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의 ‘교정일치’론과 현실 참여
정 용 서(Jeong, Yongseo)
(전략)
II. 동학의 천도교로의 전환
동학세력은 1894년 농민전쟁 이후 삼남지방을 떠나 북부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3) 이들이 북부지방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것은 갑오정권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역시 동학농민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학의 잔존세력으로 알려지면 즉시 처벌되었고, 지속적으로 감시되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가운데서도 동학세력은 조직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이 손병희.김연국.손천민 등이었다. 이들은 최시형 사후 교단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대립.경쟁하였다. 그러나 손천민은 1900년 8월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김연국도 1901년 6월 체포되어 1904년 12월 석방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고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났다. 반면 손병희는 포교에 전력을 기울여 이후 자신의 인적.물적 토대가 된 평안도.함경도.황해도 지역을 기반으로 주도권을 확립해 나갔다.
또한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제정세와 근대 문물을 살피는 가운데 문명개화운동으로 대대적인 노선 전환을 꾀하였다.4) 농민전쟁에서 드러난 동학의 입장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노선이었다. 농민적 입장에서 신분제.지주제로 요약되는 봉건지배체제를 변혁하여 토지균분을 꾀하고, 제국주의침략을 막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제국주의침략과 연결되어 있고, 지주가 주체로 설정되고 있었던 자본주의 근대화 노선, 즉 서구식 문명개화에 비판적 입장이었다.5) 그러나 손병희는 망명생활을 통해 국내지배층과 외세를 모두 거부하는 동학의 노선이 시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손병희는 서양의 발달된 물질문명을 보면서, 그것을 ‘천지가 크게 변하는 창시(創始)의 운(運)’이라고 생 각하였다.6) 문명화가 세계의 대세라는 것은 국외에 있는 그에게 너무나 확연한 사실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농민층의 ‘반란세력’이 아닌 시세를 아는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동학세력의 노선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내 집권세력으로부터 엄혹한 탄압을 받고 있던 처지에서 동학을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화파세력과 동학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일본을 끌어들여 정치적 입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문명개화 노선으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개화론으로의 전환을 위해 망명개화파.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손병희는, 1902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세력인 권동진.오세창 등을 동학에 입교시켜 자신의 참모로 영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망명 개화파세력들을 끌어들인 손병희는 1903년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여 동학의 노선전환을 공식화하였다.7)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 가지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바, 그것은 도전(道戰).재전 (財戰).언전(言戰)의 삼전(三戰)이라는 것이었다. 천도(天道)=동학(東學)의 근본은 변할 수 없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은 달리 해야 하며, 그래야만 문명에 나아가 ‘보국안민 평천하(輔國安民 平天下)’의 계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원의 부원을 이용하여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재전, 외교관을 양성하여 각국과의 외교를 잘하자는 것이 언전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동학을 국교로 하자는 도전에 근본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8)
문명개화론으로 노선을 전환한 동학세력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손병희는 러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일로(日露) 어느 나라가 필승할가를 잘 알아야 할 것이오. 그것을 적중한 다음에는 반드시 승전(勝戰)할만한 편에 가담하여 공동 출병을 하여 승전국의 지위를 얻어야 될 것이오. 그 지위를 얻은 뒤에는 강화담판(講和談判)에 승전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국가만전의 조약을 얻어야 할 것이니 이는千古에 만나지 못할 기회”라고 말하고, 지리적 관계, 전쟁에 임하는 동기, 군략과 병기문제 등을 들어 ‘일승패로(日勝敗露)’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럼으로 한국의 형편상 반드시 “노국(露國)과 선전(宣戰)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무상(無上)의 책(策)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9)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 당국과 한정개혁(韓政改革)의 밀약을 굳게 맺은 뒤에 일본을 위하여 노(露)를 치고 일변(一 邊) 국권을 잡은 뒤에 제정(諸政)을 혁신하면 아한재생지도(我韓再生之道) 이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일환으로 일본에 군자 금 1만원을 헌금하는 한편, 국내의 동학조직에 일본군을 지원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이용구와 일본군 통역이었던 송병준을 매개로 일본 군부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였다. 일본군의 신뢰획득을 통해 한국정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종교.정치결사로서의 행동의 자유를 얻겠다는 의도였다.10) 동학은 배일세력이 아니며, 일본군의 군사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11) 일본군 역시 일본인의 이익, 군사 행동상의 안정, 한국국내 치안유지 등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였다.12) 일본군의 지원이 확인되자 손병희는 이용구에게 동학세력을 기반으로 한 ‘민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하였다. 민회조직은 중립회 를 거쳐 1904년 9월 진보회로 연결되었고, 12월 일진회와 합동하였다.13) 이들은 동양평화를 위해 러일전쟁에 참여한 같은 황인종인 동맹국 일본을 돕는다는 방침을 명확히 하고, 철도부설과 군수물자 운반 등을 통해 일본군에 협력하였다. 하지만 손병희는 일진회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일진회가 1905년 11월 보호국 찬성에 대한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친일행위를 노골화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일진회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이 자신들과 일치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편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 명의로 H제국신문H과 H대한매일신보H에 “부(夫) 오교(吾敎)난 천도지대원(天道之 大原)일새 왈(曰) 천도교(天道敎)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중앙대교당 건축을 알리는 광고를 게재하였다.14)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것이다. 이듬해 1월 천도교인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한 손병희는 귀국 직후인 1906년 2월 10일 종령(宗令) 제5호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발 포하였다. 「천도교대헌」의 제1장은 대도주에 관한 항목이다. 그 내용은 “1조 천(天)의 영감(靈感)으로 계승함, 2조 도(道)의 전체를 통리(統理) 함, 3조 교를 인계(人界)에 선포함”이다. 그리고 3조의 내용을 “1관 종령(宗令)을 발포함, 2관 공안(公案)을 인준함, 3관 교직(敎職)을 선임함”으로 설정하였다.15) 이를 통해 손병희는 천도교단 내에서 절대적인 위치와 권한을 ‘합법적’으로 갖게 되었다.
* 연세대학교 인문예술대학 역사문화학과 강사
4) 김정인, H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H, 한울, 2009, pp.39-47. 5) 金度亨, H大韓帝國期의 政治思想硏究H, 지식산업사, 1994, pp.34-35. 6) 孫秉熙, 「三戰論」(李敦化, H天道敎創建史H 제3편, 1933, p.86). 7) 孫秉熙, 「三戰論」(李敦化, H天道敎創建史H 제3편, 1933, pp.82-86). 8) 金度亨, 앞의 책, 1994, p.36. 8) 金度亨, 앞의 책, 1994, p.36. 9) 李敦化, H天道敎創建史H 제3편, 1933, pp.32-33. 9) 李敦化, H天道敎創建史H 제3편, 1933, pp.32-33. 10) H一進會日誌H 1905.12.25. 11) 林雄介, 「一進會の前半期に關する基礎的硏究-1906年8月まで-」, H朝鮮社會の 史的展開と東アジアH, 山川出版社, 1997, p.497. 12) 「朝鮮駐箚軍の守備隊長の發言」(市川正明 編, H日韓外交史料集成 10H, 原書 房, 1981, p.88). 13) 李庸γ, 「東學.天道敎團의 民會設立運動과 정치세력화 연구(1896-1906)」, 중 앙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참조. 14) H제국신문H 1905.12.1. ; H대한매일신보H 1905.12.1. p.3. 15) 「天道敎大憲」, 1906, p.11.
(하략)
전체+원문보기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36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