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15
1월26일[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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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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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Klw94uXFXo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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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짧고 간략하게 강론하시는 예수님!>
사제가 된 후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본당에 가서 처음으로 강론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름 감동적인 강론을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는지 모릅니다. A4지 한 장 정도의 짧은 강론을 며칠에 걸쳐 준비했고, 그걸 또 거울을 보고 수십 번도 더 예행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첫 강론을 하시는데, 아마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요즘 미사 때마다 강론 전에는 성경 말씀이 먼저 선포되듯이, 예수님께서도 강론을 하시기 전에 한 성경 구절을 찾으셔서 읽으셨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 1-2)
한 문장 한 문장, 글자 한자 한자가 다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봉독하심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공생활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명확히 밝혀주신 것입니다.
회당 안에 있던 청중들은 이제 성경 말씀이 선포되었으니, 길고도 장황한 강론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론은 딱 한 마디였습니다. 3초밖에 안 걸렸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공생활을 하신다 해도, 절대로 강론 길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만, 촌철살인의 한 말씀만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이 당신을 통해, 당신 안에서 성취됨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성취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계심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종말론적인 예언자요 하느님으로부터 도유된 분 곧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구원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해, 그분에게 흡족한 해, 주님의 은혜로운 해, 희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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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HzEbCaxV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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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본질: 유산 상속자를 가려내는 조건>
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가 예언된 이사야서를 찾아 읽으시고는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온 삶은 아버지로부터 예언된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라이언 벨 목사는 ‘말씀만으로’라는 개신교의 가르침대로 말씀과 기도를 삶으로 사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도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하느님 없이 살아보기로 결심합니다. 1년 동안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선언합니다.
성경 말씀을 매일 읽고 그 말씀으로 설교도 하던 사람이 왜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말씀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현하려 하지 않고 해석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해석은 자녀의 말을 부모가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아기가 울면 아기의 울음을 부모는 해석합니다. 배고파서 우는지, 싸서 우는지, 아파서 우는지. 그러나 아기는 부모의 말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학교 가라고 하면 그 말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냥 가면 됩니다. 그래야 자녀입니다.
영화 ‘프루프’는 아버지에 대한 두 딸의 시선이 그려집니다. 동생 캐서린은 비록 정신질환인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5년 동안 수학에만 미쳐있는 아버지를 돌봤습니다. 반면 언니 클레어는 아버지를 잘 몰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돈을 버는 데 바빴기 때문입니다. 캐서린은 아버지가 훌륭한 수학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수학을 배우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캐서린은 아버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동안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단지 미친 사람이 아닌 위대한 수학자였음을 드러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을 통해 실현하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쓸모없어 보이는 땅을 유산으로 남깁니다. 그리고 그 땅에 보물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해석해버리고 맙니다. 아버지가 미쳐서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결론 내립니다. 쓸모없는 땅을 팔아서 술을 마십니다.
반면 다른 아들은 그럴 수 없다고 믿고 끝까지 파헤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이 건강해집니다. 혹시 이것이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땅을 파다 보니 땅이 기름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씨를 뿌렸더니 다른 밭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어 아버지의 예언이 옳았음을 증명합니다. 이것이 유산을 받을 자격을 말씀을 성취하며 증명하는 자녀의 자세입니다.
저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읽어도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십일조가 아닐까?’라는 생각하고는 가톨릭에서는 이미 말하고 있지 않은 십일조를 혼자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신학생 때부터 돈이 부족한 적이 없습니다. 신학생 때 유학 가면 1년에 책 사라고 용돈을 3,000달러를 받는데, 저는 1,000달러가 없어져도 없어진 줄 몰랐습니다. 돈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아버지로 체험하고 또 하느님 자녀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증거가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최고의 선물’(2006)에서는 엄청난 부자인 할아버지가 망나니 손자에게 유산을 남기기 위해 12가지 임무를 부여합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보라는 것, 진정한 친구를 사귀라는 것 등입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보니 돈의 소중함을 알겠고, 친구를 사귀어보니 돈이 친구를 위해 쓰일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의 모든 유산을 몸이 아픈 친구를 위해 씁니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사실 더 있었습니다. 손자가 그 유산을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쓸 때 더 주도록 해 놓았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예언입니다. 성취하여 상속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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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002년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사목국에는 여러 부서가 있었습니다. ‘선교 전례, 교육, 가정, 복음화, 직장, 레지오, 기획 행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구의 사목국에서 일하였지만, 정확하게 우리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사목국장 신부님과 2박 3일 연수를 가면서 우리는 부서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각 부서를 사람의 몸과 비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기획 행정은 머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교구의 사목이 어떤 방향이었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교육 담당이었습니다. 저는 교육은 심장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이 신선한 ‘피’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어야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공급할 때, 교구와 본당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과 레지오는 발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선교 전례는 뼈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뼈가 있어서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정과 선교 전례는 교회를 지탱하는 뼈와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는 눈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화를 통해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2박 3일 동안 연수를 통해서 각 부서의 역할과 기능을 고민했고, 우리는 교구 사목국이라는 몸의 지체로 기쁘게 일하였습니다.
