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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THE FIGHTING FOR
LENINGRAD
13장 레닌그라드 전투
The morning of September 10, 1941, was cool and overcast. At Moscow’s
Central Airfield, where I had come to board a plane for beleaguered Leningrad,
three figures loomed beside the plane on the take-off strip: one tall, that of
Lieutenant-General M. S. Khozin; the second a little shorter, that of MajorGeneral I. I. Fedyuninsky, and the third that of the flier who would pilot out
aircraft. The two generals, as I had arranged with Stalin, would fly with me.
1941년 9월 10일 아침은 쌀쌀하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내가 포위당한 레닌그라드행 비행기를 타러 온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이륙선의 비행기 옆에 세 명의 모습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키가 큰 한 사람은 코진 중장이고, 두번째 키가 조금 작은 한 명은 페두닌스키 소장이고, 세번째 사람은 비행기를 조종할 조종사였다. 두 명의 장군은, 내가 스탈린과 상의한 대로, 나와 함께 비행할 것이었다.
The pilot reported that his crew and plane were ready for take-off. As most
people do in such cases, all of us involuntarily raised our eyes to the sky, trying
to guess what the weather would be during our flight. The clouds hung dense
and low.
“We’ll slip by,” the pilot said smiling. “The weather couldn’t be better for
crossing the enemy lines.”
그 조종사는 승무원과 비행기가 이륙 준비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우에 하듯이,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향해 올려 보며 비행 중에 날씨가 어떨지 추측하려 했다. 구름은 짙고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슬쩍 지나갈 겁니다," 조종사가 웃으며 말했다. "적진을 통과하기에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We took off without delay. Leningrad was our destination, and we were
already there in our thoughts.
None of us, of course, could have foretold then that the city we were flying
to would put up a fight of unexampled heroism, resisting the enemy and hunger
for 900 days and nights.
우리는 지체 없이 이륙했다. 레닌그라드가 우리의 목적지였고, 우리의 머리속에선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물론 당시 우리들 중 누구도 우리가 날아 온 도시가 900일 밤낮으로 적과 굶주림에 저항하며 유례없는 영웅적인 전투을 벌일 것이라고 예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Leningrad is the cradle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t evokes warm feelings
in the hearts of all Soviet people. Here Lenin had led our Party, laying the
foundation of the world’s first socialist state. From the first days of Soviet
government, the city had played an exceedingly important part in our country’s
political, economic, and cultural development.
레닌그라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요람이다.
그것은 모든 소련 인민의 마음에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곳에서 레닌은 우리 당을 이끌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소련 정부의 첫 날부터, 이 도시는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Leningrad is a city of untold beauty. Its architectural masterpieces, the
paintings and sculptures collected there, the magnificent monuments, the
alluring gardens, parks and museums, are the pride of our country.
The Nazi Command attached exceptional importance to capturing this large
industrial centre and seaport Its seizure would have given Nazi Germany a
number of political, economic, and moral advantages.
레닌그라드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도시다. 그곳의 건축 걸작들, 그곳에 수집된 그림과 조들, 웅장한 기념물, 매혹적인 정원, 공원과 박물관은 우리나라의 자랑이다.
나치 사령부는 이 대규모 산업 중심지와 항구를 점령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곳을 점령햇다면 나치독일은 많은 정치, 경제, 도덕적 이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From the political and strategic point of view, capturing Leningrad and
making direct contact with the Finnish troops would tighten the fascist coalition
and prompt the governments of certain other, still hesitant, countries to go to war
against the Soviet Union.
정치와 전력적 관점에서, 레진그라드 점령과 핀란드군과의 직접적 접촉은 파시스트 연합을 강화하고 여전히 주저하는 다른 특정 국가들의 정부가 소련과 맞서 전쟁을 하도록 부추길 것이었다.
Swift seizure of Leningrad would have released additional German troops,
notably the panzer and motorized formations of the 4th Panzer Group, for
Operation Typhoon (code name of the Nazi attempt to capture Moscow).
신속히 레닌그라드를 점령했다면 추가 독일 부대 특히 제4기갑집단의 기갑부대와 기동부대를 독일군을 태풍 작전(나치가 모스크바를 점령하려는 시도의 암호명)에 투입했을 것이다.
On the moral and psychological plane, the fall of Leningrad would have
lifted the morale of the Nazi armies, the troops of satellite countries, the
population in Germany, and the people in other Axis countries, bolstering their
faith in the realism of Hitler’s war plans against the Soviet Union. For his
blitzkrieg had shown signs of foundering, gumming up the works for the German
Command. The excessively large losses on the Eastern front had already given
rise to serious doubts as to a swift German victory in the war.
도덕적, 심리적 측면에서, 레닌그라드의 몰락은 나치 군대, 위성 국가의 군대, 독일 국민, 그리고 다른 추축국 국민들의 사기를 고양하여 히틀러의 소련에 대한 전쟁 계획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을 북돋아 주었을 것이다. 그의 전격전이 허물어지는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 독일 사령부는 바보같은 짓을 했다. 동부 전선의 과도하게 큰 손실은 전쟁에서 독일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심각한 의심을 이미 불러일으켰다.
