거사(思靖居士)이며, 후에 의신(宜愼), 직신(直愼)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전주로, 선조의 별자(別子)인 경창군(慶昌君) 주(珘)의 후예이다. 선생의 6대 조인 화평군(花平君)이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춘천으로 이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선생은 아명을 중만(仲萬)이라 불렀는데, 이는 만세의 스승이 된 공자를 기대하고 붙인 이름이었다. 6세 때 부친을 여의고, 그 이듬해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선생이 일생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22세 때인 1872년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들어가 화서학파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춘천 가정리(柯亭里) 출신의 유중교는 조선 말기 대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로, 양평의 한포서사(漢浦書社)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일찍이 선생의 부친이 김평묵(金平黙), 박경수(朴慶壽), 유중교 등 이항로의 문인들과 교유하고 있었던 까닭에 선생은 유중교의 문하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의암 유인석 선생 ⓒ독립기념관
선생은 일생 동안 춘천 가정리(柯亭里)에 세거하던 고흥 유씨(高興柳氏) 집안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가정리는 선생이 태어난 강촌리 부근에 자리 잡은 고흥 유씨 집성촌이었다. 유중교와는 사제관계에 있었고, 유중교의 재종질인 동시에 동문의 선배였던 제천의병장 유인석(柳麟錫)과는 평생 활동의 궤적을 함께 하다가 마지막에는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또한 선생의 부인은 고흥 유씨 승기(承基)의 딸이었으며, 누이는 유중교의 아들인 의석(毅錫)에게 시집을 갔고, 아들 배인(培仁)도 고흥 유씨 윤석(允錫)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가정리 고흥 유씨 집안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학통상, 혼맥상 고흥 유씨 일문과 돈독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유중교와 유인석을 중심에 두고 학문과 처신에서 일생토록 이들을 철저히 따르게 되었다.
특히, 유인석은 선생과의 관계에서 일생 동안 활동의 궤적을 함께 한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1876년 개항 반대투쟁에 투신한 이후 국내 의병항전, 국외 망명 수의(守義) 및 항일투쟁 등으로 연속되는 그의 일체의 활동 궤적이 유인석의 경우와 일치하고 있다. 선생은 63세 되던 1914년 10월 임종 직전의 유인석을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로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올렸다. 이듬해 1월 유인석이 작고하였으니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된 이 자리에서 선생은 유인석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제가 선생을 따라서 지낸 지 이미 여러 해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은혜를 입은 것이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됨이 졸렬하여 매번 날이 저물어 엎어짐을 두려워했습니다. 단연코 금일부터는 말과 행동을 오직 선생을 본받아 원컨대 천리마에 붙은 미물이 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책려(責勵)하고 경발(警發)하여 더욱 즐거이 길러주시는 정성을 다하여 성취하는 바가 있게 해 주십시오.
동문의 선배이자 동지인 동시에 정신적 지도자로 기대어 왔던 유인석에 대한 필생 경모의 정이 절절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선생은 1930년 작고할 때까지 유인석에 대해 스승의 예를 다하였다.
선생이 세상에 처음으로 이름을 드러낸 것은 1876년 개항 때였다. 일제의 강요로 야기된 개항 여부를 둘러싸고 국론이 분분할 때 화서학파에서는 도끼를 메고 상소한 최익현(崔益鉉) 외에도 강원도, 경기도 동문 47명이 연명하여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척양소(斥洋疏)를 올릴 때 선생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고 개항이 이루어짐으로써 이후 조선은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침략 무대로 점차 바뀌어 갔다.