2025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자동차’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사제는 ‘핸들’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구장으로부터 권한과 책무를 받은 사제는 교회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먼지와 빗물을 닦아내는 ‘와이퍼’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자는 가난, 정결, 순종의 와이퍼로 교회의 유리에 붙어있는 권위, 욕망, 시기의 먼지를 닦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목회는 ‘엔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목회에서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재정평의회는 ‘기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듯이, 재정평의회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은 ‘의자’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새로 온 신자들에게 구역과 반을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신심 단체는 ‘바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심 단체의 카리스마와 영성으로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쉬는 분들과 아픈 분들은 트렁크 아래 있는 ‘스페어타이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본당에서 잘 볼 수는 없지만 그분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퀴에 문제가 생기면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듯이, 쉬는 분들과 아픈 분들이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공동체에서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른다면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몸과 지체’로 설명하곤 합니다. 우리의 몸은 인격과 정신이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체들이 원활한 활동을 하도록 산소, 영양분, 물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느끼고, 만지고, 걸을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통합된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손, 예수님의 입, 예수님의 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받아야 할 영양분은 예수님의 말씀, 삶, 표징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다운 통찰입니다. 중국의 한 대나무는 심으면 7년 동안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8년째 되면 크게 자란다고 합니다. 7년의 세월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7년의 세월은 성장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준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게 됩니다. ‘건강, 가족들의 사랑, 친절, 자선’과 같은 것들의 성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균형 잡힌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고 있고, 그런 균형 잡힌 삶은 말씀에 충실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에 앞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읽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해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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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루카 복음서 서문에 나오는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이름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모든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적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 모두 진실임을 선포하고자 한 것이지요.
사실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실재가 있었지요. 다음으로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한 복음 선포가 이어집니다. 그러다 점차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여러 단편적인 구두 전승을 모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님을 길이 전하기 위해서지요.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복음서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 선언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아시요 구세주이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이들과 눈먼 이들, 무엇인가에 붙잡혀 묶이고 억압받던 이들이 구원과 해방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그래서 많은 이가 주님의 은혜로움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를 보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위인들에게서 하느님의 율법을 듣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율법이 참되다고 고백합니다. 모진 고생을 통하여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직 구약과 신약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오늘도 겸손과 신뢰의 마음으로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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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4; 4,14-2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 말씀을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 실천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구원적 삶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나에게 있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서는 에즈라가 바빌론 귀양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말씀, 법은 공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어서고, 손을 쳐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여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주일 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은 에즈라로부터 하느님의 법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느헤미야 8,9) 즉, 하느님의 법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회개를 일으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후회와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들음으로써 공동체가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확실한 신앙으로 전달되지 못했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서문(1,1-4)과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 회당에서 있었던 일(4,14-21)로 되어있다. 그러나 복음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신앙심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예를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은총의 말씀”(4,22절)에 놀라면서도 그분 앞에서 취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인 것, 예를 들면, “요셉의 아들”(4,22절)보다 그분 안에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사실을 알아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사가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전하고 해석하면서 독자들을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가고자 한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 혹은 그 어머니를 아는 것으로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이다. 이것을 복음사가는 의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읽으신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이 내용은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해방과 하느님 구원의 약속을 전한 내용으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성서를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시어 그 내용을 설명하시는 말씀에서 제기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절) 이 말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예언의 말씀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인 요셉의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언자의 메시아 활동이 바로 그 순간 즉, 오늘 이루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써 가르치시고 구원업적을 이루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해방이다. 그 해방은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방, 육체적, 영적 시력상실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 죄악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져오신 분이다. 그분은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구원자로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신앙으로서만 가능하다. 나자렛의 한 목수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옛날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 규범, 법이 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 그 오늘은 매일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성경 말씀을 당신의 가르치심과 행동으로 이루셨다. 그럼으로써 이사야를 만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이 성경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었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거니는, 여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인체를 들어 설명하면서 각자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지체는 서로가 조화를 이루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올바로 성장할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몸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로서 제 일에 충실하며 지체 간에 진정한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 사이에 서로 불화를 야기하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옛날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그 형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말씀 앞에 그 말씀이 오늘, 여기서 나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은 올바른 성사 생활, 또 전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규범인 삶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한 몸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성찰해 보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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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없이는 해방도 없고, 자유도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1)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마르 1,15) 그 선포는 곧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구원’은 온갖 억압에서 해방됨으로써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행복입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것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 즉 ‘용서’와 ‘영원한 생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완전한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2) ‘자유’는 해방의 결과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또 예수님에 의해서 해방된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산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착각일 뿐이고, ‘잃은 양’의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이고, 정처 없는 유랑이고, 방황입니다. 그러니 목자에게서 떨어져 나간 ‘잃은 양’에게는 ‘참 자유’가 없습니다.
