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6일(금) 이사야 17:1-14 찬송 449장
1.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2.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할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3.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5.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마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6.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8.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9.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0.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11.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12.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
13. 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14.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 (개역 개정)
- 다메섹 · 사마리아의 멸망과 앗수르 군대의 멸절 예언 -
1-3절은 이방 국가 10개국에 대한 심판 예언 중 다섯 번째인
아람의 수도 다메섹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수도 다메섹을 비롯하여
아람의 모든 성읍들과 백성들이 멸절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다메섹의 멸망 예언은 이미 제7, 8장에서 주어진 바 있으나
그곳에서는 남유다의 구원과 보호에 대한 약속의 내용으로 언급하였던 것이며,
여기서는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영’(14:26)을 계시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번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다메섹이 멸망의 심판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북이스라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7:1; 왕하16:5; 대하28:5-6)
아모스 선지자는 다메섹의 사람들이 매우 잔인했음을 말한다.(암1:3-5)
한편 다메섹 멸망 예언은 B.C.732년 경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가 다메섹을 함락시킴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상업의 중심지로 매우 번창했던 다메섹은
다시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한 채 지금은 일개 지방 도시로 남아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흥망 성쇠는 오직 절대 주권자이신 여호와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단2:21)과 이 세상 나라의 영화는 실로 헛되며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호9:11; 슥11:3; 벧전1:24)
그리고 4-11절은 사마리아 곧 북이스라엘의 멸망 예언이다.
이는 이미 9:8-21에서 주어졌었다.
그곳에서는 거듭된 하나님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교만과 패역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한 반면,
본문에서는 동맹국 다메섹 멸망 예언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결국 멸망하게 될
이방 국가를 의지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우상을 섬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멸망케됨을 예언한다.
그런데 이사야는 국가로서의 북이스라엘은 이방 국가와 동맹을 맺어
세속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필히 멸망할 것이나(9-11절)
그 백성은 한번 택하신 선민이므로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의인들과 같은(왕하19:18) 소수의 의인들이
반드시 여호와께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을 것이라고 예언한다.(6-8절)
이러한 예언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은 비록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그 범죄에 대해서 만큼은 반드시 징계하신다는 사실과,
한번 택한 백성은 징계 중이라도 결코 완전 멸절시키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지극히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롬11:1-2, 히13:5)
그리고 12-14절에서는 이방 국가 다메섹을 의지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4-11절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저버리고 이방 국가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가를 교훈할 목적으로
당대에 근동의 세계를 휩쓸던 막강한 앗수르 군대 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허망하게 멸절될 것임을 애가의 형식으로 예언한다.
그리고 이 예언은 B.C.701년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산헤립 군대의 멸절로 성취되었다.(왕하18:17; 19:35-37)
12절 초두에서 ’슬프다‘라는 선지자의 탄식은
멸절된 앗수르 군대의 입장에서 한 것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그렇게 막강하던 앗수르 군대도
권능의 하나님 앞에서는 허망할 뿐이며,
나아가 이 세상의 권력이라는 것이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항상 이렇게 허망할 수밖에 없음을 교훈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은 당시 앗수르만을 의지하여
국가의 위기를 면해보려 했던 남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그들을 의지할 때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이스라엘과 동일하게
비참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7-8절)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이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우상 숭배를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역으로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우상 숭배이다.
즉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의 자손들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들이 이처럼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된 것은 나라의 시초,
즉 개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윗 왕가로부터 북이스라엘을 분리 독립시킨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갈 경우
민심이 다윗 왕가로 기울 것을 두려워하여 특단의 종교 정책을 시행한다.
그것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그것을 여호와라 하며 백성들에게 숭배하게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금송아지 외에도
점차 이방의 우상들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아합왕 시대에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공식화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이처럼 이방의 우상들을 도입하여 숭배한 데에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숭배 정책을 취한 것과 동일하게 정치적 목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방 나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함이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고 참된 신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통하여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호와 종교만을 인정하고 다른 이방 종교나 신을 부정하게 될 경우
북이스라엘은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즉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들을 모두 적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였다.
북이스라엘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북이스라엘이 바른 여호와 신앙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면
세상에서 고립된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들을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를 세우면서부터 이미 바른 신앙에서 떠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결국 세상에서 고립되고 주변 나라들이 모두 자신들의 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방의 우상을 도입하여 숭배함으로써
그들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같은 신을 숭배한다는 것은
곧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어려움과 위기에 처할 경우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변질된 신앙 형태,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한 바는 오늘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홀로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따라 삶을 살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피하기 어렵고,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다.
적당히 세상 사람들의 그릇된 행습을 본받기도 하고,
적당히 세상 사람들의 그룻된 신앙에 동조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세상과 동화되어 나간다면 그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세상에서는 약간의 눈에 보이는 도움을 얻겠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에서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처음부터 세상 사람들과 다른 차원의 삶,
곧 천국을 소망하며 바라고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아울러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은 받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친히 지키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신다.
우리는 이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세상 죄악, 유혹하며 미혹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모든 헛된 것, 악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눈과 귀를 보전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