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대 문종(2)
여기서 우선 제11대 문종의 국구 김은부 그리고 김은부의 처 안효국부인의 아버지 이허겸의 설명과 가계도를 살펴 본
다.
*. 김은부는 경순왕의 4남인 김은열의 후손인 김긍필의 아들이다. 수주 안산현 출신으로 이허겸의 딸인 안효국부인
과 혼인하였고 현종초에 공주절도사가 되어 왕이 거란의 2차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란갔다가 돌아오다 어의(御衣)를지
어 바치게 하여 왕비가 되었고 나중에 두딸이 더 왕비가 되어, 그 소생인 아들들이 왕이 되었다.덕종, 정종, 문종 이다.
김은부의 그 뒤의 실전은 알 수 없고 그 후손인 김위(金渭)가 안산김씨의 시조가 된다.
이허겸은 선조인 신라의 대관인 허기(許奇)의 후손으로서 신라 경덕왕 연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그때 안록산
의 난이 일어나(755년) 당현종이 촉지방으로 피신하여 호종하게 되었는데, 환도 후 가상하게 여겨 이(李)성을 하사하였
고 그 후손들은 이씨와 허씨를 같이 썼고 이름은 외자로 하곤했다. 또 그 자손들이 소성현(邵城縣)으로 이주하여 살았
는데, 그곳이 바로 인주(仁州)이다.소성백으로 봉해졌고,인천이씨의 선조이다. 이허겸의 딸인 안효국부인은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부인이 되었다.
2.문종의 가족들
문종은 인평왕후 김씨, 인예왕후 이씨. 인경현비 이씨. 인절현비 이씨, 인목덕비 김씨 등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
들 부인들 중 인평과 인목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이자연의 딸이다.
이들 부인들 중 인예왕후 이씨가 10남 2녀를 낳았으며, 인경현비 이씨가 3남을 낳았고 나머지 부인들은 소생이 없었
으니 문종은 총 13남 2녀를 얻었다. 인예왕후 소생 자녀로는 순종, 선종, 숙종, 대각국사 후(의천), 상안공 수, 보응 승
통 규, 금관후 비, 변한후 음, 낙랑후 침, 총혜수좌 경 등의 열 명의 왕자와 적경, 보령 두 공주가 있으며, 인경현비 소
생 자녀로는 조선공 조, 부여공 수, 진한공 유 등의 세 왕자가 있다.
이들 가족들 중 5명의 부인과 대각국사 왕후의 생애를 간단하게 요약한다. 순종, 선종, 숙종 등은 각 왕들의 실록에
서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나머지 아들들과 공주의 삶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어 생략한다.
인평왕후 김씨 (?-1057)
인평왕후 김씨는 현종의 딸로 원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따라서 문종과는 이복남매간이 된다. 칭호는 홍성궁비였으며,
소생은 없었다.
<고려사> ‘열전’은 그녀에 대해 현종의 딸이라는 것만 밝혀놓았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다.다만 ‘세가’문종편에
1057년(문종11년) 5월에 흥성궁씨가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녀가 곧 인평왕후 김씨인 듯하다. 능에 대한 기록
은 남아있지 않다.
인예왕후 이씨 (?-1092)
인예왕후 이씨는 인주 출신으로 중서령 이자연의 맏딸이며 칭호는 연덕궁주이다. 문종은 이자연의 세 딸을 모두 왕
비로 받아들이는데 이는 왕실 혼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례다.
그녀는 1052년 6월에 왕비에 책봉되어 순종, 선종, 숙종, 후(의천), 수, 규, 비, 음, 침, 경 등의 10남과 적경, 보령
등 2년의 자녀를 낳았다. 문종 사후에는 서경에 머물다가 109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대릉이며 개성 근처에 있
다.
인경현비 이씨 (생몰년 미상))
인경현비 이씨도 이자연의 딸이다. 언니 인예왕후 이씨에 의해 입궁한 듯하며, 칭호는 수녕궁주였다. 1082년 1월에
숙비에 책봉되었다가 죽은 다음에 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소생으로 조선공 도, 부여공 수, 진한공 유 등 3남이
있다.
인절현비 이씨 (?-1082)
인절현비도 이자연의 딸이다. 칭호는 숭경궁주였으며, 1082년(문종36년) 7월에 죽으니, 시호를 인절이라 하였다. 소
생은 없었고, 능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인목덕비 김씨 (?-1094)
인목덕비 김씨는 시중 김원충의 딸이다. 칭호는 숭화궁주였으며, 1094년(선종 11년)에 죽으니, 시호는 인목이라 하였
다. 소생은 없었고, 능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천태종의 창시자 대각국사 ‘의천’왕후 (1055-1101)
대각국사 왕후는 문종의 넷째아들로 자는 의천이다.1055년 7월에 태어났으며 11세 때인 1065년 5월에 경덕국사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주로 의천이라는 자로 이름을 대신하였다.
당시 문종은 아들 중에 한 명을 출가시키기로 결심하고 아들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누가 출가하여 부처를
공양하고 공덕을 닦겠느냐?”과 묻자 츼천이 선뜻 일어서서 자신이 출가하겠다고 대답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의천은 1065년 스승 경덕국사를 따라 영천사에 머물렀으며, 그 해 10월에 구족계(승려가 짐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그는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 짧은 시간에 화엄경(석가모니 불타의 행적과 사람들의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한 경
전, 법화경,금강경과 함께 불교 3경의 하나)을 통달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해 홀로 유학에 심취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
렀다.