요한 사도가 서간문에서 강조한 ‘사랑의 완성’을, ‘자유의 완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6-18) 참되고 완전한 자유는, 완성된 사랑과 하나입니다. 사랑 실천을 완성해서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된 상태가 곧 완전하고 참된 자유를 누리는 상태입니다.
3)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자유를 얻으려면, 우리 쪽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나는 이미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라고 큰소리친다면, 그러면서 자기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 텐데, 그러다가 결국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 부자는 이쪽 세상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마음껏 하면서 살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한 방울의 물도 자기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처지로 떨어집니다(루카 16,24) 절망과 후회만 남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자기들은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요한 8,3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아버지의 집은, 즉 하느님 나라는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노력이 바로 ‘회개’입니다.
자기는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없고, 참되고 영원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 없이는 자유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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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송병철 야고보 신부님]
<말씀살기>
명절이 다가오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 친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느끼는 행복이나 고통만큼 이웃들에게 눈을 돌리게 됩니다. 멀리는 지구상 어디인가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가까이는.행복을 느낄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오늘을 해외 원조 주일과 하느님 말씀 주일로 선정한 이유는 우리 모두 실천적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불과 오래지 않은 과거에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고, 그때 누군가의 도움으로 희망을 안고 다시 일어나 지금의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도 함께해야 한다는 거룩한 의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은 온갖 고통 속에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는지를 전해줍니다. 그들은 지난날의 불충함을 깨달았고 삶이 하느님 말씀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을 다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초대에 응답합니다.
2독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온 몸인 교회 안에서 기여할 소명을 받았으며 각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한 사람도 쓸모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은혜로운 해” 를 선포합니다. 참된 해방자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자리가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삶의 자리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참된 해방과 희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신자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삶이 너무 고달프고, 자신이 안고 살아가는 걱정덩어리가 너무 커서 늘 울면서 고통스럽게 살았답니다. 그럴 때는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 위에 먼지 쌓인 성서책이 있길래 무심코 펼쳐 보았더니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그때 세상 걱정을 끌어안고 살아온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걱정거리를 주님께 맡기고 살게 되었고 이제는 행복하다고 고백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답은 성서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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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근범 레오 신부님]
<진실의 시선>
우리 삶의 밑바탕에는 진실이 숨 쉬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진실입니다. 요식 행위가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데 불가분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간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입니다. 그러므로 큰 용기와 선택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희생 하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희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통해 신뢰를 쌓고 평화를 얻습니다. 나아가 자아 성찰과 자존감을 높이게 합니다.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의 길을 모색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부터 솔직해져야 합니다. 진실로부터 깨달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합시다. 자그마한 변화로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합니다. 무엇보다 진실은 사랑과 함께할 때 그 효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집니다. 곧 진실은 사랑과 책임감으로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전해 준 하느님의 말씀이 진실임을 알게 하는 것’(루카 1,2-4 참조)이 사명이라고 일러줍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는 말씀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십니다. 진실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진실은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면서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진실을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도우며 살기를 권고합니다. 진실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뜻을 모아 고통을 겪는 모든 이를 위하여 더불어 가진 것을 나누고 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인 복음의 빛 안에서 친절과 배려로 서로 화목하고 평화로이 지낼 수 있는 지금이기를 전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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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안승태 요셉 신부님]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이번 주 미사 전례의 독서는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제1독서 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 사제요 율법 학자인 에즈라가 모세의 율법을 엄숙하게 낭독하는 내용인데, 온 백성이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며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다고 전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한 구절을 읽으시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의 영이 내리시어,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신(루카 4,18-19 참조) 그 사명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주님의 성령이 그분 위에 내리셨기에 당신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25년 정기 희년을 선포하시며,.“모든 이에게 이 희년이 우리 구원의 ‘문’(요한 10,7.9 참조)이신 주 예수님과 참되고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때가 되기를 빕니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가시적 표지’인성사 안에서 이러한 만남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께서는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에서 이러한 ‘말씀의 성사적 성격’을 강조하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례에서 선포된 말씀 안에도 현존하십니다.”(56항)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성체 앞에 머무르면서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현존과 사랑,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총을 안고 세상에 파견되어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에 관한 제2독서 코린토 1서의 말씀은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친교를 함께 나누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을 지내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자유와 기쁨을 나누며 은혜롭고 거룩한 희년, 성년을 지낼 수 있는 은총을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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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바오로의 오른팔 티모테오, 비서 티토, 그리고 여러분은 명상의 집의 사랑의 가족>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머무는 곳에서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음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평화를 전해 주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는 지금 내 맘에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십니까? 지금 나의 마음에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내 안에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 맘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여러분은 명상의 집의 가족"라는 주제로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오늘도 재미난 이야기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박과 내기를 좋아하기로 소문난 보좌신부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를 불러 타이르고자 주교님이 불렀습니다.