개항 후 일제는 대조선 침략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갔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갑오변란을 일으키면서 그 동안 감추고 있던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듬해 3월에는 변복령(變服令)이 공포되어 흰색의 전통 의복을 흑색의 ‘오랑캐 의복’, 곧 양복(洋服)으로 바꾸어 입게 하자 이를 크게 탄식하였으며, 이어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1)들에 의해 국모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는 상투를 자르게 한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유중교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유인석은 1895년 변복령이 내려진 뒤 일제 침략으로 야기된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이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1895년 6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제천 장담(長潭)에서 수백 명의 유생을 모아놓고 강습례(講習禮)와 향음례(鄕飮禮)를 개최하였다. 유인석은 이 모임에서 큰 변란에 정당하게 처신할 수 있는 행동 방안을 숙고한 끝에, 첫째, 거의소청(擧義掃淸), 곧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소탕하는 방안, 둘째, 거지수구(去之守舊), 곧 고국을 떠나 국외로 가서 대의(大義)를 지키는 방안, 셋째, 자정치명(自靖致命), 곧 의리를 간직한 채 순의(殉義)하는 방안 등 세 가지를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처변삼사(處變三事)’는 화서학파의 인물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해 가는 데 그 준거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근대 수구파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행동강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선생은 처음에는 양평의 용문사로 들어가 처변삼사 가운데 자정(自靖)의 방안을 따르기로 하였다. 하지만 곧 유중악과 유인석으로부터 의병에 참여해 줄 것을 권유받게 되자, 계획을 바꾸어 의병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한편, 단발령 공포 후 춘천지방의 민심은 크게 격동하였다. 선비 정인회(鄭寅會)를 주축으로 군인 성익환(成益煥)과 상민 박현성(朴玄成) 등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규합되면서 의병이 일어났다. 춘천의병 봉기 당시에 9세 소년으로 현장을 목격했던 저명 언론인 차상찬(車相瓚)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을미년 섣달 건양 원년 1월 강원도 춘천에서 일어난 의병 난리는 근대 조선의 의병 난리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난 의병 난리로서 참 굉장하였었다. 그때 나의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엇지 인상이 깊이 박히었던지 지금까지 눈앞에 환히 보이는 것 같다. 그때 그 의병의 장수로 말하면 나의 자형(姉兄)이 되는 당년 27세의 청년 정인회였었는데 그는 본래 큰 뜻이 있는 강개한 선비로 (중략) 그 해 섣달 마침 단발령이 내려서 경향 각지에 인심이 크게 소동되는 중 (중략) 정인회는 그것을 제일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먼저 군인 중 다소 신망이 있는 성익환과 결탁하여 군대를 연락하고 일방(一方)으로 유림에 비밀 호통(號通)하여(소위 사발통문) 유생을 망라하며 또 상민 중 용력과 담력이 있기로 저명한 박현성과 기맥을 통하여 시정(市井)의 사람들을 연결하였다. 정은 이와 같이 각 방면의 사람들과 비밀히 약속하였다가 건양 원년 1월 1일 즉 단발령 시행일을 위기(爲期)하여 첫새벽에 일제히 읍중에 모여 의기를 들고 군대를 선두로 하여 함성을 치며 먼저 관찰 이하 소위 개화당에 속한 중요 관리를 죽이려고 관찰부와 군아를 습격하였다.
갑오경장의 급진적 제도 변혁에 분개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던 춘천부의 유림세력도 단발령 후 정인회가 봉기할 때쯤에 대거 일어났다. 감역 홍시영(洪時永)은 산내(山內)에서 방문(榜文)을 내걸었고, 선생의 종조부인 이면수(李勉洙)는 산외(山外)에서 통문을 돌렸다. 또 선비 이수춘(李守春)과 민영문(閔泳文) 등이 전체 읍민을 격동시킴으로써 의병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춘천부민들은 정인회를 필두로 성익현, 박현성, 홍시영 등이 주축이 되어 1896년 1월 18일(음 1895. 12. 4.)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관찰사, 군수를 비롯하여 단발을 강요하며 개화정책을 추진한 관리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군사를 앞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관찰부와 군아로 돌입하였다. 이미 전날 밤에 군수 정필원(鄭弼源) 이하 관리들이 도주하였고, 의병들은 군아를 점거하여 본영으로 삼았다. 이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던 무렵까지 춘천 부사, 유수(留守)로 수년간 있으면서 가렴주구를 일삼아 주민들의 원성을 크게 산 민두호(閔斗鎬)의 생사당(生祠堂)을 불태우고 그의 아들 민영준(閔泳駿)의 시골집에 난입하여 집기를 부쉈다.