이후 대승과 소승의 경,율,논, 삼장은 물론 유학의 역사, 제자백가들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
다. 이 같은 높은 학문을 바탕으로 스승 경덕국사가 죽은 후에는 강의를 맡아 명성을 날렸다.
1067년 부왕 문종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의 직위를 받자,의천은 송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허락을 구하였
다. 하지만 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유학의 길에 오르지 못하고 다만 송의 유명한 승려 정원법사와
편지 교류를 하였다. 그러다가 문종 사망 후인 1085년 4월 그는 모후에게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긴 채 유학길에 오른다.
의천이 송에 도착하자 송황제 철종은 그를 환대하고 계청사에 머물도록 하는 한편, 화엄의 대가 유성법사를 소개해
주었다. 의천은 유성과 더불어 화엄사상과 현수의 천태사상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하였다. 그 뒤 상국사로 가서 운문종
에 대해 배우고, 흥국사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을 만나 인도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못내 만나고 싶
었던 정원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정원법사를 만난 의천은 그와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기신론’ 등의 사상에 대하여 논하고 천태사상과 현수의 교
학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또 여러 종파의 학승들과도 많은 토론을 하게 되는데, 특히 자변대사와 원소율사에게서 많
은 것을 얻는다.
이때 의천이 이들 학승과 쉽게 사귈수 있었던 것은 고려에서 가지고 간 경전들 덕분이었다. 당시 송에서는 무종의
불교 탄압과 9대에 걸친 전쟁으로 불교 관련 서적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태였기에. 학승들은 의천이 가지고 간 지엄
의 ‘공목장, ’화엄수현기‘ ’무성섭론소‘ ’십이문론소‘ ’삼보제장문‘ 등과 청량의 ’정원신역화엄경소‘, 규봉의 ’화엄론관‘
등에 대단한 관심을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의천과 중국 학승들의 토론이 지속되는 가운데 의천의 귀국을 청하는 선종의 국서가 송나라로 날아들었고, 모후 인
예왕후의 간절한 염원으로 의천은 유학 1년만에 불경 3천여 권을 싣고 다시 고려행 배에 올랐다.
귀국 후 그는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포용하여 강론과 참선을 융화시키는 불교 종
파, 신라 원효의 불교의 확산 정신에 이어진다.)을 정리하고 제자를 양성했다. 또한 송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
했으며, 송을 비롯하여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불교서적 4천여권을 수집,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이때 간행된 책의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3권이 편집되었다. 흔히 ’의천목록‘이라고 불리는 이 책
에 따라 4,740권의 책이 간행되는데, 이를 고려속장경’이라고 한다.
경전 간행작업을 마친 의천은 숙종 2월에 국청사가 완성되자 그곳 주지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천태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하는데, 그이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이 무려 천 명이 넘었다. 의천은 이를 바탕으로
1099년 천태종을 개창하게 되고 이로써 천태종은 명실공히 하나의 공인된 종파로 자리하게 된다.
원래 화엄종에 몸담았던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것은 천태사상의 핵심인 회삼귀일(會三歸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가 선종과 교종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종이 도입된 신라 이후 선.교
양종은 서로 대립적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의천이 볼 때 이는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요소로 비춰졌다. 따라서
의천은 천태사상으로 선.교 양종의 화합을 이뤄 국론을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의천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많은 타 종단 승려들이 천태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천태종은 고려 사회에
서 가장 조직력이 뛰어난 종단으로 성장한다.
이 같은 종단적인 업적 이외에도 1101년 57세를 일기로 열반한 때까지 의천은 <석원사림>250권, <대각국사문집>23
권 등 수백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으며, 교웅, 징엄, 수개 등의 뛰어난 고승들을 배출하여 고려의 불교 발전에 획기적
인 공헌을 한다.
첫댓글
천태종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에도
있었는데 고려시대 의천의 힘으로
커다란 업적을 세웠네요 불교는 종파도
많고 공부해야 하는 경들도 엄청나서
감히 읽어 볼 엄두도 나지 앉습니다
읽다가 궁금해서 천태종에 대하여
찾아보니 1400년 경에 천태종파가
두개로 나뉘어지면서 조계종에 밀려
나게 되는 것 같아요
몇년전에 구인사에 가본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부산에도 천태종절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름이 생각 안나네요
수국꽃이 유명한 절 같은데요
불교에 대해서는
읽으면서도 너무 어려워서 수박겉핱기가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느라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추일슬풍님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불타가 비로자나불의 명으로
b.c.6세기경 인도 한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우리들에게 세상 만사를 깨달게 하려고
무척 애썼읍니다.
불타께서 생전에 남기신 말씀을 제자들이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널리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 행적과 기록의
해석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내용은 다른 구세주님들 계시와 대동소이할 뿐
근본내용은 사랑,자비,인 등등 착할 일을 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항상 적극 참여하여 댓글로서 격려하여 주시는
보쳉님의 건승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추일슬풍님
무더운여름을 어떻게 보내는지요
고려왕조실록을 너무도 잘보고
있습니다만 조회수나 댓글 때문에
지난번 언급하신 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
고려왕조실록을 추일슬풍님 의견대로
범방과 자유게시판에 올려 주시면 어떨까요
이렇게 정성을 드리는 글에 읽는사람도
성의를 보이는게 맞습니다 만
그거야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사람의 자유니까 댓글 안단다고
뭐라 할 수도 없잔아요 ~ㅎ
순수한 저의 생각이니 이해하여 주실거라고
생각합니다 ~~^^