"신부님은 어떤 것을 잘 하십니까?"
"내기라면 자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교님의 발등에 화상자국이 있으신 거 같은데 거기에 만 원을 걸겠습니다."
발등에 화상을 입은 일이 없는 주교님은 그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양말을 벗고 자국이 없음을 보여준 뒤 만 원을 받았습니다. 내기에 진 보좌신부는 뜻밖에도 싱글거리며 전화를 걸더니..
"본당 신부님요, 십만 원 준비해 놓으시소. 주교님이 양말 벗었심더~~^^"
보좌 신부님은 본당신부님과 주교님을 만나면 양말을 벗게 하겠다고 내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기에서 이겨, 비록 주교님께 만원을 잃었지만 9만원을 딴 셈이 된 것입니다. 보좌 신부님의 내기 하는 버릇을 고치려 했다 주교님도 내기에 빠지게 되었네요.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에는 교황님, 주교님, 신부님, 부제, 평신도 등 교계 제도라는 것이 있어왔습니다. 이것을 직무적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수도자는 원래 교계 제도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수도 교부들은 수도자들은 교계제도를 오히려 멀리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뽑으셨기 때문에 12명의 제자의 안수를 통해 이 교계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주교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리자이고 사제들은 주교님을 통해 그 권한을 대행하는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수녀님을 만났는데, “저는 사제가 나이가 많든 적든, 영적으로 뛰어나든 그렇지 않든, 학식이 풍부하든 그렇지 않든, 사목이나 강론을 잘하든 못하든, 사제 그 자체로 존중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을 먹여 살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해 주셔서,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사제들을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마음이 들만큼 제자들의 어려움이 눈 앞에 선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외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가는 곳에 주님의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십니다. 아픈 이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사제로 인해 공동체의 평화가 깨어지고, 수도자로 인해 공동체의 기쁨이 사라지고 서로 불신과 미움으로 지내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제나 수도자 때문에 상처받아 힘들다고 저에게 찾아 오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사제나 수도자 개인의 인성의 문제인데,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교회 전체를 삐뚤게 보는 미성숙한 이들도 보게 됩니다. 사제는 교우들의 영혼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인데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본당의 수도자들은 사제를 도와 교우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생겨 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우리의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째, 교회의 교계 제도는 직무로서의 역할이지 은총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비유처럼 우리 몸의 각 지체가 그 기능을 하듯 사제와 수도자들도 그리스도를 몸으로 하는 그 기능과 역할의 일부일 뿐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여정 중에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은 서품과 서원을 통해 축성된 이들이지만 완성된 이들이 아닙니다. 선별되었지만 그것을 직무를 위한 선별이지 완벽하다는 표시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교우 분들이 “신부가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수녀가 왜 저런 말을 해!”라고 속으로 구워 먹고, 삶아 먹고, 볶아 먹고 심지어 갈아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교우분들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신자들에게 잘 봉사하기 위해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군림하거나 더 의지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티모테오와 티도는 사도 바오로의 참으로 좋은 협력자였습니다. 물론 두 분도 나중에 모두 주교가 되었지만,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1고린 4:17), 자신과 함께 걱정해는 사람(필립 2:19-20), 충실한 협력자(로마 16:21), 그립고 보고 싶은 친구(2디모 1:4)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명상의 집에서 함께 사는 우리 신부님 수사님들께서 저를 사랑하는 아들이요 협력자로 친구요, 늘 함께 걱정해 주는 동료로서 대해 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수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티모테오가 바오로의 오른팔이었다면 티토는 비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방인이었다가 개종하여 바오로의 착실한 아들(티토 1,4)로서 코린토 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바오로에 의해 파견되었으며, 크레타 섬에서 바오로 지시를 완수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습니다.
