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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한옥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때는 개발의 대상이었던 한옥이 이제는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스스로 부정했던 전통을 뒤늦게나마 다시 살려보려는 깨인 사람들의 노력과 웰빙이라는 가치관의 변화 덕분이다.
한옥은 자연친화적인 집이다.
엄청난 공간도, 번드르르한 장식 없이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준다. 툇마루에 앉아 낮은 처마의 부드러운 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도심의 빌딩숲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과 여유가 어느새 바로 곁에 다가와 있는 듯하다. 한옥의 참맛을 느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한옥을 살림집으로 하기에는 아직 이런저런 제약들이 많다. 대신 한옥을 개조해 만든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제법 훌륭한 대안이 되어준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들에게는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부티크 게스트 하우스라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찾아다니면 찾아다닐수록 빠져들게 되는 것이 또 한옥의 매력이다.
서울 시내에서 한옥의 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공간들을 찾아다녀 보았다.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한옥 부티크 게스트 하우스 ‘락고재’에 들러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남다른 혜안으로 그 집을 만든 안영환 대표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옛 것을 즐기면 즐겁지 아니한가
한옥 부티크 게스트하우스, 락고재
락고재(樂古齋)는 서울에서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다. 주로 서울을 찾은 외국인들이 묵어가는 게스트 하우스지만 여느 게스트 하우스와는 다르다. 한국의 양반들이 살던 기와집에서 제대로 된 한정식과 한옥 특유의 온돌을 살린 깨끗한 찜질방까지 체험할 수 있는 부티크 게스트 하우스다. 하룻밤 숙박료도 1인실 18만원부터 시작된다.
2003년 계동에 문을 연 락고재는 방 네 칸에 정자를 갖춘 단아한 한옥이다. 본디 1930년대 진단학회가 있던 곳으로 대문 앞 주차장 부지까지 더하면 200평 규모다. 이 곳에 안영환 대표가 네 채의 한옥을 새로 수리해 들여 놓았다.
락고재는 정방형의 땅에 중정을 중심으로 네 채의 한옥이 뺑 둘러싼 구조다. 삐걱거리는 나무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푸른 녹음에 둘러 쌓인 자갈길이 객을 맞는다. 바로 대청마루로 올라갈 수도 있고 건넌방을 끼고 돌아 들어갈 수도 있는데 어디로 들어가도 고즈넉하면서도 정다운 모습이다. 서울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조용하고 여유롭다. 멀리 떨어져 보아도 가까이 들여다 보아도 곳곳이 그림이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오감으로 느껴진다.
오래도록 살아남은 귀한 집, 현대의 손으로 다듬어진 전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락고재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다.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지막한 한옥이 보인다. 별채를 돌아 중정으로 들어가 주인을 찾으니 한지 창살문이 열리면서 50대 초반의 남자가 반갑게 손님맞이를 한다. 척 보기에도 술 좋아하고 풍류를 즐길 것 같은 호방한 기운이 느껴진다. 자칭타칭 풍류객이라 불리는 이사람이 바로 락고재의 주인인 안영환 대표(53)다.
안 대표는 락고재에서 가장 시원한 정자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청했다.
여름 방석을 깔고 앉아 사위를 둘러보니 락고재의 건물 네 채와 풍채 좋은 소나무가 서있는 중정, 그리고 집을 둘러싼 토담이 한눈에 들어온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별로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다.

1, 대청마루
락고재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안 대표는 “대청마루에 앉으면 좌식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이라도 누구나 두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앉는다”는 말로 한옥의 글로벌한 매력을 설명한다.
2, 기와와 토담
락고재의 담은 기와에 붉은 흙은 발라 쌓았다. 기와의 진한 회빛과 흙의 붉은 빛이 절묘한 색의 조화를 이룬다. 락고재에서 묵었던 프랑스 색채전문가도 감탄했던 컬러 매치라고. 담 옆에 놓인 장독대와의 조화도 예사롭지 않다.