The loss of Leningrad would have gravely complicated our strategic
situation in all respects. If the city were to fall to the enemy and the German and
Finnish troops were to join up, we would have to build a new front to defend
Moscow from the north, and that would mean committing our strategic reserves
which the Stavka intended to defend the capital at its immediate approaches.
Besides, we would then inescapably lose our strong Baltic Fleet.
레닌그라드를 잃었으면 모든 면에서 우리의 전략적 상황이 심각하게 복잡해질 뻔햇다. 만약 그 도시가 적에게 함락되고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합류한다면, 우리는 북쪽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방어하기 위해 새로운 전선을 구축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스타프카가 수도를 즉각적인 접근으로부터 방어할 의도로 전략적 예비군을 투입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게다가, 그 다음 우리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강력한 발트 함대를 잃게 될 것이었다.
For the enemy, the capture of Leningrad meant that Army Group North and
the Finnish troops operating on the Karelian Isthmus would join with the Finnish
and German troops active in the region of the Svir river. Our communications
with Karelia and Murmansk would be cut. Cumulatively, this made the fighting
for Leningrad extremely tense and bitter.
적에게, 레닌그라드의 확보는 북부집단군과 카렐리야 지협에서 활동하는 핀란드군이 독일군이 스비르 강 지역에서 활동하는 핀란드군과 독일군과 합류하는 것을 의미했다. 카렐리야와 무르만스크 사이의 우리의 통신이 두절됐을 것이다. 점증적으로 이 때문에 레닌그라드 전투는 극도로 긴장되고 고통스럽게 됐다.
The Hitler Command had committed a large mass of troops, Army Group
North under Field Marshal von Leeb, to capture the Baltic republics and
Leningrad. And in July and August 1941 von Leeb had managed to capture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country round Leningrad.
히틀러 사령부는 발트해 공화국들과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 폰 리브 야전 원수 휘하의 북부집단군을 투입했다. 그리고 1941년 7월과 8월에 폰 리브는 레닌그라드 주변의 상당 부분을 점령해냈다.
Upon capturing Schlüsselburg on September 8, 1941, the enemy cut the last
of our overland communication lines. Leningrad was blockaded. Our line of
defence had come to rest along the western bank of the Neva. That broad and
deep river was a serious obstacle for the Nazis. But it had to be defended,
because crack German units had taken Schlüsselburg and thus emerged on the
shore of Lake Ladoga.
1941년 9월 8일, 슐뤼셀부르크를 점령한 후 적은 우리의 마지막 육로 통신선을 차단했다. 레닌그라드는 봉쇄되었다. 우리의 방어선은 네바강 서안을 따라 멈췄다. 그 넓고 깊은 강은 나치에게 심각한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방어해야 했는데, 독일정예부대가 슐뤼셀부르크를 점령하고 라도가 호숫가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Previously the enemy had pried away our 54th Army from the rest of the
Leningrad Front forces. But the 54th barred the Nazis from advancing further
east, and halted them along the Lipki-Rabochy Posyolok No. 8-Gaitolovo line.
From that time on, however, it was no longer subordinate to the Leningrad Front,
and took orders directly from the Supreme Command.
이전에 적은 레닌그라드 전선의 나머지 병력으로 우리 54군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54군은 나치가 동쪽으로 더 진격하는 것을 막고, 립키-라보치 포술록 8번-가이톨로보 선을 따라 그들을 저지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더 이상 레닌그라드 전선에 종속되지 않았고, 최고 사령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
The Leningrad Front’s 8th Army, which had earlier fought in Estonia, rolled
back after heavy fighting and entrenched itself along a line running from
Peterhof south of Ust-Ruditsa to the Gulf of Finland in the vicinity of Kernovo.
The Army’s overland communications with Leningrad were now cut; it
maintained contact with the city by sea and air only.
일찌기 에스토니아에서 싸웠던 레닌그라드 전선의 제8군은 격전 끝에 퇴각해 우스트-루디차 남쪽의 페테르호프부터 케르노보 인근의 핀란드만에 이르는 전선을 따라 참호를 팠다.
레닌그라드 육군의 육로 통신은 이제 차단되었고, 바다와 항공으로만 도시와 연락을 유지했다.
On the Karelian Isthmus, Finnish troops had emerged on the old national
border and tried to advance further, but were halted. Now they were waiting for
a favourable chance to lunge at Leningrad from the north.
카렐리야 지협에서 핀란드군은 옛 국경지대에 나타났고 더 진격을 시도했지만 저지당했다. 이제 그들은 북쪽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진할 유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As of September 8, Leningrad’s position became exceedingly precarious. Its
communications with the rest of the country now ran across Lake Ladoga only,
or by air under cover of fighter planes. The Nazis had begun bombing and
shelling the city. The attacks were merciless and barbaric The enemy was
battering away at the city from all sides. A large mass of panzer and motorized
troops had crashed through to the approaches of Uritsk, the Pulkovo Heights and
Slutsk. There was every evidence that the enemy was taking up positions for a
final assault.