두 분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오로의 복음 선포를 온 마음으로 온 몸으로 도왔으며 가족과 친구처럼 그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바오로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에게 협조한 티모테오와 티토의 겸손과 순종의 마음은 우리가 어떻게 사목자들 곁에 있어야 하는 지를 잘 보여 줍니다. 내 뜻대로 그들이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내 생각대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고 질투하는 미숙한 협조자가 아니라, 진정 가족과 친구처럼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해주고 지지해 주며 그가 필요로 하는 일에 협력하고, 지치고 쓰러져 있을 때 위로해 주며 기도해 주는 그런 협조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우리 명상의 집에 오시는 교우분들이 떠 오릅니다. "우리 교우분들은 사랑으로 가득한 참 좋은 가족 같다"는 느낌이 들어 제가 참 든든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위해 뭐라도 하나 더 해 주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보편적인 사제직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72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 지어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떤 것을 소유해야 하고 어떤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 대목을 많은 교우분들이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왜 하필 72명을 보내셨는지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70명 혹은 100명을 짝지어 보내실 수도 있었는데 왜 72명을 보내셨을까요? 72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 지으면 36개의 짝이 됩니다. 36은 성경의 완전수인 12와 3의 곱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모두에게 당신의 일꾼으로서 자격을 주시면서, 동시에 물질로부터의 집착에서 자유로움을 명하시고, 주님의 평화를 빌어 주고, 아픈 이들을 낫게 해 주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72명은 주교님, 신부님, 수녀님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으로서 물질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지녀야 하며,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를 전해 주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신부들의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살피고, 수도자들의 사람에 집착하는 마음을 따지지 전에, 나의 내면에 들려 주시는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같은 주님의 제자로서 주어진 직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서로 기도와 사랑으로 도와 주며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을 내 마음 안에 먼저 쌓아갈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72명의 제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72명의 제자단이 서로 나누는 사랑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바로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마음을 비우고 용서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날마다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함께 해 주시는 여러분들이 계셔 참으로 든든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영원히 저희 명상의 집을 사랑해 주실 거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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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8,21)
43년 전, 사제가 되면 어떻겠는가 라는 어느 신부님의 권유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 마치 천둥이 뇌를 치는 듯했습니다. ‘내가 사제가 될 수 있다?!!’는 기쁨과 놀람으로 너무나 큰 영광을 느끼면서 가던 군인의 길을 기쁘게 포기하고 사제성소에 응답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군대 생활은 더 기뻤고, 버겁게 느꼈던 현실도 더 이상 어렵거나 힘들지도 않았으며, 재물이나, 인간관계나, 주어진 일 등 상황은 같았으나, 나의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내가 가진 작은 것도 어떻게 지혜롭게 나눌 것인가가 오직 관심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봉독하며 주님께서는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느꼈고, 주님의 말씀은 글자 그대로 나에게 복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성경 봉독은 어떤 책보다 흥미로웠으며 읽을수록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말씀을 읽는 시간은 기도에 젖어 들어 말씀에 취하여 말씀 안에 쉬는 평화의 시간이었으며, 행여 하루라도 기도를 빠지면 이튿날 두 배의 기도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길을 걷거나 차를 타도 내 눈앞에는 십자가가 보였고, 주님의 현존을 감지하며 주어진 나의 모든 일을 오직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만나도록 첫 마음에 넣어 주신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 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영이 오늘 우리에게 내리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며 잊어버린 첫 마음을 찾아 주시려고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창을 다시 두드리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은 마음을 열어 사제서품 때 선택한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묵상해 봅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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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담임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일찍 마치고 선생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씩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제게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명연이는 조용하고 집중을 잘하니까 커서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야.” 선생님의 이 예언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저는 과학과 전혀 거리가 먼 가톨릭 신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말씀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마지막이라며 눈물 쏟으며 인사하면서 들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기억하는 말씀이었지만,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과학보다 신학이 더 좋았고, 세상일보다는 주님 곁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판단한다는 이유로 바뀐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판단일 뿐이기에 그렇게 살면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판단에 흔들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의 판단보다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의 판단보다는 세상의 판단을 따르려고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했습니다. 당시 부모의 일을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즉, 예수님도 목수로 사는 것이 당시 세상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1,18.19)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루카 1,21)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오늘, 곧 지금 여기에 하느님께서 주님을 통하여 현존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은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이제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순간, 기뻐하셨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죄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수난과 죽음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차게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뜻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또 못 본 척합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쫓는 길이 아닌, 하느님을 쫓는 길. 이 길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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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이루어지다>
루카 1,1-4 (머리말); 4,14-21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이루어지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0)
사랑이 오시니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
끝없이 서로 죽이는
게걸스러운 분노를 녹여
오늘 사랑이다
늘 사랑이다
해방이 오시니
해방으로
오늘을 살아
무릎을 꿇리려 날뛰는
겁에 질린 광란의 총칼에 맞서
오늘 해방이다
늘 해방이다
기쁨이 오시니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
살맛을 삼켜버리는
잿빛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오늘 기쁨이다
늘 기쁨이다
희망이 오시니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
희뿌연 어둠 속
강요당한 무기력을 떨치고
오늘 희망이다
늘 희망이다
살림이 오시니
살림으로
오늘을 살아
죽임이 살길이라
유혹하는 검은손을 뿌리치고
오늘 살림이다
늘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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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충만한 은총 속에 살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저희를 새롭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영지와 난이 자라는 곳에 절로 길이 생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참된 권위와 말씀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권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지요?