춘천의병은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을 비롯하여 아전, 구식군인, 포군, 보부상, 농민, 상인 등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춘천의병의 총수를 5~6천 명으로 추산하였던 차상찬은 의병의 다양한 신분 구성에 대해 “그 중에는 도포(道袍) 유건(儒巾)에 육자보(六字步)를 걷는 유학자도 있고 물무 작대기에 패랭이를 쓴 부상(負商) 패도 있고 노랑수건에 노망태를 짊어진 산렵 포수(山獵砲手), 뽕나무 활에 목창을 가진 농민 등 각색 인물이 다 있었다.”(「丙申兵亂 關東民兵亂秘話」)라고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이처럼 춘천의병은 다양한 집단이 충의심과 반개화 의식에 따라 일시 규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일사분란하게 통솔할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의병은 곧 해산 위기에 처하였고, 급기야 일부 군사들이 관찰부에 난입하여 약탈을 감행하는 등 반군의 조짐까지 나타났다. 이에 의병을 주도한 인사들은 명망과 학식이 높던 선생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았다.
선생은 춘천의병이 최초로 봉기한 지 이틀 뒤인 1월 20일 의병장에 올랐다.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에 제단을 쌓고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천제(天祭)를 지냈다. 이어 각 면의 부호들로부터 다량의 군량을 수합하여 군아의 연병장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관찰부의 군기고를 열어 일반 민병에게도 무기를 나눠주고 서울 진격을 위해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선생은 의병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군수품과 군수전을 확보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에 선생은 ‘춘천 의병소(義兵所)’의 명의로 부근 각지로 통문을 보내 각 읍의 호포전(戶布錢)과 결세(結稅)를 의진 본영으로 신속히 납부토록 통고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에는 응분의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를 보냈다. 또 춘천 관찰부의 공전(公錢)을 전용하여 군자금에 충당하였고, 역마(役馬)를 징발하여 군마(軍馬)로 삼았다.
선생은 ‘춘천 의병장’의 명의로 또한 강원, 경기, 관북 일대에 1월 31일자로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이라는 제하의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그 정당성을 천명하고 백성의 참여와 원조를 독려하였다.
오늘날 왜적이 창궐하고 국내의 역적이 여기에 결탁하여 국모를 시해하며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자르고 백성을 구박하여 사지로 몰아넣고 성현의 도를 이 땅에서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 이에 하늘이 위에서 크게 진노하고, 만백성이 모두 불구대천지원수로 이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무릇 사방에서 일어난 우리 의병은 국가를 위해 복수하고 설욕하는 것을 반드시 가장 큰 의리로 삼아야 한다. 의병이 이르는 지방의 수령으로서 시의를 관망하여 즉시 호응하지 않는 자가 있거나 적의 편에 붙어서 의병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곧 일제의 앞잡이요 역당의 무리이니, 단연코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요컨대, 국내의 개화파가 일제와 결탁하여 국모인 민 황후를 시해하였고 단발을 강요하여 조선의 우수한 문물을 파괴하였으므로, 의병은 국적(國敵)을 처단하여 원수를 갚는 데 제일의 목표를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의병을 훼방하는 불의의 세력은 바로 이적과 금수, 그리고 난신적자(亂臣賊子)의 부류로 간주하여 함께 처단할 것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선생이 지은 이 격문의 논지는 역시 화서학파의 역사정신이며 학문적 특색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입각해 있었으며, 이러한 면에서 제천의병을 이끌었던 유인석의 거의(擧義) 명분과 일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이 공포한 격문은 특히 관북지방의 의병 봉기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일제의 원산 영사관 보고에 “낭천(양구), 금성, 회양 등의 각 군수는 이미 폭도(춘천의병)의 격문에 같은 취지를 표하였다. 