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472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천주교를 대변하는 대성당이다. 이곳은 성당이 지닌 종교적·건축적 가치와 함께 우리 현대사가 요동치던 고비마다 지성과 양심의 보루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해온 시대사적 의미 또한 높은 곳이다. 지금도 사람의왕래가 빈번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명례방(明禮坊)에 속해 있었다. 명례방은 천주교가 유입된이후 신도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일 뿐 아니라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던 곳이다. 또 1830년(순조 30) 이후에는 선교사들의 비밀 선교활동의 중심지였으며, 1845년(헌종 11)에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명동성당 전경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대성당이다. 종교적·건축적 가치뿐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고비마다 지성과 양심의 보루로서 그 사회적 책무를 다해온 시대사적으로도 의미 깊은 곳이다.
천주교 조선교구는 이런 연유로 1883년(고종 20)에 명례방 언덕의 일부, 지금의 명동성당 일대를 매입하였다. 매입 당시 이곳은 판서를 지낸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집이 있었다. 윤정현은 추사 김정희가 부탁받은 지 30년 만에 써주었다는 그 유명한 서예작품 〈침계〉의 주인공이다. 그의 집은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87년(고종 24)에 본격적으로 성당 신축을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조선 정부는 천주교 측에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한다. 그 까닭은 이곳이 지금의 중구 저동에 있었던 조선 열왕(列王)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의 주맥에 해당한다는 풍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명례방 언덕에서는 궁궐은 물론 도성 안이 훤히 내려다보였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편치 않을 판에 그 자리에 궁궐보다 더 높은 건물이 세워진다는 것은 분명 불경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에 신축된 성당 건물은 모두 한결같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종교적 위상이나 서양 건축의 입지적 특성을 이해한다 해도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프랑스 공사관의 노력으로 이 사태는 결국 1890년에 천주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공사는 재개되어 그해에 주교관이 먼저 건립되었다.
명동성당의 옛 모습처음 건물이 세워질 당시에는 궁궐은 물론 도성 안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너무 위압적이라 하여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성당은 1892년(고종 29) 8월 정초식을 갖고 1898년(광무 2) 5월이 되어서야 완공을 본다. 설계자는 약현성당과 용산신학교를 설계한 코스트 신부이며 시공에 참여했던 인부들 또한 중국인이었다. 만 6년에 걸쳐 공사가 지연된 까닭은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라는 사회불안으로 벽돌공으로 일했던 대부분의 중국인이 본국으로 철수해버렸기 때문이며, 또 자금난과 벽돌의 수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벽돌은 용산방의 와서현(瓦署峴, 구 용산성심병원 서남쪽 언덕)에서 공급되었으며, 90여 종에 이르는 이형벽돌 대부분이 이곳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공사 지연의 또 다른 이유로는 1896년 2월에 설계자인 코스트 신부가 별세했기 때문이다. 코스트 신부의 별세 후에는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위돌 박(Uictor Loyis Poisnel, 박도행) 신부가 감독을 맡음으로써 어렵게 완공을 보게 된다. 위돌 박 신부는 1913년에 명동성당의 여학교(지금의 계성여중고)를 건립한 인물이기도 하며 코스트 신부 이후에 많은 천주교 건물을 설계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명동성당 건물은 총 길이 68.25m, 폭 29.02m, 건물 높이 23.43m, 십자가를 제외한 종탑 높이 46.70m의 웅장한 규모로 공사비가 6만 달러, 한화로 150만 냥1)이 투입된 대공사였다. 