복음은 갈릴래아 나자렛의 회당에 가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읽으셨는데 그 내용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고 선포했던 해방과 구원을 약속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신 후 한마디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결국,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영과 육으로 가난하고,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은총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억압받는 이들의 구원자이시고,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를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성경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히브 4,12)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물리치셨고, 말씀 한마디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라! 해서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지혜서에는 “그들을 낫게 해 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 당신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 저승 문으로 내려보내기도 하시고 끌어 올리기도 하십니다.”(지혜 16,12-13) 하고 말씀의 능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맛 들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방에 성경을 가지고 다녀라! 틈나는 대로 읽고 말씀에서 힘을 얻으라고 권고하십니다.
“성령으로 쓰여진 성경을 성령의 빛 안에서 읽을 때 항상 새로워집니다. 매일 하느님의 말씀으로 길러진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만나는 사람들과 동시대인이 됩니다. 과거에 대한 황량한 향수에 빠지거나 미래에 대한 실체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유혹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 안에서 살도록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침에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집을 나선다면 그분은 반드시 그 말씀으로 물든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자주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제가 어느 날 강론을 통해 성경 읽기를 권고하면서 ‘눈이 안 좋아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눈이 더 나빠져서 못 보게 되기 전에 한자라도 더 읽겠다고 마음을 먹고 읽으시라’ 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성 안나 할머니께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할머니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안 보이던 눈이 밝아졌습니다. 또한 마음속으로 미워하던 이들을 용서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의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는 말씀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육체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이 뜨여 그 기쁨은 날로 더 커갔습니다.
만약 할머니께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성경 읽기를 아예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육체적인 눈도 영적인 눈도 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믿음을 기르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지금 행하는 데서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 순간이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은혜로운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그 희년의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풀어주고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희년은 기쁨의 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5년을 “희망의 순례자” 라는 주제로 희년을 선포하셨는데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억눌린 어둠의 상태를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밝혀 주시고, 죄의 용서와 한없는 사랑을 통해서 자유를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새 삶과 해방의 기쁨으로 초대하십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면 은총 안에 머물게 됩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입니다. 희년의 은총을 함께 기뻐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권고를 듣지 않아서 소금기둥이 되었고,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세가 세워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결국 향기가 있고 꿀이 있어도 내가 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주님의 은혜로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슬플 때면 성경을 펴십시오. 그대를 위로할 구절이 나와 있을 것입니다. 의혹과 두려움이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성인들은 불확실하거나 걱정이 있을 때마다 이 은총의 샘을 찾았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야고 1,21) 그리고 성체를 자주 모시길 바랍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매일을 은총의 순간으로 엮어 가시고 그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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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중요한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뜻과 가르침이 담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김으로써 무엇이 주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하고, 식별한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남겨주신 그분의 몸을 받아모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그 믿음 안에서 같은 신앙을 지닌 형제 자매들과 한 몸을 이루지요. 그런 점들이 오늘의 전례 독서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느헤미야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서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과 하나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한편, 제2독서에서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 구성원들 각자가 고유한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어야 함이 강조되지요. 마지막으로 복음에서는 우리가 듣고 받아들인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머나 먼 타국에서 유배중이던 유다인들은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왕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고향 땅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율법에 충실했던 사제 에즈라와 왕의 시종관이었던 느헤미야가 주축이 되어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의 의식과 생활 깊숙이 물들어있던 우상숭배의 흔적들을 지우는 종교개혁이 단행되었지요. 오늘 제1독서는 종교개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다음 에즈라 사제가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율법서를 읽어주는 장면입니다. 유배 전에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제사가 그들 공동체의 구심점이었지만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기에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줄 또 다른 구심점이 필요했고, 율법을 그 구심점으로 삼은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로 앞 구절에 그 내용이 담겨있지요.