또 이곳에 근접한 안변군청에도 적의 전령을 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형세이기 때문에 이 격문은 함경도 어디를 막론하고 모두 전달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지금 함흥 이북 길주 부근의 정보에 의하면 민심이 자못 격앙하여 자칫하면 기회를 보아 폭동을 일으키려는 현상”이라고 지적한 것은 그러한 정황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선생이 이끈 춘천의병은 1월 28일 춘천 관찰사로 부임하던 조인승(曺寅承)을 잡아 처단하였다. 이에 앞서 조인승은 초관(哨官) 박진희(朴晉熙)를 미리 춘천으로 보내어 의진의 자진 해산을 요구하였다. 선생은 박진희가 단발한 친일 관리라는 이유를 들어 처단하고 그 머리를 홍문(紅門) 위에 매달아 친일 개화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어 조인승을 가평과 인접한 서면에서 체포한 뒤 춘천으로 끌고와 춘천 관아 앞 ‘개못개’에서 총살하였던 것이다.
신임 관찰사 조인승이 처단되자, 중앙 정부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이 국왕이 친히 임명한 관리를 처단한 사실은 내외의 관원들에게 중대한 위협 요인으로 인식되었고, 다른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제천의병의 경우에는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과 단양군수 권숙(權潚) 등을 단죄하였으며, 민용호(閔龍鎬)가 거느린 강릉의병도 고성군수 홍종헌(洪鍾憲)과 양양군수 양명학(楊命學) 등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안동에서도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의병들에게 처단되었다.
조인승 처단 직후 중앙 정부에서는 춘천의병을 제압하기 위해 1월 31일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이 친위대 1개 중대를 급파하였다. 일본군도 이때 친위대의 군사행동을 지도하고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특무조장 1명과 하사 1명을 합류시켰다. 이어 2월 5일에는 2개 중대의 병력을 추가로 증파함으로써 춘천의병을 압박해 왔다.
한편, 서울의 관군이 춘천으로 급파된 다음날인 2월 1일에 선생이 거느린 의병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춘천을 떠났다. 이 날의 행군을 목격한 차상찬은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때의 광경이야말로 참으로 장관이었다. 사람 수가 아무리 많지마는 원래 훈련이 없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인 까닭에 대열이 정돈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복색도 형형색색이었다. 각색 대장은 아관박대(峩冠博帶)로 사인교(四人轎)에 일산(日傘)을 받고 앞뒤에 병정과 포수가 옹호(擁護)하고 가며 그밖에 장교는 대개 말, 노새, 당나귀 등을 탔는데 그중 당나귀가 제일 많아서 울 때면 이곳에서도 ‘끙까끙까’ 저곳에서도 ‘끙까끙까’ 하고 깃발은 마치 서낭대 같은 기에다 국적토벌 국모복수 척양척왜 단발불복 등 기기(奇奇) 문자를 써서 들었고 앞에는 나팔, 북, 삼현육각 등을 두드리며 나아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창검은 일월을 희롱하였다. 군병을 위시하여 운량(運糧)하는 마태(馬駄)까지 어찌 수가 많았던지 춘천읍에서 오륙인 내지 칠팔인씩 일렬을 지은 것이 가평군 경계까지 약 50리의 장사진을 쳤었다. 그때의 기세로 말하면 서울은 그만 두고 천하라도 다 집어 삼킬 것 같았다.