9월 8일 현재 레닌그라드의 위치는 극도로 위태로워졌다. 이제 레닌그라드의 다른 지역과의 통신은 라도가 호수를 가로지르거나 전투기의 엄호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나치는 도시를 폭격하고 포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무자비하고 야만적이었다. 적은 사방에서 도시를 난타하고 있었다. 대규모의 기갑부대와 기동부대가 우리츠크, 풀코보 고지, 슬러츠크 부근으로 돌진했다. 적이 최후의 공격을 위해 진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모든 증거가 있었다.
The situation grew tenser each day.
…From Moscow to Lake Ladoga our plane was favoured by “suitable”
weather. Enemy fighters, thwarted by the rain and low clouds, stayed on the
ground, and we got along beautifully without an escort. But as we came to Lake
Ladoga the weather improved, and we had to summon a flight of fighters.
상황은 나날이 긴장이 고조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라도가 호수까지 우리 비행기는 "적절한" 날씨 덕을 보았다. 적 전투기들은 비와 낮은 구름에 방해받아 지상에 머물렀고, 우리는 호위 없이 아름답게 잘 해냈다. 하지만 우리가 라도가 호수에 도착하자 날씨가 좋아졌고, 우리는 전투기 편대를 소환해야만 했다.
We
flew low over the water, pursued by two Messerschmitts. After a short while, we
landed safely on the city’s army airfield, but since we were in a hurry to get to
Smolny, where the Headquarters of the Front was located, there was no time to
find out why our air cover had not driven off the enemy planes.
우리는 두 기의 메서슈미트의 추격을 받으며 물 위를 낮게 날았다. 잠시 후 우리는 무사히 도시의 군사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전선본부가 있는 스몰니에 가기 위해 서두르다 보니 왜 우리의 항공기 엄호가 적기를 몰아내지 않았는지 알아낼 시간이 없었다.
At the gates to the Smolny we were stopped by the guard, which ordered us
to show our passes. None of us had any, of course, and I identified myself. But
that did not help. Orders are orders in the army and no one was to pass without
authority.
“You’ll have to wait a little, Comrade General”, the guard said to me and
called for the duty officer. We had to wait for nearly 15 minutes until the
commandant issued a personal permit for us.
스몰니 관문에서 우리는 경비병에게 제지당했고, 경비병은 우리에게 통행증을 보여달라고 명령했다. 물론 우리 중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는 내 신분을 밝혔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군에서 명령은 명령이고, 아무도 권한 없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장군 동지 ." 경비병이 나에게 말을 하고 당직사관을 불렀다. 지휘관이 우리에게 개인 허가서를 발급할 때까지 15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At the entrance to the Smolny we were met by an aide of the Front
Commander.
“Where is Comrade Voroshilov?” I asked.
The aide said he was presiding at a conference of the Front’s Military
Council attended by some of the commanders of armies and chiefs of arms of the
service, as well as the Commander of the Baltic Fleet and directors of important
city enterprises.
스몰니 입구에서 우리는 전선 사령관의 부관을 만났다.
"보로실로프 동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 부관은 말하길 그는 발트해 함대 사령관과 주요 도시 기업의 중역뿐만 아니라 군 사령관과 무기 책임자 중 일부가 참석한 전선 군사 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고 했다.
We went up a flight of stairs to the Front Commander’s room, and on
entering it saw about a dozen people seated round a red-cloth-covered table. I
asked Voroshilov and Zhdanov for permission to attend, and a short while later
handed Voroshilov a note from Stalin. Not without trepidation, I must confess.
The Marshal read the note in silence, nodded his head, gave the note to Zhdanov,
and got on with the conference.
우리는 이어진 계단을 따라 전방 사령관의 방으로 올라갔고, 그 방에 들어서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붉은 천으로 덮인 탁자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보로실로프와 즈다노프에게 참석 허락을 요청했고, 얼마 후 보로실로프에게 스탈린이 보낸 쪽지를 건넸다.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고, 고백해야겠다.
원수는 조용히 쪽지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즈다노프에게 쪽지를 건네고 회의를 계속했다.
The Front’s Military Council was discussing what to do if the city could no
longer be held. People made curt, dry statements. The key military and industrial
targets, and so on, were to be destroyed. Today, more than 30 years later, all this
sounds incredible, but at that time the situation was critical, though a few
reserves were still untapped. Discussion ended with a unanimous expression of
resolve to defend Leningrad to the last drop of blood.
전선의 군사 위원회는 만약 이 도시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건조한 발언을 했다. 주요 군사, 산업 목표물 등은 파괴될 것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 모든 것이 믿기 어렵게 들리겠만, 몇몇 예비부대는 아직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논의는 레닌그라드를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지키겠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표명하며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