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느헤 8,1)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가 원해서 주님의 말씀이 담긴 율법서를 읽어주기를 청했다는 것이, 또한 그 말씀을 듣는 것을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하려고 했다는 것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황폐해진 조국의 상태를 보고도 슬퍼서 울부짖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는 비참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했다니, 그 간절함이 주님의 마음에 가 닿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율법의 중심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에서 외적인 ‘형식’으로 옮겨간 겁니다. 자기들의 삶을 지탱해 줄 근간이라고는 율법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율법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수많은 보호규정들을 만들었는데, 그 개수가 너무 많아지다보니 율법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지키기에도 버거워 그 안에 담긴 근본정신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 것이지요. 또한 종교 지도자들도 율법에 담긴 근본정신이 제대로 실현되도록 노력하기보다, 율법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기득권을 강화하려고만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잘 지키도록 계몽할 생각은 않고, 그들을 ‘죄인’ 취급하며 비난하고 단죄하기 바빴던 겁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들의 상대적인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말씀이신 주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십니다.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한편, 여러 기적과 표징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유다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좋은 분이신지를 느끼고 깨닫게 하려고 하셨지요. 그렇게 하느님이, 그분 말씀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그분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있고,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의도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뜻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시고 행동과 삶으로 그 뜻을 실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는 장면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라는 복음사가들의 증언에서 그런 점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주님의 입에서 선포되는 구원의 말씀 안에 담긴 의도와 뜻이 온전히 성취되려면 그것을 듣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녀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라야 밥 한 끼에 감사할 줄 알며 그 밥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그것을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인 그 말씀을 실천해야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밤 새 그물을 쳤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자 수많은 고기가 잡혔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여기서 ‘듣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의 뜻은 영어로는 ‘hear’에 가깝습니다. ‘hear’는 특별한 의지나 목적을 갖지 않고 어떤 소리가 ‘귀에 들리는 그대로 듣는 것’을 가리키지요. 즉 내 뜻과 기준으로 하느님 말씀을 판단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그 말씀 안에 담아주신 뜻과 의미가 나를 통해 성취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은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매일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 점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오늘’을 강조하신 겁니다. 즉 우리는 매일 매일,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내 마음에 들려오는 주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들은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뜻이 조금씩 완성되어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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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전례공동체, 한몸공동체, 해방공동체-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 드려라. 온 누리여, 주님께 노래 불러라.”(시편 96.1)
너나할 것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작금의 험하고 힘든 세상입니다. 다음 두 성구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2027년 서울세계청년대회 모토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30)
지난 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중 한구절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함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9년 9월30일 성 예로니모 축일에 선언하셨습니다. 성 예로니모의 두 말씀도 생각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자주 읽으십시오. 그대의 손에서 거룩한 책을 절대 내려놓지 마십시오.”
오늘 방금 흥겹게 부른 시편 19장 화답송과 이어지는 시편 말씀도 흡사 말씀 예찬처럼 하느님의 말씀 주일에 잘 어울립니다.
“주여 당신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오이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참되어 어리석음 일깨우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입니다. 참된 삶은 물론 공동체 형성에 말씀 공부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옛 현자 다산 정약용의 지혜도 우리의 말씀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파의 껍질을 벗겨야 속살이 드러나듯이, 공부의 핵심을 찾지 못하면 쓸모없는 지식만 머리에 쌓인다. 의리의 정밀함과 미묘함은 마치 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새삼 한결같은 말씀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의 진수를 깨닫고 참 좋은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말씀의 은총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참 좋은 교회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공동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누구나에게 공동체 소속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첫째, 전례공동체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전례가 삶의 꼴을, 공동체의 꼴을 만들어 줍니다.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전례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 느헤미아서와 복음도 공동체 전례를 배경으로 합니다. 제1독서에서 율법학자이자 사제인 에즈라의 지도하에 온 백성이 몰문 앞 광장에서 공동전례에 참석합니다. 흡사 미사공동전례에 참석한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에즈라는 성경을 읽고 백성은 모두 귀를 기울입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화답합니다. 그런다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합니다. 말그대도 경청공동체, 찬양공동체, 경배공동체입니다. 느헤미와 총독과 사제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감격에 벅차 우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니 그 내용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술을 마시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들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바로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인 “오늘”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공동체에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진짜 힘입니다.