서울로 진격하는 의병을 선생이 직접 지휘했는지 여부는 자료상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병장의 신분을 고려할 때 선생은 이 의진을 선두 지휘해 출정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춘천의병은 서울에서 출발한 관군이 가평까지 진출한 상태에서 2월 2일 가평의 앞산 벌업산[寶納山]에서 진을 치고 대치하게 되었다.
의진의 동향을 탐색하던 경군은 다음날 비가 내려 의병이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된 틈을 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관군에 비해 훈련도 부족하고 무기도 빈약한 의병은 관군의 총공세에 직면하자 그대로 패산한 채 춘천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벌업산 패전 후 춘천으로 퇴각한 의병은 약사현(藥司峴) 부근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이때 선생은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의진의 통수권을 종형 이진응(李晉應)에게 맡기고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원병을 청하였다. 맹영재는 1894년 수백 명의 포군을 동원하여 동학군을 진압한 공로로 지평군수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그의 일족인 맹달재(孟達在)가 선생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원병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군수 맹영재는 원병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선생을 잡아 구금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예기치 못한 위기상황에서 선생은 이근원(李根元), 유중룡(柳重龍), 이장우(李長宇) 등 동문들의 원조에 힘입고 유인석 휘하의 정익(鄭瀷) 등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구출될 수 있었다. 이에 선생은 제천으로 내려가 유인석 의진에 합류하였다.
한편, 선생이 맹영재에 의해 구금된 동안, 관군은 가평에서 춘천으로 올라와 의병을 공격하였다. 당시 춘천의병은 관군의 공격을 앞두고 여러 장수들이 각기 군사들을 거느리는 등 혼란한 형세를 보였기 때문에 관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었다. 이진응이 지휘하는 의병은 2월 8일 약사현 뒷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결국 패산하고 말았다. 의병장 이진응은 관군에 몰려 포위당하자 우물에 빠져 자결하였다.
패산한 춘천의병은 그 잔여 세력이 몇 갈래로 나뉘어 영동지방으로 넘어가 민용호가 이끈 강릉의병에 합류하게 된다. 춘천의병의 순무장(巡撫將) 장한두(張漢斗)가 강릉의병에 합류한 데 이어 선생의 종제 이경응(李景應)도 잔여 의진을 수습하여 2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릉의병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이경응은 민용호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이경응은 6월 23일 강릉의병을 떠나 정선을 거쳐 제천으로 내려가 학교(鶴橋)에서 제천의병과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 이경응 의병은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1896년 6월 제천성 실함2) 후 제천의병이 서북 행을 결행하게 되자 황해도 금천(金川)으로 들어가 그해 여름을 지냈다. 이름을 ‘의신’으로, 호를 ‘사정거사(思靖居士)’로 쓰게 되는 때가 바로 이 즈음이다. 이어 그해 겨울에 원주 치악산의 동쪽 배양산(培陽山)으로 이사하여 은둔하다가 1898년 봄에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건너가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일차 망명하였다. 이어 같은 해 10월(음) 유인석과 함께 다시 통화현 팔왕동(八王洞, 현 집안현 覇王朝)으로 이주하였다.
을미의병에 참여 이후 선생은 일생 동안 항일투쟁을 본업으로 삼았다고 할 만큼 이를 철저하게 체인(體認)하였다. 선생의 일체의 사상과 행동이 모두 그러한 항일투쟁 신념의 소산이었다. 의병에 투신한 이후 선생이 얼마나 철저하게 항일투쟁 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는지는 세 차례 개명(改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초명을 소응(昭應)이라 한 것은 스스로 명덕을 밝힌다(昭明德)는 뜻에서 취하였고, 중간에 이름을 바꾸어 의신(宜愼)이라 한 것은 마땅함을 일러 의라고(宜曰義) 한 뜻에서 취한 것이니, 초명이 이미 난세의 도회(韜晦)에 방해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직신(直愼)으로 개명한 것은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한다(敬以直內)에서의 직(直)으로 정한 것이니, 앞의 이름이 왜노(倭虜)와 음이 비슷한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선생이 초명인 소응(昭應)을 바꾼 것은 일제의 침략으로 야기된 시국의 난맥으로 인해 더 이상 이름의 명분을 견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중간에 고친 이름 의신(宜愼)을 다시 개명하여 직신(直愼)으로 한 것은 ‘왜노’와 음이 흡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름을 이처럼 두 번씩이나 고치게 된 것은 일제 침략에 기인하였으며, 나아가 이러한 상황은 일제와의 투쟁선상에서 수의(守義)의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나타난 결과였던 셈이다.