3, 정자
정자마루가 달린 정자방. 락고재 네 채 중 가장 작은 규모지만 가장 시원하다. 여름밤 정자에 앉아 시원한 화채를 마시면서 부채질만 해도 에어콘이 필요없다. 이따금 가야금 병창이나 판소리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4, 찜질방
안 대표가 일본 전통 료칸의 온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곳. 한옥의 특징인 온돌의 매력과 효능을 체험하는데도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방마다 시간을 예약해 사용하므로 붐비지 않는다. 벽도 한지 등을 이용해 깔끔하고 예쁘게 장식해 놓았다.
5, 나뭇살과 댓돌
한옥은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이다.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만들기는 힘들지만 만들어진 후에는 그야말로 집과 자연을 하나로 만들어준다. 안 대표는 락고재를 인간문화재인 대목장 정영진 옹에게 부탁해 옛 모습 그대로 살려냈다.
6, 대문
락고재로 들어가는 대문. 끼익하고 나무 소리가 날 것만 같다. 투숙객의 편의를 위해 원래 대문 대신 주차장 앞으로 새로 대문을 냈다. 락고재는 옛 것을 즐기는 곳이라는 뜻으로 안 대표의 부친이 인사동 학고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어준 이름이다.
■ [인터뷰] 안영환 락고재 대표
비싸도 기꺼이 찾아오는 한옥

안 대표가 락고재 문을 연 것은 2003년. 중구 계동에 일제 시대 진단학회 건물로 쓰이던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그날로 매입해 인간문화재 정영진 대목장 등에게 맡겨 새로 단장했다.
안영환 대표는 이미 그 이전부터 한산기획이라는 회사를 차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고택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남의 집을 빌려 하는 일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던 터라 차라리 직접 한옥 숙박업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안 대표는 그저 그런 민박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옥 숙박은 곧 한국의 이미지를 파는 것이잖아요. 가장 좋은 것을 대접해 비싸더라도 찾아오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락고재는 방마다 화장실이 딸려 있는 것은 기본. 아담한 히노끼 욕조에 고급 한정식으로 아침과 저녁 식사가 나오고 예쁘장한 찜질방에서 진짜 군불에 몸을 지질 수도 있다. 원하면 가야금 병창과 판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가격은 특급호텔 수준이지만 프로그램은 그 이상이라고 안 대표는 자부한다.
전국의 고택을 돌며 얻은 상당한 안목이 있었기에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한옥의 맛과 멋을 살린 집을 만들 수 있었다.
“한옥은 집 주인이 80%, 도편수가 20%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옛날 양반들이 그랬던 것처럼 집 주인이 산세, 풍수, 조경까지 아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안 대표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한옥설치예술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막상 집을 만들고 보니 남의 집을 구경할 때와는 또 달랐다. 한옥이 자연과 합일하는 집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편케 해주는 것이 에코 라이프 시대의 최고의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도 들었다.
그래서 락고재에 이어 명동에 한옥으로 한정식 식당 ‘진사댁’을 지었고 조만간 기흥 백남준 아트센터 근처에 누각으로 된 식당 ‘몽인각’도 오픈한다. 그의 호인 몽중(夢中)을 딴 택호다.
컴퓨터 엔지니어에서 한옥 전도사가 되기까지

사실 락고재를 짓기 전까지 안 대표의 본업은 식당이었다.
지금도 마포, 명동, 선릉에 한정식집 ‘진사댁’을, 목동, 여의도, 명동에 제주 고등어 갈치 전문점 ‘제주미항(구 제주물항)’을 운영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미국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시스템 엔지니어 회사에서 6년간 일했다. 한옥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러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가 부동산 시행업을 맡게 되었다며 그를 불러들였다. 안 대표도 미국 생활엔 큰 미련이 없었다. 안정된 생활은 보장되었지만 꿈이나 희열을 느끼며 살 수는 없는 조건이었다. 부동산 일을 하면서 우연히 마포에서 한옥을 허물고 빌라를 짓겠다는 사람을 만났고 자리도 그렇고 한옥이 아까우니 차라리 한정식집을 차려보라고 조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덜커덕 음식점을 열게 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유교 집안에서 맏아들이 음식점을 한다니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아들의 끈질긴 설득에 아버지는 결국 한번 해보라고 허락했다. 선친 3대가 성균관 진사를 한데서 착안해 ‘진사댁’이라는 택호도 내려주었다. 진사댁이 잘되자 제주에서 물항식당을 하던 사촌동생을 꼬셔 ‘제주물항’이라는 식당을 새로 냈다. 매일 비행기로 고등어 갈치를 공수해 싱싱한 생선을 내놓으니 날개 놓친 듯이 팔렸다.