현재 이 일대에는 성당 건물뿐 아니라 성당을 중심으로 여학교와 가톨릭회관(전 성모병원)·주교관·사제관·수녀원·문화관·교육관·별관이 붉은 벽돌과 화강석을 이용한 프랑스 고딕풍으로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이 건물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그 가운데 성당의 서쪽에 있는 주교관은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88년 7월 착공하여 1890년 준공된 건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다.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단순한 외관을 지닌 이 건물은 1979년에 새 주교관이 건립되면서 개수를 거쳐 현재 사도회관(使徒會館)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주교관명동성당보다 8년 빠른 1890년에 준공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다. 그러나 근래 새 주교관이 건립되면서 처음과 달리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성당은 진입로에서 약 13m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설수록 높고 웅장하게 느껴지며 건물이 지닌 고풍스런 멋도 돋보인다. 잿빛과 붉은빛의 다양한 이형벽돌로 이루어진 고딕식의 성당 건물은 도심을 잠식하고 있는 차갑고 거대한 현대 건축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조각적 아름다움과 이국의 정취를 성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고딕식 평면 형식인 라틴 십자형을 하고 있으며 북서쪽에 주 출입구를 내었고 남동쪽에 앱스를 두었다. 내부에는 중앙부(nave, 신도석부)2)와 양측부(aisle, 통로부)3), 십자 돌출부(transept), 성단(聖壇, chancel)4), 앱스를 두었으며 앱스 주위에는 머리회랑(ambulatory)을 두고 이 밑으로는 지하성당을 갖추고 있다. 건물 정면 중앙 주 출입구의 창과 개구부는 고딕풍의 뾰족아치로 장식했으며, 창 윗부분은 판격자(板格子, plate tracery)와 유사하게 처리되었고 그 위로 종탑이 연결돼 있다. 네 부분으로 구성된 종탑의 구조는 아래가 전실(前室, narthex) 구실을 하면서 삼면이 개방된 포치(porch) 형태의 현관부, 파이프 오르간실과 시계실로 이루어진 탑신부, 종루부, 그리고 그 위쪽의 뾰족탑부(spire)로 이루어졌다. 뾰족탑부는 다시 박공·아치·작은 뾰족탑 등 다양한 고딕적 요소로 구성되어 풍부한 장식 효과를 내고 있다.
건축 당시 내부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인조석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타일로 교체된 상태이고, 벽체와 기둥은 벽돌 조적조이다. 주요 구조부인 지붕 트러스(truss)5)와 종탑의 종축 지지구조, 뾰족탑 구조 등은 나무구조이다. 또한 지붕은 함석이었던 것을 동판으로 교체했으며 대리석의 주제대(主祭臺)와 벽돌조 부제대(副祭臺)는 별도로 제작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 벽체는 횡단아치 한 개로 지지되는 1층 아케이드, 네 개의 뽀족아치가 연속된 2층의 어두운 공중회랑(triforium), 그리고 두 개의 아치창과 하나의 원형창으로 구성된 고창(高窓, clearstory)을 모두 갖춰 벽면의 3층 구성이라는 고딕 건축의 원리를 충실히 따랐다. 천장은 목재에 의한 고딕식 리브 볼트(ribbed vault)6)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고딕식 구조로 깊고 높아 웅장함이 느껴지며, 예배 공간을 밝히는 빛이 위에서 은은하게 내리는 듯한 효과로 인하여 장엄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정면 중앙 제대에는 성모 마리아가 모셔져 있고, 그 좌우의 작은 제대에는 예수 성심상과 분도 성인상이 있다. 왼쪽의 예수 성심상은 천주교 전파 초기에 온갖 박해와 시련을 이겨내며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고, 오른쪽의 분도 성인상은 성당 건립 때부터 성당 건축공사를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모신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다양한 모습의 사도들 초상과 79성인화가 장식돼 있으며, 지하성당과 지하묘소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가 이 땅에 뿌리내린 박해와 복음의 상징이며, 고딕 건축의 성당 규범을 충실하게 적용하여 세워진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 또한 높은 곳이다. 1970년대 초 벽체 겉에 페인트를 칠한 것이 벽돌의 풍화를 촉진시키는 바람에 다시 칠을 벗겨내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몇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며 원형을 많이 잃기도 했지만 이곳은 여전히 견고한 권위를 깊은 장엄으로 승화시키며 한국 천주교 대성당으로서의 격을 지켜가고 있다. 공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교회’로 사적 제258호이다[검색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