선생의 ‘수의’ 활동과 투쟁에서 유인석과 더불어 투쟁의 강도와 선명도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가 1898년 통화현의 오도구로 망명하였을 때였다. 이때 선생은 유인석과 함께 망명 동지들과 더불어 그해 여름 항일의지와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의체(義諦)」를 약정하였다.
만고의 화하(華夏) 일맥(一脈)이 추진(墜盡)된 나머지에 천신만고로 그 전형을 준보(準保)하여 화하의 회복을 기다림이 진실로 (우리) 마음이기에, 비록 하루 화하를 더하더라도 마는 것보다는 낫다. 이로써 심법(心法)을 지키는 법을 삼아 옛날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전수한 ‘분통을 참고 원한을 품은 채 서두르며 그만둘 수가 없다’는 ‘인통함원(忍痛含寃) 박부득이(迫不得已)’ 8자의 의미에 비기노라.
의병에 투신한 이래로 그때까지 천신만고를 겪어오면서도 이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항일의 신념을 갖고 있었는지 위 「의체」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일제와 투쟁하면서 살겠다는 강렬한 항일 신념이 투영되어 있다. 즉 선생을 비롯한 화서학파 거의(擧義) 인물들에게 ‘수의’는 곧 ‘항일’로 직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항일투쟁의 강도와 실상은 그만큼 처절하고도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었다.
선생은 1900년 말에 의화단의 난으로 인해 유인석과 함께 귀국한 뒤 다시 원주로 갔다. 이듬해 봄에는 두만(斗巒)으로 옮겨 외신대(畏哂臺)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다. 1903년 봄 무렵에는 다시 제천으로 이사하여 모정(茅亭), 남동막(南東幕) 등지를 거쳐 1905년 봄에 장담의 공전리(公田里)에 도착하여 비로소 정착하게 된다.
선생이 거처를 이처럼 자주 옮겼던 이유는 가난으로 인해 생계의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선생의 일가족이 겪은 경제적 고초는 눈물겨웠다. 여름에는 종이공장의 건조장에서 지내기도 하고, 겨울에는 움막 속에서 기거하였을 정도였다. 참판 유진필(兪鎭弼)과 참봉 정근원(鄭近源)이 양식을 원조해 주던 때도 바로 이 무렵이다. 또 일제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았는데, 1909년 봄에는 일진회원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청풍 장선리(長善里, 현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소재)의 어리곡(漁犁谷)으로 집을 옮기기도 하였으며, 1910년 병탄 직후에는 이 지역 항일의 기세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일경에 의해 청풍읍으로 끌려가 10여 일 간 감금당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장담에 정착하던 무렵 화서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존화양이 정신을 담은 자양영당(紫陽影堂)의 건립에 전력을 다하였다. 자양영당은 동문의 원조에 힘입어 1906년 봄 착공에 들어간 뒤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이때부터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제향을 거행하였다. 건립 초기 영당에는 주자,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등 4인의 영정만을 봉안하였으나, 그 뒤 유인석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1946년에는 선생 자신도 배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1911년 제2차 서간도 망명을 결행하였다. 경술국치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지체하지 않고 망명한 것이다. 회인현(懷仁縣) 대황구(大荒溝)에 정착하여 선묘(先廟)에 고한 다음과 같은 축문을 통해서 최후의 망명에 즈음한 선생의 의연한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각건대 지난해 맹추(孟秋)에 일본이 사악한 독으로 우리 조선을 삼켰으니 통원(慟寃)이 망극합니다. 