한옥의 매력에 처음 빠진 건 마포의 진사댁을 운영하면서부터다. 마포 황부자가 살았다던 그 집은 보면 볼수록 정이 갔다. 한옥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에서 볼 때 진정한 멋이 우러났다.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외국 친구들이 많았던 터라 한국 구경을 시켜주고 나면 실컷 보고 나서 “그런데 너네 나라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이냐?”는 뼈아픈 질문이 돌아왔다. 그가 찾은 답은 한옥이었다.
한옥 비즈니스의 전초기지 한옥 호텔과 한옥 학교를 설계하다
락고재가 안정을 찾자 안영환 대표는 안동 하회마을에 락고재를 하나 더 지었다. 지역적 특징을 살려 초가로 널찍하게 지었다.
안동은 안 대표가 한옥 비니지스에 가장 이상적인 지역으로 꼽는 곳이다. 워낙 보존도 잘되어 있고 터도 좋다. 안동 락고재를 만든 뒤에는 아예 주민등록도 안동으로 옮겼다.
현재 안 대표는 안동에 한옥 호텔과 한옥 학교를 짓고 있다. 한옥 호텔은 20평 규모의 독채에 의자가 있는 거실과 풀빌라 스타일의 자쿠지를 들여 놓을 계획이다. 한옥에 리조트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안 대표는 한옥과 호텔이라는 이질적인 접목에 대해 “한옥은 끊임없이 변하는 겁니다. 지금 한옥도 조선시대 한옥과는 다른 것처럼 앞으로의 한옥도 시대에 맞춰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이 달라질 겁니다. 다만 한옥의 본질만 지키면 되는 거지요.”라고 말한다.
개관하기까지는 3~4년이 걸릴 예정이다. 한옥 학교는 그보다 먼저 내년 봄에 문을 연다. 안동 고등공민학교 자리에 들어설 한옥 학교는 말 그대로 한옥을 지을 인재들을 길러내는 곳. 안 대표는 한옥 학교야 말로 한옥 비즈니스를 활성화하는데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한옥을 짓거나 살려고 해도 가격 때문에 엄두를 못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부자재, 인건비 더하면 거의 양옥의 두 배인 평당 1000만원이나 되니까요. 한옥학교가 자리를 잡으면 한옥 부자재도 모듈화를 해서 가격을 낮추고 인력도 많아지니까 자연히 코스트 다운이 되는 거지요.”
한마디로 한옥도 조립주택처럼 지을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것. 학생들에게는 자재를 공급해주고 학생들의 작품을 한옥 호텔이나 한옥을 지으려는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면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하드웨어 다음은 소프트웨어 한옥에 풍류 깃들게 할 계획
문득 자칭 한옥설치예술가인 안영환 대표의 집은 한옥일까 궁금해졌다.
“한옥 비즈니스 하면 꼭 한옥에 살아야 합니까? 하하. 전 부모님이 자식들과 함께 살겠다고 지어 놓은 빌라에서 삽니다.”
한옥을 업으로 늘 한옥을 접하니 오히려 한옥에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옥 비즈니스 다음으로 안 대표가 하고 싶은 것은 풍류다. 한옥이 하드웨어라면 풍류는 소프트웨어다. “풍류는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서입니다. 기생문화가 전부인 것처럼 잘못 알려졌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거든요.”
워낙 술을 좋아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안 대표는 타고난 풍류객이지만 풍류를 제대로 즐기려면 시서화는 물론이고 대금이나 거문고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신은 이미 늦었을지 모르지만 외국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수학 중인 아들에게는 반드시 풍류 비즈니스를 하도록 할 생각이다.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번 돈의 일정 부분은 사회에 환원하자고 이미 가족끼리 합의해 두었다.
그리고 자신은 평소 좋아하는 대로 국밥에 탁주 한 사발 즐기면서 지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소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대로 거사가 될 지도 모른다. 한옥과 함께한 세월은 그에게 한옥의 멋 뿐만 아니라 한옥에 살던 사람들의 멋까지 가르쳐 준 모양이었다.
[출처 매일경제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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