둘째, 한몸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익집단도, 이념집단도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살아 있는 유기적 한몸 공동체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요 우리는 하나하나 그 지체가 됩니다. 모두의 얼굴을 한데 모으면 그리스도의 얼굴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수족에 속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바로 주님안에서 일치의 한몸 공동체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습니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몸의 지체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어느 하나 반박할 수 없습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라는 환상이 지옥입니다. 우열의 비교가 아닌 상호보완의 한몸공동체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형제의 장점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붕괴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이런 한몸공동체의 모델입니다. 한몸공동체를 육성하는데 공동전례의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니 전례공동체와 한몸공동체는 하나입니다.
셋째, 해방공동체입니다.
참으로 모두를 자유롭게, 행복하게 하는 주님의 해방공동체입니다. 바로 희년의 영성입니다. 희년은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나자렛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도 2025년을 정기 희년(2024.12.24.-2026.1.6.)으로 선포하시며 칙서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의 순례자’가 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년선포의 내용이 장엄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말그대로 자유와 해방의 선언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기쁜소식이요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선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희년의 영성이요 치유와 해방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Today is the day).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살아야 하는 희년의 영성, 해방공동체임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마침내 희년의 기쁨과 자유, 해방이 복음이 실현되었다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년, 매일이 희년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좋은 전례공동체, 한몸공동체,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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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만족을 찾는 사람과 구원을 찾는 사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생각해봤습니다.
첫째, 선포하는 사람 측면에서 생각해봤는데 선포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포해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포자가 자기 말을 하면 성경 말씀은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봉독하는데 어떻게 자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말을 한다는 것은 선포되는 말은 성경이지만 선포하려고 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은 자기 말인 경우입니다.
의도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한 예입니다.
예를 들어 논쟁할 때 권위자도 자기와 같은 말을 했다는 식으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며 자기 말이 성경 말씀이고 성경 말씀이 자기 말이라는 식 말입니다.
또 자기 말을 하려고 함은 아니지만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들어내려는 의도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멋진 강론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칭찬받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나는 없고, 내가 주님이 되어서 또는 내가 주님인 듯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처럼 성령을 받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는 이사야서 부분을 읽으시는데 이것을 볼 때 성경 말씀은 주님의 영에 의한 선포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다.
둘째,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듣는 사람도 성경 말씀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라 다른 말을 듣는 사람이거나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도 다른 말로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안에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들은 다음엔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알아듣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인용한 이사야서를 보면 가난한 사람,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만족을 찾는 이들이 아니고 구원을 찾는 이들이고, 구원을 찾는 이라야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만족을 찾는 이들은 굳이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을 겁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달콤한 말로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다가 비 구원의 상태에 처했을 때야 찾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족은 인간에게서도 얻을 수 있고 인간의 만족이 더 달콤하고 자극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묻습니다. 나는 가난한가? 부유한가? 나는 만족을 찾는 사람인가? 구원을 찾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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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ㄴ)
<희년을 향하여!>
'연중 제3주일'인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그리고 '1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해외원조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4,1-4;4,14-21)은 '머리글과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삶인 희년과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자주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멀어진 삶을 살곤 합니다. 그리고 종종 서로에게 불편함과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나약함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큰 기쁨'입니다.
오늘은 질병과 기아,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해외원조주일'입니다.
오늘 실시하는 '2차헌금'은 '세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우리의 나눔이요 사랑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ㄱ)
당신을 따르는 굶주린 군중을 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우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나눔의 참의미'는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필요한 이웃에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넉넉해서, 그리고 쓰고 남아서 나누는 것은 참나눔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나의 작은 사랑의 나눔이 하느님을 기쁘게 합니다.
그 작은 나눔들이 모여 너를 살리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의 힘으로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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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1, 21)
우리의
현실 안에
살아 숨쉬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오늘이 있기에
우리의 내일이
있습니다.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의미 있는
말씀으로
오늘
이 아침이
열립니다.
하느님의
말씀 없는
오늘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안고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오늘입니다.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떨어지고
멀어진
거리가
바로 사랑의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멀어진 거리를
이어주십니다.
오늘을
되살리시는
말씀이 되십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말씀의 살아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말씀의 가득찬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어제와 내일
그리고 오늘도
이루어져야 할
말씀의 삶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깊이
새기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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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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