직신(直愼)은 평생 학문을 공자와 주자로 종주를 삼았고 의리는 존화양이를 주로 하였으며 뜻은 종국(宗國)을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선왕의 법복(法服)과 조선(祖先)의 체발(體髮)과 선성(先聖)․선사(先師)가 세상에 드리운 대도(大道)는 죽더라도 힘써 지켜 감히 바꾸지 않을 것이며, 뒷날 천도(天道)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기회를 맞아 종국을 흥복(興復)토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곧 공자와 주자를 종주로 하는 존화양이의 의리를 철저하게 지켜 뒷날 일제가 패망할 때를 기다려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것이다. ‘수의’와 ‘독립’ 두 가지를 필생 과업으로 삼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15년 관전현(寬甸縣) 문화사(文華社) 만구(灣溝)로 거처를 옮긴 선생은 이곳에다 제천 자양영당에서부터 지니고 왔던 주자,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등 4인의 영정을 봉안하여 이국에서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1918년에는 유인석의 아들 유제함(柳濟咸) 등 고흥 유씨들이 살고 있던 관전현 천산사(泉山社) 전자구(甸子溝)로 가서 겨울을 지냈다. 이 무렵 선생은 우병렬(禹炳烈)을 비롯해 백삼규(白三圭), 박장호(朴長浩) 등 동문 후배들과의 불화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유인석의 처세 노선에 대해 반발하였던 우병렬에 대해서 선생은 “영원히 절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만큼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서간도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편성되어 동문들이 이에 대거 가담하게 되자, 이들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불편한 관계를 노정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유하현 삼원포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조직된 서간도의 대표적인 독립군단 가운데 하나였다. 이 단체는 의병계통의 민족운동자들이 서간도 이주 초기에 조직한 결사인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 등을 통합 확대하여 조직한 독립군단이었기 때문에 화서학파의 동문들이 여기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 군단의 총재로 선임된 박장호와 부총재 백삼규를 비롯해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부장 박치익(朴治翼),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등이 있었다.
선생은 이처럼 동문들이 대거 가담하여 편성한 대한독립단에 대해 매우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다. 1922년 2월(음) 선생이 봉황성(鳳凰城) 동대보(東大堡) 서산리(西山里)로 이주하였던 것도 대한독립단의 활동권역에서 벗어나려 한 데 있었다. 선생이 이처럼 대한독립단이나 이에 가담한 동문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된 이유나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도학자로서 그가 견지하였던 전통적 수구 노선에서 일탈한 것으로 판단한 데 있었다고 보인다. 나아가 선생이 최후까지 존화양이 사상에 입각한 도학적 자세를 철저하게 견지하고 있었던 사실은 1921년 70세 때 종신토록 처신의 준거로 삼기 위해 지은 「종신준적어(終身準的語)」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서 선생은 덕(德)과 경(敬)과 이(理) 등을 요체로 삼아 일생토록 도학적 수의생활을 견지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선생은 1927년 최후의 귀착지가 된 강평현(康平縣) 제7구(第七區) 민가둔(民家屯)으로 멀리 이거하였다. 노구를 이끌고 심양 북방 먼 외곽의 이곳까지 옮아가게 된 이유도 개화와 근대화의 물결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이곳이 수의 생활의 적지(適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수의적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한 채 이곳에서 1930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반장(返葬)되었다.
요컨대, 선생은 화서학파의 학문 요체인 춘추 대의적 존화양이 정신을 철저히 체인하여 평생 동안 이를 실천에 옮겼던 학자인 동시에 항일 독립투쟁가였다. 국내외를 무대로 한 선생의 기나긴 족적과 일체의 활동은 곧 항일독립과 민족자존의 구현을 위한 노력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